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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14화 (115/220)

114화 사라진 불꽃 (4)

“하아… 하아… 쿨럭!”

가쁜 숨을 몰아쉬며 피를 토해 내는 시몬의 모습을 본 칼리드 다마스커스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팔이 빠져 덜렁거렸고, 눈 한쪽을 잃었으며, 가슴과 배가 찢겨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토록 심한 상처를 입었건만, 시몬은 악착같이 발전소 문을 부여잡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지?”

“동생이 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으니까.”

칼리드는 곡도를 늘어뜨린 채 가만히 시몬을 내려다보았다.

형제를 구하기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 그의 태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시몬을 굳이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시몬은 숨이 붙어 있는 이상 결코 문 앞을 떠나지 않기로 각오한 듯 악착같이 문을 지켰고, 온몸이 망가진 이 순간에도 문과 한 몸이라도 된 듯 기대고 서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동생과 함께 도망쳐라. 그럼 살려 주지.”

“…….”

“내 표적은 오로지 한 명뿐이야.”

발전소가 완전히 마비된 지금, 칼리드에게 남은 임무는 루키우스 시장의 목숨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크흐흐.”

시몬이 피를 한 움큼 머금은 채 웃음을 터뜨린다.

“시장님 말이냐? 그럼 더더욱… 열어 줄 수 없지.”

칼리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런 시몬을 바라보았다.

“너희 형제를 방패막이 삼아 지상으로 도망친 남자다. 모르겠나?”

“개소리… 그럴 분이… 아니지.”

시몬의 눈빛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었다.

그러나 칼리드에게 시몬은 그저 어리석게 보일 뿐이었다.

세상에 형제 이외에, 핏줄 이외에 누굴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설득을 포기한 칼리드가 곡도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이빨을 드러내며 울부짖는 늑대를 향해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졌다.

“안타깝군.”

스각.

시몬의 목이 굴러 떨어지며 사방으로 피가 튄다.

칼리드의 얼굴에는 발전소의 인부와 자경단원들을 살해할 때와는 달리 착잡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임무는 이행되어야만 한다.

칼리드는 시몬의 시신을 밀어낸 뒤, 그대로 육중한 철문에 손을 올렸다.

아직 밤은 길고, 루키우스를 잡기에 부족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동생이 이미 임무를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주는 순간,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정확히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온몸을 옥죈다.

‘뭐지?’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속에서 정체 모를 지독한 냄새가 느껴진다.

시몬은 죽었고, 발전소 내부에 생존자 따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적인 감각이 이유 모를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칼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문에서 손을 뗀 채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때였다.

스가가가가각.

거대한 철문에 마치 거미줄처럼 수십 개의 붉은 선들이 그어진다.

칼리드는 곡도를 치켜든 채 이를 악물고 거대한 파공음을 내며 그어지는 선들을 응시했다.

곧이어 철문의 문이 붉은 선들을 따라 수십 토막으로 분쇄되어 부서져 내렸다.

웬 젊은 여인이 보검을 쥐고 있다.

‘저 여자의 짓인가.’

그녀가 쥔 보검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곧이어 그녀의 입이 열렸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군.”

입술을 깨문 칼리드가 숨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칼리드의 등 너머 수많은 시신들을 둘러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칼리드에게 물었다.

“네 짓인가?”

칼리드는 대답 없이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속전속결, 단번에 승부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드는 순간, 칼리드는 여인의 얼굴에 섬뜩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보았다.

그녀는 마치 즐거운 연회라도 앞둔 듯 입을 찢은 채 웃고 있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보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쏴아아아아아―

바닥에 괴어 있던 진득한 핏물이 마치 파도처럼 몰아치며 문밖으로 흐른다.

“크윽!”

사방에서 몰려든 핏물의 파도로 인해 온몸이 피에 젖어버린 칼리드는 그만 비틀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짙은 피비린내에 정신이 아늑해진 사이, 칼리드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 조금은… 갈증이 가셨는걸.”

순식간에 보검을 이용해 엄청난 양의 피를 흡수한 그녀는 온몸에 붉은 기운을 뿜어 대며 천천히 칼리드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왔다.

“하지만 좀 더 신선한 피가 필요한데…….”

싸워야 한다.

“네 걸 줄래?”

