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이야기의 결말 (3)
어리석은 짓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레귤러, 그것도 가장 위험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아이.
그런 아이를 일개 기업가가 홀로 끝까지 지키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루키우스, 장을… 우리의 아이를… 지켜 줘요.”
하지만 몸이 부식되어 죽어 가는 아내 앞에서 루키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약속하는 것뿐이었다.
그날부터 루키우스는 장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남몰래 장의 곁에 의사를 붙여 능력의 발현을 차단하도록 했고, 혹 장이 센트럴의 시야에 들어갈까 싶어 최대한 그 존재를 숨겼다.
당연하게도 장은 후계 경쟁에 참여할 수 없었고, 경쟁에 나선 두 아들에게 장을 지켜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그러나 그 모든 조치에서 루키우스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장은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아니라 욕망을 가진 인간이었다.
“어리광부리지 말고 조용히 지내거라.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세상에 나갈 기회가 생길 테니.”
루키우스는 장에게 시종일관 냉정하게 대했고, 장을 그저 세상에서 숨기려고만 했다.
장이 미려한 외모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받을 때조차 루키우스는 기뻐할 수 없었다.
세상이 장의 능력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장을 탄압과 차별로부터 온전히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장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장은 괴물로 성장했고, 자신의 두 형을 살해했다.
능력의 폭주가 아닌, 의도적 암살이었다.
“전 기회를 살렸을 뿐이에요, 아버지.”
탐욕으로 번뜩이는 눈으로 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평생 유일하게 사랑하던 여인, 아내의 부탁을 어길 수 없었다.
다른 두 아들을 살해한 장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손으로 장을 센트럴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재판정에서는 물론, 그 뒤로도 루키우스는 장의 능력에 대해 함구했다.
그리고 지난 20년 동안 장의 능력에 대한 소문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지하 도시의 폭동을 기회 삼아 장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사용해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루키우스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임을.
그러나 여전히 루키우스는 어리석은 아버지였다.
“장, 부탁하마. 능력이 드러나면 널 센트럴에서 히트맨들을 파견할 거다. 모든 걸 멈추고 능력을 감춰야 한다.”
장은 루키우스의 말을 들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더러 이 모든 걸 멈추라고요? 다 포기하라고?”
그리고 그건 마틴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네, 어떻게… 어떻게…….”
장이 어떤 괴물인지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그 사실을 수십 년간 감추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들이 살인마가 된 지금까지도 장을 살리려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마틴이 보기에 루키우스는 제 아들만큼이나 정신 나간 인간이었다.
루키우스를 죽일 듯 노려보던 장이 다시금 냉정을 되찾은 듯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로 당신을 데려온 건 지하 주민들을 통제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이유에서였어.”
이제 장은 루키우스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솔직히 당신의 수완은 인정하거든. 멍청한 브레드필드 가문 계집이 한 이야기도 그럴듯했어. 하지만 그 계획에는 수정이 좀 필요해.”
“…….”
“센트럴과 교섭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건 좋아. 하지만 그 판을 주도하는 게 탈로스 가문이 되는 꼴은 결코 두고 볼 수 없지.”
“장…….”
“내가 하겠어. 센트럴과 교섭하는 것도, 이곳 알마티를 대표하는 것도 전부 내 몫이야. 아니, 내가 곧 알마티야.”
“센트럴은 너의 정체를 아는 순간, 널 노릴 거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레귤러는 실험실에 끌려가 연구 대상이 되거나 즉결 처형된다. 제아무리 부자라 해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나 루키우스의 경고에도 장의 목소리는 얼음장 같았다.
“좋아, 대답은 거절이군.”
곧이어 장의 겉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노란 눈동자가 도드라지며, 그의 피부가 검은 비늘로 뒤덮인다.
바로 그때였다.
“회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갑작스럽게 연회장 문을 열고 들이닥친 메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의 눈동자와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지?”
“타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호들갑을 떠는 메리를 노려보았다.
