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이야기의 결말 (4)
센트럴은 대륙 전쟁이 끝난 뒤, 너무 많은 기록을 의도적으로 지워 버렸다.
제국들을 멸망시켜 역사를 끝낸 전쟁에서 과연 누가 선봉에 있었는가.
그 선봉에 선 자들은 어떤 자들이었는가.
그들은 얼마나… 강력했는가.
그 모든 기록이 지워지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잊혀졌다.
그런 센트럴의 선택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래, 망각은 선물이다.
공포를 잊고, 두려움을 잊고, 부끄러움을 잊은 채 그렇게 천진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동시에 실수이기도 하다.
공포를 잊었기에 나태해졌고, 두려움을 잊었기에 건방져졌으며, 부끄러움을 잊었기에 자성하지 않았다.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바로 이곳, 리치 타운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두가 다시금 떠올리게 될 것이다.
밤하늘에 떠오른 뱀 형상, 요르문간드의 그림자는 그 상징과도 같았다.
두 손을 모은 채 뱀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인가.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오랜 시간 얼마나 공을 들여 왔던가.
나약함과 무능함을 지켜보며 긴 시간 인내해야 했고,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우유부단함을 참아 내야 했다.
하지만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마침내 보상받고 있었다.
물론 장이 만들어 낸 뱀은 고작 그림자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곧 강림할 요르문간드는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릴 것이다.
“신이시여…….”
이 와중에 멍청한 루키우스 베르코프는 신을 찾으며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 옆에 선 마틴 벨로가 창백한 얼굴로 멍하니 저택을 바라본다. 저택의 돌담도, 지붕의 사자 장식도, 정원의 온갖 조각상도 전부 먼지로 변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자신감에 찬 장 베르코프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다들 똑똑히 봐! 내가 어떤 존재인지!”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 냈다.
맙소사! 장, 네 나이가 얼만데 그 대사는 좀 아니지 않아?
고작 그림자 하나 만들어 내고 그런 자신감이라니.
장은 자신의 몸속에서 무엇이 자라난 것인지, 그게 얼마나 엄청난 힘인지 알지 못한다.
물론 알마티를 지워 버리는 데는 한낱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잠깐 사이에 리치 타운의 호화로운 장식품과 정원의 꽃들을 재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은행장 게일, 길드 협회장 루퍼스와 그 가족들을 비롯해 리치 타운 주민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잿더미로 변해 그림자의 일부가 되었다.
허울뿐이던 것들이 그렇게 사라져 간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그림자는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짓쳐 나갔다.
이제 곧 꿈이 이루어진다.
비열한 배신자와 어리석은 바보들, 더러운 모사꾼과 비겁한 쓰레기들… 전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한껏 자신의 힘에 취해 있던 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지?”
요르문간드의 그림자가 향해 간 타운 입구 쪽에서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비쳐 온다.
지나치게 밝은 빛 속에서 그림자는 존재할 수 없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그림자에는 소리가 없다.
태일의 뒤를 쫓는 검은 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림자에는 실체가 없다.
뱀을 찢어발긴다 해도 결국 잠시 흩어질 뿐, 다시 나타난다.
그 사실을 알기에 태일은 검은 뱀을 상대하기보다 곧장 앞으로 짓쳐 나갔다.
하지만 그림자는 실체의 크기에 비례한다.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온 사방에서 재가 휘날렸고, 뱀의 몸집은 그만큼 빠른 속도로 불어났다.
세연과 딘은 요르문간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수많은 제국이 무너진 건 놈의 실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것을 초토화하는 뱀에게 엄청난 화력이 집중되었지만, 결국 그처럼 날뛰던 뱀은 그림자일 뿐이었다.
― 그림자를 없애는 방법은 딱 두 가지뿐이야.
― 그림자가 거하는 어둠을 없애거나, 혹은 실체를 없애거나.
뒤쪽에서 빛의 칼날이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다. 그와 함께 마치 해가 떠오른 듯 눈부신 빛이 리치 타운 전체에 비쳤다.
빛이 드리워진 가운데, 태일의 뒤를 쫓던 검은 뱀이 재에 불과한,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빛에 노출된 그림자는 그렇게 희미해지고, 허깨비처럼 공중에 흩어졌다.
그러나 태일은 딘의 소울웨폰이 만들어 낸 빛이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결국 영구히 밤을 없앨 수는 없다.
서둘러 실체를 찾아내야만 이 악몽을 끝낼 수 있다.
