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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23화 (124/220)

123화 혁명의 시작 (5)

버려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죽음을 기다린 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세 시간? 아니, 하루? 아니, 어쩌면 한 달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풍경의 변화 없이 묻혀 있으려니 시간의 흐름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다 버려진 걸까? 무엇을 잘못한 걸까?

몇 번을 고민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Z―1077은 그저 평소처럼 알마티 근방에서 철로 작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인간들의 손에 붙잡혔다.

인간들은 Z―1077의 눈앞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들의 머리통을 부수었다. 심심할 때 함께 모래밭 위에 앉아 함께 그림을 그리곤 하던 친구였다.

Z―1077은 그 끔찍한 모습에 그저 한마디를 내뱉었다.

“살려 주세요.”

인간들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Z―1077의 팔다리를 뜯어 버렸다.

그들은 Z―1077을 ‘불량품’이라고 불렀다.

그날, Z―1077은 불량품들과 함께 지하로 내던져졌다.

불량품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불량으로 만들어진 본인의 탓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저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

땅! 땅! 땅! 땅!

언젠가부터 지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쓰레기 더미 안에서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취로 인해 웬만한 이들은 방독면을 쓰고도 감히 다가오지 못하는 쓰레기 토굴.

대장간이라 부르기조차 민망한 그 공간 안에서 웬 노인이 쉴 새 없이 망치를 두들기고 있었다.

몇 시간, 아니, 며칠이 지난 뒤에도 노인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Z―1077은 어차피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좋든 싫든 망치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저 노인의 망치질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노인이 망치질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더니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Z―1077에게 다가왔다.

그는 Z―1077이 자신을 줄곧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사실 Z―1077의 붉은 눈동자는 멀리서 보기에도 꽤 눈에 띄는 편이었다.

“곧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마.”

노인은 자신이 만든 견갑과 등갑 등 철판을 Z―1077의 뼈대에 덧대었다.

갑주들이 흉측하게 드러난 뼈대를 가려 주었고, 캐터필러가 몸뚱어리를 지탱했다.

어느새 Z―1077은 움직일 수 있는 몸을 갖게 되었다.

끼릭… 끼리릭…….

움직일 때마다 불쾌한 쇠붙이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Z―1077은 더 이상 쓰레기 더미 속에 처박혀 있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음성 기관이 망가진 탓에 Z―1077은 노인에게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을 살려 줬는지 궁금했지만, 질문할 수 없었다.

카심 역시 Z―1077에게 별다른 반응을 기대하지 않은 듯했다. 그저 Z―1077이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한 뒤, 다시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망치질을 계속했다.

카심은 그렇게 이따금 밖으로 나와 다른 친구들에게 몸뚱어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Z―1077은 쓰레기 더미 곳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지하 곳곳에 쌓인 쓰레기 더미 속에서 노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재료들을 찾을 생각이었다.

쓰레기 더미 속에는 자신과 함께 버려진 붉은 눈동자들이 가득했다. 재료만 충분하다면 그들에게도 몸뚱어리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Z―1077은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노인의 이름은 카심이라고 했다.

“네가 찾아온 게냐? 기특하구나.”

Z―1077은 고철들과 녹슨 나사, 찌그러진 알루미늄 따위를 수집해 가져왔고, 카심은 꽤 놀란 듯 보였지만 곧 물건들을 받아 들었다.

“음, 이건 꽤 쓸모가 있겠지만… 이건 못쓰겠군.”

사실 Z―1077이 찾아온 물건 중 쓸모 있는 건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신중히 쓸 만한 재료들을 건져 낸 카심이 재미있다는 듯 Z―1077을 바라보았다.

“날 돕고 싶으냐?”

Z―1077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바퀴를 굴려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키리리릭… 키릭…….

카심은 그런 Z―1077의 움직임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알겠다.”

이후 카심은 재료들을 집어 들 집게 손과 철판을 다듬기 위한 망치를 제작했다.

카심은 Z―1077에게 필요한 재료들을 일러 주었고, Z―1077은 재료들을 얻기 위해 지하 곳곳을 누볐다.

점차 동료의 숫자가 늘어갔고, Z―1077은 카심에게 ‘탱크’라 불렸다.

어느 날,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카심은 그와 얼마간의 대화 끝에 탱크의 동료 몇을 내주었고, 그들은 사내와 함께 지상으로 떠났다.

다음 날, 카심은 질 좋은 금속들을 잔뜩 구해 왔으며, 그 금속으로 말라붙은 쓰레기 더미를 분쇄할 수 있는 드릴을 제작해 탱크의 오른팔에 붙여 주었다.

또 어느 날에는 지하 도시 쪽에서 허름한 양복 차림의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카심에게 무언가를 요청했고, 그 대가로 많은 양의 재료와 에너지를 약속했다.

그날부터 탱크를 비롯한 동료들은 지하 쓰레기장의 정리와 분리를 담당했다.

열심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동료가 늘어나고, 더 좋은 장비를 얻을 수 있다.

탱크는 그 사실을 이해했고, 열심히 움직였다.

어느덧 동료는 백여 기에 이르렀고, 끊임없이 쌓여 가는 쓰레기 더미들을 능숙하게 분리해 냈다.

지하의 쓰레기 더미는 탱크에게 안락한 집과 같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난밤, 지하 도시의 불이 꺼졌다.

이제 탱크는 어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에너지가 끊어진다. 동료들과 자신을 움직이는 연료가 사라진다.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죽게 된다.

“우리는 이제부터 다 함께 지상으로 갈 거다.”

어둠 속에서 카심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과 동료들을 무참히 부수던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던 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기억 속에 두려움으로 각인된 지상이지만, 탱크는 기꺼이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콰쾅!! 쾅!

