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40화 (141/220)

140화 혐오의 도시 (4)

카심과 루키우스의 제안, 레이의 협박과 제인이 분노, 그리고 태일의 선택.

에너지 광장에서 오간 말들을 전해 듣는 동안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은 침묵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표정은 시시각각 바뀌었다.

당혹감, 분노, 그리고 짜증이 번갈아 떠오른다.

“…50구역까지 가는 열차 한 대를 제공해 주기로 했어. 너희는 그걸 타고 가면 돼.”

그렇게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무렵, 숙소 창밖의 해는 완전히 진 뒤였다.

코트 안을 뒤져 담배를 꺼내 문다.

그러나 카츠미가 태일의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제대로 피우지도 않을 담배를 왜 자꾸 물어? 폼이라도 잡는 거야?”

태일 나름의 습관이었다.

무언가를 각오할 때, 마음을 다잡을 때, 그리고 초조할 때 태일은 담배를 물곤 했다.

“개폼 잡는 거지, 뭐.”

페이진이 코웃음치며 고개를 젓더니 비아냥거렸다.

“자기는 모두를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갈 테니까 우리는 50구역으로 되돌아가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라잖아? 캬아! 눈물이라도 나오겠어, 아주.”

“…….”

“집어치워. 네 눈에는 우리가 들러리 정도로밖에 안 보이냐?”

페이진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자신의 무릎을 내려쳤다.

“나도 그 잘나신 분들한테 볼일이 있어. 그 새끼들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페이진은 고작 수개월 전, 천중회의 보스 웨이창을 배신하고, 용병들을 끌어와 50구역을 공격했다.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의 힘을 이용하려다가 도리어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었다.

분노에 떠는 페이진을 카츠미가 제지했다.

“페이진, 적당히 해.”

“당주……!”

“전부 네 선택이었잖아. 결국 네 욕심이 너를 망친 것뿐이야.”

카츠미의 말에 페이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페이진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야.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은 페이진이 아니었어도 결국 50구역을 무너뜨리려 했을 거야.”

카츠미의 판단은 정확했다.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은 무법자들이 모여 있는 50구역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소울벌룬을 유통한 것도, 페이진을 매수하여 용병단을 끌어들인 것도, LAPD 경찰들의 배신을 유도한 것까지… 모든 것이 그들의 짓이었다.

“우리는 50구역을 대표해서 여기까지 왔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 할 거야. 그리고…….”

투툭.

카츠미의 손가락 사이에 들려 있던 담배가 토막 난다.

“무엇보다 나도 페이진처럼 당신 잘난 척하는 꼴, 못 보겠거든.”

“동감이야.”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러고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잘난 척은 그쯤 해 둬. 우리도 당연히 당신과 함께 갈 거야.”

문득 세연에게 들은 말이 떠오른다.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동안 잊고 있던 말이었다.

동료들에게 배신당한 뒤, 태일은 의식적으로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었다.

레미제라블에 들어와 매일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강필과 자켄을 피한 것도, 자신을 따르던 앨리스와 지우를 멀리한 것도 전부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쪽 세계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각오조차도 그저 자기 방어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에 상처 입고, 그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도망쳤을 뿐이다.

“태일 씨, 당신이 하고 싶은 걸 해요.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요? 이 사람들은 당신의 입장 따위 조금도 생각지 않고 있다고요.”

제인의 말을 들었을 때, 태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저 세연을 찾으면 그뿐인 걸까?

그녀를 찾아서 함께 도망치고 싶었을 뿐인가?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일에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은 채 살아가고 싶었던 건가?

아니, 그렇지 않다.

이쪽 세계에 온 순간부터 아이들을 구했고, 제인을 도와 마피아들의 싸움을 중재했으며, 지금은 모두를 위해 알마티에 와 있다.

태일은 줄곧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다시 배신을 당할지라도, 다시 후회하게 될지라도 태일은 다시금 같은 길을 걷는다.