태일의 발걸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화산재에 뒤덮여 멸망한 고대의 도시처럼 초토화된 리치 타운의 거리 안쪽, 앙상한 골격을 드러낸 주택의 기둥 위에 올라선 태일은 네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가장 앞에 선 남자, 장 베르코프가 당황한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함을 내지르고 있다.
양복을 갖춰 입은 장 베르코프의 피부는 흉측한 뱀의 비늘로 뒤덮여 있고, 눈동자는 샛노랗게 빛났다.
한편, 루키우스와 마틴은 순간적으로 밝아진 가운데 드러난 타운의 모습을 둘러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무사했나.’
태일은 얼굴이 창백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해 보이는 루키우스를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한 사람과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 겉모습에 속지 않을 것, 그게 바로 놈을 상대하는 요령이야.
파직!
태일의 손끝으로 한 줄기의 푸른 전류가 집중된다.
사방을 비추던 빛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한 줄기의 번개가 태일의 표적을 향해 쏘아졌다.
쾅!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
검은 재가 사방을 뒤덮으며 어둠이 모두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
“으… 아아악!!”
어둠 속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장!!”
루키우스의 목소리.
“빌어먹을… 자네는 아직도!”
그리고 그런 루키우스에게 쏘아붙이는 마틴의 목소리.
다급한 목소리들 속에서 태일은 자신의 눈앞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비서…라고 했던가?”
“…….”
장의 비서 메리.
태일의 번개가 직격한 것은 그녀의 분신에 불과했고,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조차 실체인지 알 수 없었다.
메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태일을 향해 묻는다.
“어떻게 알았지?”
“꽤 익숙해서 말이야.”
“설마… 샬롯을 살해한 게 너였니?”
태일이 이쪽 세계에 넘어오자마자 살해한 페노제의 보스, 샬롯.
메리는 그런 샬롯을 언급하며 흥미롭다는 듯 태일을 바라보았다.
“샬롯을 키운 게 당신이었군.”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고. 7년 전이었던가? 힘이 필요하다며 애원하기에 약간의 요령을 알려 주긴 했지.”
샬롯의 힘,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소울의 증폭과 오염.
그 모든 것은 결국 눈앞에 있는 괴물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소울벌룬을 공급하려 한 쪽은 센트럴이지만, 그 소울벌룬을 최초로 만들어 낸 이는 바로 눈앞의 괴물이다.
태일의 어릴 적 악몽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메데이아, 대체 뭘 어쩔 생각이지?”
“어머, 내 이름을 아는구나?”
메리, 아니, 메데이아가 팔짱을 끼더니 눈웃음을 쳤다.
“혹시 센트럴에서 널 보낸 거니? 날 잡으라고?”
“아니. 센트럴은 아마 당신이 죽은 걸로 생각하고 있을 거야. 아직까지는.”
“그래, 그렇겠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정확히는 그녀가 대륙에서 날뛴 지 수십 년이 지났다.
바토리 일족이 만들어 낸 최악의 전사이자, 바토리 반란을 이끌던 지도자.
그녀는 센트럴이 가장 두려워하는 최악의 수배범이었다.
홀로 몇 개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며, 이후 센트럴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홀로 센트럴 전투 순양함 플루톤을 몇 척이나 추락시켰다.
심지어 그 무수한 전투 속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본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저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으며, 모든 것을 초토화할 뿐이었다.
메데이아는 그저 ‘요르문간드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었고, 그 정확한 정체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목격자는 많았지만, 저마다 다른 증언을 내놓았기에 정작 그녀가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바토리 일족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후 대략 80여 년이 흘렀다.
그런 메데이아가 지금 이곳, 알마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센트럴이 대륙의 제국들을 상대로 싸울 당시부터 전사로 나선 메데이아이니 이미 100세를 훌쩍 넘은 나이다. 그러나 정작 비서 메리의 모습을 한 그녀는 고작 20대 정도에 불과해 보였다.
“당신을 잡기 위해 이곳으로 전 대륙의 병력이 몰려들 거야.”
비대칭전력인 그녀가 이곳 알마티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센트럴에 알려진다면, 센트럴 오더는 당장에라도 발동될 것이다.
정당 간의 다툼이나 명분 따위는 거대한 적의 등장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내가 그런 벌레들을 두려워할 거 같니?”
메데이아가 여유롭게 양팔을 들어 올린다.
