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동맹 (4)
쿠구구구…….
플루톤을 중심으로 뿌연 흙먼지가 몰아치면서 양 날개가 펼쳐진다.
곧이어 웅장한 엔진 소리와 함께 기체가 천천히 공중에 떠올랐다.
그야말로 거대한 섬 하나가 하늘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기함 자체의 흔들림은 거의 없었다.
갑판에 진열해 선 센트럴 정규군은 부동자세로 연합 병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편, 뒤쪽의 마피아, 레지스탕스, 메타휴먼들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저희끼리 웅성이고, 대열마저 엉망진창이었다.
“이게 과연 잘한 짓인지 모르겠군.”
하얀 늑대는 플루톤이 이륙하는 장면을 바라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평생 센트럴로부터의 독립을 꿈꾸며 살아온 그다.
마지막 순간까지 싸우리라 다짐했고, 그건 레지스탕스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정작 센트럴은 어떠한가.
훈련된 병사들과 압도적인 기술력, 그리고 강력한 무장.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그 충격적인 격차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놈들은 그저 협상장 호위 병력만으로도 50구역 연합 따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다.
애써 감추었지만, 하얀 늑대가 센트럴 병력을 보며 느낀 감정은 허탈감이었다.
“어머, 후회하시는 건가요? 가장 앞장서서 싸움을 걸던데요.”
자켄이 짐짓 놀리듯 말했지만, 그녀 역시 플루톤의 위용에 질린 건 마찬가지였다.
“헛소리를 퍼부어 대는데, 그냥 듣고 있을 수가 없었거든.”
“사실 조금 의외이긴 했어요.”
“뭐가? 내가 설마 놈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기라도 할 줄 알았나?”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하잖아요. 공장 지대만 공격하겠다니.”
“흥, 얕은 수작이지. 놈들의 다음 표적은 누가 될 거 같은가?”
“그래도 워낙 공장 지대 친구들을 싫어하셨으니까. 그런데 이렇게나 메타휴먼을 위해 나서 주실 줄은 몰랐죠.”
“…….”
자켄이 놀리기로 작정한 듯 물고 늘어지자 하얀 늑대는 짐짓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차피 가면 뒤쪽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의 곁으로 가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던 가이가 하얀 늑대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
“제가 어르신을 오해했습니다. 전 어르신께서 저희를…….”
“오해가 아니네.”
“어르신…….”
하얀 늑대는 가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난 여전히 자네들이 싫어. 아니, 혐오하지.”
센트럴은 국가를 빼앗았고, 정체성을 말살했다.
하지만 한때 50구역에 있던 국가가 무너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버렸고, 젊은이들은 사라져 버린 국가의 이름조차 잊었다.
그러나 메타휴먼에 관한 문제는 달랐다. 메타휴먼이 등장하면서 일자리가 사라졌고,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빈털터리가 된 이들이 속출했고, 50구역은 경제적으로 센트럴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렸다.
당연하게도 모든 증오는 메타휴먼에게 집중되었다.
50구역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적은 바로 자신들의 미래를 앗아 간 메타휴먼이었다.
당장 레지스탕스의 젊은 청년들은 메타휴먼과의 연합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하얀 늑대는 결코 메타휴먼을, 가이를 옹호할 수 없었다.
“난 자네들의 편을 든 게 아니네. 우리 역시 메타휴먼들이 50구역에서 사라지길 바라거든.”
가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하얀 늑대를 바라보았다.
카렌이 그런 하얀 늑대에게 따지듯 물었다.
“가이 씨를 비롯한 공장 지대 주민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존재 자체가 죄라도 된다는 건가요?”
“그렇다네.”
“…어르신!”
“왜? 우리가 잠깐 함께 움직인다고 해서 같은 편인 거 같은가?”
하얀 늑대는 카렌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당장 당신부터가 메타휴먼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망가뜨린 회사 소속이지.”
처음에는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했건만, 분열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자 자켄은 황급히 모두를 말리기 시작했다.
“잠깐, 다들 열을 좀 가라앉혀요.”