옳다고 믿는 일을 한다.

‘동료’들과 함께.

그게 바로 태일이 하고 싶은 일이었다.

태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센트럴로 가는 열차는 내일 새벽에 출발할 거야.”

“진즉 그럴 것이지.”

페이진이 팔짱을 끼며 히죽 웃었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당주는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냐? 기다리는 식구들도 많잖아. 보스가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 않아. 나한테 맡겨 두고 돌아가는 게 어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지만, 카게구미를 제외한 마피아 조직들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 카츠미는 엄연히 50구역 마피아들의 보스였다.

그러나 카츠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간단히 대답했다.

“널 어떻게 믿고? 애들은 자켄이 알아서 하겠지.”

하긴 감히 누가 자켄을 거역할 수 있을까.

살짝 몸서리치던 페이진이 고개를 돌려 민호를 바라보았다.

“첫째, 너는? 같이 갈 거지?”

“당연히.”

민호는 딘의 단검을 매만지며 짧게 대답했다.

“좋아. 앞으로 여덟 시간 뒤 출발이니까, 다들 알아서 준비해 둬.”

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 시간에 어디 갈 곳이라도 있어?”

태일이 외투를 걸치고는 숙소를 나서려 하자, 페이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페이진뿐 아니라 민호와 카츠미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태일을 보고 있다.

“숲에. 어떻게 할지 물어봐야 할 녀석이 거기에도 있잖아.”

“아!”

세 사람은 그제야 프랑켄을 떠올렸다.

통제가 사라진 도시는, 자유를 찾은 도시는 과연 어떠할까?

알마티 지하 도시가 사라지고 LAPD가 무너진 이후, 가장 강력한 통제 중 하나이던 통금이 사라졌다.

지하 도시에서 올라온 이들이 밤새 길 곳곳을 점령하고, 단속에 나서야 할 LAPD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은 길거리 아무 곳에나 거적을 덮고 누워 잠을 청했으며, 밤까지 술병을 기울이며 떠들어 대기도 했다.

이제 통금을 알리는 종 따위 울리지 않으며, 밤늦게 길가를 누비는 이들을 단속하거나 감옥에 집어넣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는 결코 낭만적이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지상의 주민들은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근 채 불안한 눈으로 연신 길거리를 살피고 있었다.

도시 어딘가에서는 함성이나 요란한 굉음 따위가 계속 들려왔다. 가게가 습격당했을 수도 있고, 패싸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알마티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알마티를 둘러싼 장벽 앞에 선 태일은 어두운 알마티 거리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도시가 안정을 되찾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리겠지.’

이 혼란의 책임을 루키우스에게 돌리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통제를 받던 시절이, 지하에 처박혀 살던 당시가 더 좋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루키우스를 따르던 이들이 배신을 택할지도 모른다.

태일 역시 경험한 일들이었다.

“으아아아앙!!”

“아, 아이가 아파요! 제발… 누가 도와주세요!”

길가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과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굳게 잠긴 주택들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거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운 사람들 역시 멀뚱히 바라볼 뿐, 선뜻 나서지 않았다.

“와아아아아앙!!”

태일이 까무러칠 듯 울어 대는 아이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철컥!

굳게 닫혀 있던 문 하나가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쪽으로… 좀 봅시다.”

열린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남자가 약과 응급 도구를 들고 거리에 나왔다.

큰 각오가 필요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밖으로 나오는 사이, 누구라도 자신을 향해 달려들까 걱정하며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무뢰배처럼 거리를 점령하고 있던 이들 중 그 누구도 아이를 돕기 위해 나온 남자를 적대하지 않았다. 대신 걱정과 미안함이 담긴 눈으로 아이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인은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남자에게 정신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제발 제 아들을 살려 주세요, 선생님.”

남자의 진찰이 시작되자, 거리에 드러누워 있던 이들이 아이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뭐 필요한 게 있소?”