그와 함께 무수한 뱀들이 땅을 뒤덮었다. 수천 마리의 뱀들이 저마다 뒤엉킨 채 태일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다.
그와 함께 숙주인 장의 비명 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뱀들이 일제히 태일을 향해 달려든다.
순간, 세연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 속지 마. 한낱 그림자일 뿐이야.
태일의 온몸에서 사방으로 전류가 뿜어져 나갔다.
파치치치칫!
선명한 리히텐베르크 문양을 그리며 온 사방에 푸른빛이 뻗어 나갔고, 뱀들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먼지로 변해 버렸다.
번개의 빛에 의해 힘을 잃은 그림자는 허깨비로 산화했다.
“호오……!”
그 꼴을 본 메데이아가 꽤 놀란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번개 한 줄기가 메데이아의 심장을 관통했고, 그녀의 가슴 부위에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정작 메데이아는 조금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부서진 자신의 몸뚱어리를 보고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숙녀에게는 좀 더 부드럽게 대해야지.”
일시적으로 메데이아의 힘이 잦아들며 주변을 맴돌던 재들 역시 내려앉는다.
어둠이 사라진 가운데 장과 루키우스, 마틴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
장은 마치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고개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고, 루키우스는 그런 장을 향해 황급히 달려갔다.
그 와중에 마틴은 넋이 나간 얼굴로 몸이 반쯤 부서진 메데이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게 대체……?”
티틱, 틱.
가슴 부위를 중심으로 마치 껍데기가 깨어지듯 메데이아의 몸 곳곳에 금이 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과 흑색 눈동자에 숨어 있던 황금빛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법 강하구나, 너. 그냥 죽여 버리기에는 조금 아까울 정도야.”
깨진 도자기처럼 곳곳에 금 간 얼굴의 메데이아가 태일을 향해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인다.
“메, 메리?!”
뒤쪽에서 놀란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메데이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어쩔 수 없지.”
메데이아의 손끝이 넋이 완전히 나가 버린 장에게로 향했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아!!!!!!”
축 늘어져 있던 장이 다시금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태일이 수십 갈래의 번개를 쏘아 메데이아의 머리를 부수었고, 그녀의 남은 몸뚱어리가 그대로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그러나 장의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공중에서 메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보렴, 내가 그동안 무엇을 만들었는지.”
“장! 안 돼!!”
루키우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오며 장의 몸에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장의 얼굴 가죽이 벗겨지며 반으로 쪼개진다.
스스스스…….
곧이어 그렇게 쪼개진 장의 피부가 마치 비늘처럼 벗겨지기 시작했다.
“맙소사, 하느님!”
노란 눈동자의 삼각형 대가리가 얼굴을 드러낸다.
“루키우스, 그 괴물한테서 떨어져요!”
태일의 손끝에서 형성된 번개가 수십 갈래로 갈라져 노란 눈동자를 노렸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메데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방해는 안 되지.”
쾅!!
“내가 애지중지 키워 온 아이란다.”
콰쾅!
“잠자코 지켜보렴.”
쾅!
“금세 끝날 테니까.”
메데이아의 분신들이 번개를 제 몸뚱어리로 막아서며 연달아 부서졌고, 기어코 변태 중인 장을 지켜 냈다.
그사이, 거대한 뱀이 장의 껍질을 벗고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의 껍질을 벗고 나온 뱀의 끔찍한 모습에 하릴없이 뒷걸음질 치던 루키우스는 황망히 무릎을 꿇었고, 마틴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저택 방향으로 달음박질쳤다.
스스스스…….
오염된 소울의 결집체인 뱀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노란 눈동자로 태일을 노려본다.
뱀은 대략 3미터 정도 되는 길이에 커다란 몸집을 갖고 있었다.
사실 앞서 온 거리를 뒤덮을 만큼 거대하던 그림자에 비하면 실체는 언뜻 작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겉모습뿐이었다. 눈앞의 뱀은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낸 실체다.
뱀에게 응축된 소울의 진득한 기운이 사방을 메웠다.
뱀의 옆에는 재로 빚어진 메데이아의 분신이 나타났다. 메데이아는 부드러운 손길로 뱀의 비늘을 쓸어 넘기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센트럴이 보낸 게 아니라면… 넌 뭐니? 대체 왜 나를 노리지?”
그러나 태일은 대답 대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넋을 잃은 루키우스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루키우스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태일이 이곳에 온 이유는 오로지 하나, 알마티의 혼란을 수습할 지도자를 살려 내기 위함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