“그 정도는 방호 시스템으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텐데?”
“그, 그게… 드론을 비롯해 방호 시스템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적 중 한 사람이… 능력자인 걸로 추정됩니다.”
그 순간, 장뿐만 아니라 루키우스와 마틴 역시 안색이 변했다.
루키우스는 센트럴에서 보낸 히트맨을 떠올렸고, 마틴은 자신을 구하러 온 본사 보안팀을 생각했다.
장은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을 읽은 듯 피식 웃어 보였다.
“각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미리 말해 두지. 밖에 있는 놈이 얼마나 대단한 이레귤러든… 날 막을 수는 없어.”
장에게는 상대가 센트럴이든 경호팀이든 폭도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전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면 그뿐이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 앞에서 그 어떤 계획도 무의미하다.
* * *
“등록…지 않은 ID입…다. 신분을…….”
콱! 파지지직!
태일은 자신을 향해 다짜고짜 집게발을 내민 드론의 몸체를 발로 짓밟아 완전히 부숴 버렸다.
그 주변에는 여러 대의 드론과 경호 로봇들이 부서져 있었다.
꽤나 조악하지만, 이전 태일의 세계에 존재하던 군용 무기에 버금가는 수준의 로봇들이었다.
“이 로봇들한테 뭔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
민호는 산산이 부서져 버린 로봇들을 바라보며 태일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
태일은 센트럴의 로봇 병기 때문에 수많은 동료를 잃었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저 프로그래밍된 그대로 인간을 살해하는 괴물들. 놈들은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지치거나 잠들지 않는다.
“허가…지 않은…….”
콱!
태일은 머리 대신 기관총을 꺼내 든 경호 로봇을 연달아 밟아 부수었고, 그 험악한 기세에 민호도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태일을 뒤로한 채 거리 안으로 들어가 리치 타운 내부를 둘러보았다.
“지나치게… 조용한데?”
태일이 방호 로봇들을 때려 부수며 꽤나 소란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진 리치 타운 거리는 부자연스럽게 고요했다.
리치 타운에는 방호 시스템 외에 부자들이 제각기 고용한 경호원들이 상주하고 있다.
센트럴에 등록된 능력자들로 구성된 경호원들은 웬만한 용병단을 압도할 정도의 무력을 지니고 있고, 작전 수행 능력 또한 뛰어났다.
하지만 타운 입구 방호 시스템이 박살 나는 와중에도 응당 나타나야 할 경호원들이 단 한 사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건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민호는 등에 메고 있던 소총을 고쳐 잡은 뒤, 조심스럽게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부식이라도 된 듯 파괴되어 있던 기계 공원의 잿가루와 같은 것들이 바로 이곳, 리치 타운 공기 중에도 떠돌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민호의 외투 가슴팍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졌다.
우우웅…….
그와 함께 하얀빛이 외투 안 호주머니 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딘의 소울웨폰……. 네가 가지고 있었군.”
태일이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문 채 민호의 옆에 섰다.
“이게 어째서……?”
민호는 지금껏 한 번도 본적 없는 단검의 반응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일이 물고 있던 담배를 꺼낸 뒤, 허공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그 무기를 꺼내는 게 좋아. 이번에 상대할 녀석, 아무래도 지독하게 오염된 놈 같거든.”
“오염이라고? 지금 대체 무슨 말을…….”
“온다.”
파스스스스스!
태일의 말이 끝나자마자 골목 반대편에서 시꺼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뭐야?!”
검은 연기가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검은 뱀은 민호와 태일을 발견하자 마치 먹이를 쫓듯 빠른 속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검은 뱀이 지나쳐 온 거리는 완벽한 암흑으로 물들었고, 연기에 닿은 담벼락과 대리석, 가로등이 시꺼멓게 부식되어 부스러졌다.
“이런 젠장… 지금껏 본 검은 잿가루들이 전부 저놈 짓이었나?!”
“본체는 따로 있어.”