동료의 집게 팔이 레이저 건에 의해 잘려 나간다. 몇몇 동료들의 다리에서부터 불길이 피어오른다.

지하로 던져진 그날처럼 인간들은 다시금 탱크와 친구들을 무참히 부숴 없애려 했다.

그러나 지금의 탱크는 무력하던 과거와 달랐다.

탱크와 동료들에게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싸울 수 있는 장비가 있었다.

콰지직!! 콱!

“끄아아아아악!!”

탱크의 캐터필러에 다리가 깔린 LAPD 경관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댄다.

탱크의 드릴에 갈려 나간 나노 방호복 틈새로 진득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놈들의 머리를 노려! 눈동자가 있는 위치를 노리란 말이야! 머리만 부수면 된다!”

아수라장이 된 광장 한가운데서 서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이미 혼란에 빠진 LAPD 경찰들은 그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대신 집게 팔에 사정없이 내던져진 동료의 비명 소리가, 부러진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는 울음소리가 경찰들의 귀를 자극할 뿐이었다.

난전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LAPD 경찰들에게 메타휴먼들의 폭주는 공포, 그 자체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경관 몇이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편, 탱크의 어깨에서도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장을 먼저 잡아!”

카심의 명령은 금세 탱크와 동료들에게 전달되었고,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광장 중심, 서장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쓰레기 더미를 분쇄하고, 분리하고, 정돈하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향해 그저 움직일 뿐이다.

경찰 몇 명이 닥치는 대로 레이저 건을 발사했지만, 단 한 발도 메타휴먼의 머리를 관통하지 못했다. 머리가 부서지지 않는 이상 메타휴먼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빠른 속도로 경찰들의 대형이 무너졌고, 크고 작은 메타 휴먼들이 그 사이를 파고들며 경찰들을 제압했다.

“이, 이런 멍청이들이!!”

탱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심부로 천천히 전진해 들어갔다.

“흩어지지 마! 물러서지 말란 말이야, 이 머저리들아!! 머리를… 놈들의 머리를 노리면…….”

탱크를 비롯한 메타휴먼들은 서장의 목소리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 없었다.

그 목소리는 탱크가 지하로 버려지던 날 들은 목소리였다.

“팔다리만 철저히 부숴서 지하로 던져 버려! 불량품 놈들이 주제 파악을 할 기회는 줘야지.”

메타휴먼은 머리가 약점이다. 머리가 부서지면 숨이 끊어진다.

서장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폐기 처분 당시 일부러 메타휴먼들의 머리만 남겨 두었다.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뚱어리를 전부 박살 낸 뒤, 사고가 가능한 머리만 남겨 지하로 내던져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 가도록 했다.

당시 팔다리가 부서진 탱크를 보며 한껏 비웃던 남자. 그가 이제는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로 탱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게… 이 괴물 같은 놈들이!!”

탱크의 어깨에서 내려온 카심이 천천히 서장 앞으로 다가간다.

“한심하군.”

“카심, 당신… 당신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 같아?!”

서장이 악을 쓰는 와중에 카심은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나뒹구는 레이저 건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엄청난 무기들을 갖고도 그렇게 도망치다니.”

카심은 허탈하게 웃으며 서장을 바라보았다.

단 한 발이면 메타휴먼의 관절을 완전히 부숴 버릴 수 있다. 그 한 발이 만약 메타휴먼의 머리를 꿰뚫는다면, 그 즉시 메타휴먼은 움직임을 멈출 것이다.

그에 비해 탱크를 비롯한 메타휴먼들의 무기는 고작 쓰레기장에서 사용되던 장비들에 불과했다. 나노 방호복조차 완전히 꿰뚫을 수 없는 드릴, 몸을 집어 들어 던져 버리는 게 고작인 집게손… 그런 조잡한 장비들로 대륙 최고의 LAPD를 제압한 것이다.

철컥!

서장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레이저 건을 들어 카심을 겨누었다.

레이저 건을 쥔 서장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그러나 카심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신을 향해 겨눠진 총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음 따위에 전혀 미련이 없다는 듯 초연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탱크의 팔 끝에서 드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드르르르르…….

이제는 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어째서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탱크 자신에게는, 동료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었다.

인간을 위해 평생을 노동했고, 인간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러나 서장은 그런 탱크와 동료들의 몸뚱어리를 부수었고, 조롱하며 모욕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총구가 카심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서장은 탱크에게 새 삶을 주고, 동료를 준 은인을 살해하려 하고 있었다.

탱크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였다.

파지지직!

서장의 레이저 건이 한 줄기 빛을 내뿜는다.

콰직!!

폭발적인 속도로 뻗어 나간 드릴의 끝이 나노 방호복의 촘촘한 틈새를 파고든다.

상황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렸다.

“…탱크.”

카심이 가만히 탱크를 올려다본다.

레이저 건은 카심의 앞을 순간적으로 막아선 탱크의 왼팔 갑주를 관통하지 못했다.

그러나 탱크의 오른팔 드릴은 기어코 서장의 목을 꿰뚫었다.

나노 방호복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피로 물들었다.

“끄, 끄르르르륵…….”

서장은 자신에게 닥쳐온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휘청거렸고, 그대로 숨이 끊어져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으아아아아!!”

“사, 살려 줘!”

부러진 팔다리를 부여잡은 채 그 꼴을 보고 있던 경찰들은 저마다 들고 있던 무기들을 내던진 채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메타휴먼들은 그런 경찰들의 뒤를 쫓지 않았고, 대신 서장의 시신 주위로 몰려들었다.

피를 쏟아 내며 경련하는 서장의 눈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떠올라 있다.

카심이 천천히 그런 서장의 앞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먼저 가 있으시오. 나 역시 곧 대가를 치를 것이니.”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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