이미 뒤쪽의 연합 병력은 플루톤의 위용을 본 탓에 사기가 떨어진 상태였다. 이 와중에 연합 내부의 다툼은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나겠습니다.”
가이의 나지막한 선언에 모두의 표정이 변했다.
심지어 하얀 늑대마저도 조금 놀란 듯 가이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성급한 소리 하지 말아요.”
카렌이 당황해 말렸지만, 가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도망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무슨 뜻이죠?”
“저와 제 친구들은 인간과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가이는 메타휴먼과 인간의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자리 문제와 금융 버블로 인해 메타휴먼에 대한 인간의 증오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센트럴과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공장 지대를 나가 머물 땅을 찾을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가이가 가만히 G―7 앞, 강필과 실랑이 중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프랑켄이 공장 지대 메타휴먼들에게 말해 준 ‘셸터’.
그건 지금 메타휴먼들에게 희망과도 같은 이름이고, 그 조직을 만든 남자가 바로 ‘사막여우’ 알렉세이 딘이었다.
사실 가이가 49구역에 온 것은 바로 딘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다시 하얀 늑대에게로 시선을 돌린 가이가 가만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르신.”
“…….”
하얀 늑대는 말없이 그런 가이를 바라보았다.
한편, 자켄은 G―7 앞에서 실랑이하는 강필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체 저 사람, 저기서 뭐 하는 거죠?”
강필은 차를 살피며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이, 이게 뭐야! 여긴 또 왜 그래?! 아이고!!”
“아까 나무에 살짝 받아서.”
“아예 박살이 났네, 박살이!”
“박살? 아저씨, 엄살이 너무 심하네. 그냥 약간 찌그러진 거잖아. 다시 펴면 돼.”
“라비, 그건 아니지.”
딘이 당당하게 말하는 라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양심이 있다면 ‘약간 찌그러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텐데.
“바위나 나무뿌리에 긁은 게 27회, 급가속 33회, 급정차 2회, 급회전 57회, 바이크랑 충돌할 뻔한 건 셀 수도 없고.”
딘의 말을 들은 강필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렸다.
“잠깐, 마지막 건 빼. 바이크랑 충돌은 안 했다고! 그보다 그걸 다 세고 있었어? 뻥이지? 응?”
“아, 바위에 긁힌 게 한 번 빠졌어. 28회.”
“…독한 인간.”
두 사람의 끔찍한 만담을 듣고 있던 강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미친놈들아!”
한눈에 봐도 딘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차체 옆면의 칠이 모조리 벗겨졌고, 바퀴 근처 곳곳이 자갈에 찍힌 듯 파여 있다. 어디 그뿐인가.
차체에서는 속도를 워낙 높인 탓인지, 영문 모를 시꺼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당장 폭발을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였다.
강필은 그야말로 엉망이 된 G―7을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 이게 무슨 재질인지 알기나 해?! 내가 얼마나… 얼마나!”
“초경량 티타늄이잖아. 뭐, 그럭저럭 좋은 재료지.”
라비가 어깨를 으쓱이자, 강필은 입을 쩍 벌린 채 욕조차 쏟아 내지 못했다.
초경량 티타늄. 그 희귀한 재료를 조달해 차체를 커버하기 위해 5년 치 연봉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라비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하여튼 소심하긴. 그거 좀 찌그러질 수도 있는 거지. 어, 잠깐. 아저씨, 울어?”
강필은 입만 뻐끔거리다가 급기야 울상을 짓고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떤 차인데… 프랑켄, 이 개자식! 내가 그렇게나 말했는데…….”
그런 강필의 모습에 조금은 미안했는지, 라비가 조심스럽게 차 앞의 강필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저씨, 딱 보니까 아마추어 손을 타서 좀 허술하던데 말이야. 나한테 맡겨 주면 깔끔하게 다시 고쳐 줄게.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응?”
“이 녀석 말이 맞아. 여차하면 내가 손을 좀 봐줄 테니까 너무 화내지 말고…….”