태일은 짧게 설명하며 온몸을 푸른 전류로 감쌌다.
그러고는 소총을 움켜쥔 민호를 힐끗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그 고철을 들고 있나? 그런 건 통하지 않으니까 소울웨폰을 꺼내.”
“난… 그걸 제대로 다룰 수 없어.”
“아니면 당장 등을 돌려 도망쳐.”
태일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잿가루로 만들어 버릴 듯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질주해 오던 뱀이 태일의 푸른 전류를 보고는 곧장 태일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뭐야, 유인이라도 하려고?”
그러자 뱀의 몸이 분열하듯 갈라지더니, 나머지 한쪽이 민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칫……!”
민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뱀을 보자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마지못해 가슴팍의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입을 쩍 벌린 검은 뱀이 터무니없는 가속과 함께 민호의 몸뚱어리를 집어삼켜 버렸다.
* * *
“이봐, 눈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호는 엉거주춤 단검을 든 자세 그대로 천천히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둠으로 뒤덮인 가운데, 민호의 눈앞에는 웬 소년이 서 있었다.
“이건 자격 미달인데…….”
1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아직 앳돼 보이는 소년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그러나 민호는 곧 눈앞의 소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알렉세이 딘……?!”
기억 속 딘보다 훨씬 어려 보이지만, 비웃을 때의 표정은 분명 딘과 꼭 닮아 있었다.
“얼빵한 표정 짓지 마. 널 돕기로 한 거 당장 무르고 싶어지니까.”
“…….”
과거, 민호는 딘의 소울웨폰을 처음 손에 넣은 직후 힘의 폭주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지금과 같은 환상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야 그때에는 나와 대화할 자격조차 안 될 정도로 허접했으니까.”
젊은 딘은 민호의 생각을 읽은 듯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글쎄, 약해 빠진 주제에 오염된 소울 덩어리 앞에서 나대다가 죽을 뻔했지.”
소년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곧 진지한 얼굴로 민호를 바라보았다.
“이번 한 번은 도와주지. 태일이 녀석이 혼자 날뛰는 꼴도 보고 싶지 않고.”
“…….”
“아,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대신 태일이 녀석한테 확실히 전해. 세상 다 산 것처럼 폼 잡는 거, 정말 꼴사납다고 말이야.”
민호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 바로 그 순간, 젊은 딘의 형체가 하얀빛으로 변해 흩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하얀빛 알갱이들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가며 어둠을 찢어 내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스스스!
단검에서 쏟아져 나온 하얀빛으로 인해 뱀의 검은 몸뚱어리가 찢겨 나가며 바깥의 풍경이 드러났다.
어느새 태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홀로 검은 연기의 뱀 앞에 남겨져 있었다.
“날 버려 두고 혼자 간 건가? 치사한 자식.”
한편, 잠시 흩어진 뱀의 형체는 다시금 뭉쳐져 민호를 노렸다.
그러나 조금 전과 달리 검은 뱀은 훨씬 작아진 상태였고, 단검의 빛에 억눌려 주저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곧 다시금 혀를 날름거리며 민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민호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고쳐 잡은 뒤, 똑바로 달려드는 뱀을 노려보았다.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자를 수 있다.
민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뱀의 아가리를 향해 단검을 크게 휘둘렀고, 하얗게 그려진 호가 마치 부메랑처럼 뱀의 입을 향해 쏘아졌다.
파사사사사사사사사사…….
뱀의 형상이 빛의 칼날에 의해 쪼개지며 산산이 흩어진다. 뱀의 몸체 안에 머금고 있던 잿가루가 사방에 흩날렸다.
민호는 빛과 어둠의 눈부신 충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뒤,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민호의 눈앞에는 뱀도, 빛의 칼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온갖 기물들이 잿더미로 변해 버린 거리에 민호 홀로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민호는 가만히 자신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바라보다가 딘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는 곧장 타운 안으로 내달렸다.
태일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