“딱 보니 배탈 같구먼. 아까 보니 얘가 뭔가 씹고 있었어.”

진찰을 마친 남자가 두려움 따윈 사라진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깨끗한 식수와 해열제가 필요합니다. 해열제가 없다면 하다못해 찬물에 적신 수건이라도…….”

남자의 진단을 들은 이들이 곧이어 어둠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좀 도와주시오! 누가 해열제 가진 사람 없소?”

“식수라면 가게에서 가져온 게 있소.”

그때껏 어둡던 집 몇 곳의 불이 켜지면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태일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유가 반드시 혼란과 불안으로 점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통제가 사라진 공백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결정하는 건 결국 알마티에서 살아갈 사람들이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도시가 재건될지도 모르겠군.’

가만히 시선을 돌려 알마티를 둘러싼 장벽을 올려다본다.

장벽이 사라지고 난 뒤, 알마티가 어떻게 변할지 새삼 궁금해졌다.

* * *

‘프랑켄, 누군가 온다.’

‘인간이야.’

‘어떻게 할까?’

‘우리를 끌고 가려는 건지도 몰라.’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사방에서 전파들이 어지럽게 전해졌다.

프랑켄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다빈치 밖으로 나왔다.

‘생김새가 어떤데?’

프랑켄은 발터에게 받은 권총을 빙글 돌리며 주변에 전파를 보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적어도 작업반장은 아니야.’

‘코트 차림에 머리카락이 길어.’

‘복장이 특이한걸. 이곳 사람은 아닌 거 같아.’

차림새에 대해 듣자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프랑켄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권총을 다시 집어넣었다.

‘다들 괜찮으니까 진정해. 내 동료야.’

‘동료? 인간이?’

‘인간을 믿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프랑켄은 불안에 떠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LAPD 감옥의 벽을 뚫어 자신을 탈옥시켰던 50구역 공장 지대 친구들에 비해 숲속에 숨어든 녀석들은 워낙 겁이 많았다.

하긴 이들은 수년 전 벌어진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은 뒤, 정체를 감추고 살아온 녀석들이다.

그만큼 신중한 건 당연했다.

한편, 저만치에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오는 남자, 태일의 모습이 보였다.

태일은 프랑켄을 보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프랑켄, 그사이 친구를 꽤 많이 만든 모양이네.”

“눈치채실 줄 알았습니다.”

알마티 장벽 외부에서 도로를 건설하고, 철로를 깔던 메타휴먼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오래전 감정을 깨달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은 금융 버블 당시 잔혹하게 부서진 뒤 지하에 버려진 동료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 또한 같은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메타휴먼들은 영혼 없는 기계인 척 인간에게 복종했다.

프랑켄은 그런 메타휴먼들의 존재를 일찌감치 눈치챘고, 통제에 공백이 생긴 지난 이틀간 그들을 긁어모았다.

“숲에 꽤 우글거리던데, 저 녀석들을 데리고 어쩔 생각이야?”

“뭔가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저 친구들이 더는 공포에 떨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태일은 그런 프랑켄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알마티 지하 도시가 무너지는 바로 그 와중에 프랑켄은 알마티 외부의 메타휴먼들을 해방시켰다.

이런 상황을 안다면 루키우스와 카심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태일은 머리를 쓸어 넘긴 뒤,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프랑켄, 앞으로 여덟 시간 뒤에 열차 두 대가 출발할 거야. 한 대는 50구역으로, 다른 한 대는 센트럴로 간다. 넌 어느 쪽을 탈래?”

프랑켄은 한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둘 다 타지 않겠습니다.”

“숲속에 있는 친구들이랑 여기 남을 생각이야?”

“아뇨.”

프랑켄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전 대륙 남서쪽으로 가겠습니다. 그곳에서 녹스를 찾고 싶습니다.”

그제야 뒤쪽 다빈치를 보니, 어느새 부서졌던 몸체가 깨끗이 수리되어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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