딘 역시 쩔쩔매며 다가왔지만, 강필은 도리어 펄쩍 뛰며 앞을 막아섰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권총을 꺼내 겨누었다.
철컥!
“초, 총? 지금 우리한테 총을 겨눈 거야?”
“이봐, 진정을……!”
“어딜 감히!! 물러서!! 차에서 떨어져! 가까이 오지 마!”
눈이 뒤집힌 강필은 씩씩거리며 고함을 질러 댔다.
외롭고 힘든 LAPD 생활 중 유일하게 부린 사치.
그게 바로 G―7이었다.
온갖 고급 재료와 부품들을 조달해 왔고, 최고의 성능을 가진 차로 개조를 거듭했다.
그 재료들을 본 전문가는 오죽하면 탱크라도 만드냐고 물을 정도였다.
“아저씨, 진정하고 총 내려놔. 우리가 완전 기깔 나게 고쳐 줄게. 진짜라니까?”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내가 이 대륙 전체에서 제일가는 기술자야. 내가 완벽히 원상복구해서…….”
“웃기지 마! 손도 댈 생각 마!”
차가 망가진 것도 악몽 같은데, 차를 타고 나타난 두 야만인이 고치겠다고 나서자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한편, 그런 강필의 모습을 본 자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저 남자는 정말…….”
“서장이라는 사람이… 쯧쯧.”
하얀 늑대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고, 가이 역시 민망한 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카렌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나마 강필에게 공감하는 이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지우뿐이었다.
“저럴 만하지. 암.”
“…정말?”
앨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지우가 그녀를 보며 면박을 주었다.
“당연하지! 저 차가 얼마나 굉장했는데! 퍼포먼스가 진짜 대박이라고! 내구성에다가 가속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지?”
“그야 내가 직접 운전을…….”
한창 떠벌리던 지우가 입을 다물고는 질문이 들려온 목소리를 쫓아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켄이 눈을 치켜뜬 채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운전’을 했다고?”
강필이 열쇠를 넘겨주었을 리는 없다.
“마, 마담. 그게 아니고…….”
매섭게 지우를 노려보던 자켄은 한숨을 내쉬며 울기 일보 직전의 강필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지우에게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웠다.
당장 저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 인간의 수준 역시 지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한편, 한심하다는 듯 강필을 바라보던 하얀 늑대가 고개를 돌려 카렌에게 말했다.
“시간 낭비는 이쯤 하지. 이런 황무지에 계속 머물 수는 없지 않겠나.”
“맞는 말씀이에요.”
카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얀 늑대는 한숨을 내쉰 뒤 처음으로 가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자네…….”
잠깐 말을 멈추고 할 말을 고르던 하얀 늑대가 찬찬히 말을 이었다.
“같은 적을 상대하고 있는 이상, 함께 싸워야겠지.”
“어르신…….”
“모두에게 말해 두겠네. 만약 자네들을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놈들이 있다면, 내 손으로 직접 처벌하겠네. 이번에는… 말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약속하지.”
하얀 늑대의 목소리는 변조되어 감정을 명확히 파악할 수 없고, 얼굴마저 가면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담긴 강한 의지만큼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는 마피아 이상으로 상명하복이 뿌리내린 조직이고, 그중에서도 하얀 늑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적어도 하얀 늑대가 공식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이상, 연합 내부에서 메타휴먼에게 자행되던 린치 행위는 사라질 것이다.
“감사합니다.”
가이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하얀 늑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하얀 늑대는 태일 일행이 타고 갔던 G―7을 바라보며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50구역을 불태워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마피아와 LAPD만의 얘기가 아니에요. 50구역의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일의 말이 맞았다.
센트럴에 맞서기 위해서는,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설사 마피아나 메타휴먼의 손이라도 잡아야만 한다.
“일단 저 사막여우라는 사내와 얘기를 좀 해 봐야겠어. 태일, 그 친구가 어디로 갔는지 소식부터 듣는 게 우선 아니겠나.”
“동감이에요.”
그러나 아예 권총까지 빼 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는 강필을 보며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