당장 눈앞 마녀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러나 온몸에 엉겨붙은 피가 칼리드의 몸을 마비시킨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여인의 존재감 앞에서 칼리드는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길 수 없다. 아니,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때, 여인의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자신처럼 표범의 형상으로 변한 하딘이 비치적거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쳐, 하딘! 지금 당장…….”

황급히 고함을 지르던 칼리드는, 그러나 동생의 모습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하딘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을 적마다 엄청난 양의 피가 땅을 적신다.

“아, 아아…….”

칼리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하딘의 가슴팍에서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 * *

“살아남자, 어떻게든.”

소년은 동생의 손을 붙잡은 채 습관처럼 되뇌곤 했다.

부모님이 센트럴 군인들에게 붙잡혀 끌려갈 때도, 암시장에서 동생과 함께 팔릴 때도,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형제를 사들일 때도… 소년은 동생에게 말했다.

“살아남아야 해, 반드시.”

형제를 사들인 남자는 히트맨 ‘살람 다마스커스’라는 남자였다.

자손을 남기는 일이 드문 히트맨은 암시장에 팔려 나온 이들 중 재능 있는 아이를 사들여 제자로 삼았고, 그렇게 자신들이 가진 비전의 명맥을 이어 갔다.

살람 역시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암시장을 찾았고, 형제를 사들인 것이었다.

그는 형제에게 칼리드와 하딘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고는 검을 쥐어 주며 말했다.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이제부터 병기야.”

그날부터 형제는 혹독한 훈련을 견뎌 내야만 했다.

맞지 않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살람의 폭력에 노출되어 수없이 죽을 뻔했고, 혹독한 훈련 속에서 몸 성할 날이 없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쌍둥이는 오로지 서로만을 의지했다.

살아남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쌍둥이의 집착에는 살람조차 놀랄 정도였다.

어쨌든 살람의 눈을 틀리지 않았고, 형제는 뛰어난 암살자로 성장했다. 소울 능력을 개화했으며, 다마스커스의 비전을 완전히 체득했다.

그리고 쌍둥이의 성인식 날, 살람 다마스커스는 마침내 마지막 시험을 부여했다.

“너희 둘 중 한 놈만 내 뒤를 잇는다. 그게 이쪽의 규칙이거든.”

서로를 죽일 것.

그는 술병을 든 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쌍둥이로 하여금 서로를 죽이게 만들었다.

50구역 마피아들의 성인식을 관전하며 꽤 감명을 받은 살람은 처음부터 서로를 죽이게 만들 의도로 쌍둥이를 사들인 것이었다.

그러나 쌍둥이는 스승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대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들의 스승, 살람을 살해했다.

노쇠한 주정뱅이 히트맨 살람은 이미 병기, 그 자체가 되어 버린 쌍둥이를 이겨 낼 수 없었다.

살람은 죽어 가면서도 자신에게 닥친 일을 납득하지 못한 듯 입을 뻐끔거렸고, 결국 피를 머금은 채 짧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리석은… 놈들, 너희는 평생을… 쫓기게 될 거다.”

스승을 살해한 쌍둥이는 함께 ‘다마스커스’의 이름을 이었다.

그러나 살람의 저주대로 쌍둥이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수많은 히트맨들이 쌍둥이를 노렸고, 매일같이 습격이 이어졌다.

쌍둥이의 손에 붙잡힌 히트맨 중 하나는 둘을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

“저주받은 놈들 같으니……. 너희는 우리의 규칙을 어겼다.”

히트맨들은 근본적으로 제멋대로인 족속들이기에 서로 은원이 존재하지 않고, 동료 의식 역시 없다. 그러나 히트맨들은 나름의 조직을 만들어 일종의 ‘계보’를 관리했다. 계보의 순수성이야말로 히트맨의 정체성과도 같았으며,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쌍둥이는 단독 계승의 룰을 어겼을 뿐 아니라 스승 살해로 계보를 더럽히기까지 했다.

중대한 규칙을 어긴 쌍둥이는 히트맨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칼리드는 붙잡은 히트맨의 목을 베기 직전에 조용히 대답했다.

“우린 그저 살아남고 싶었을 뿐이야.”

이후, 쌍둥이는 최소 수십 명의 히트맨들을 살해했다.

둘의 실력은 그처럼 탁월했지만, 히트맨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둘을 선뜻 받아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용병단은 물론, 사설 경호 업체까지도 쌍둥이를 함정에 빠뜨려 히트맨들에게 넘기려 들 정도였다.

결국 형제는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손에 더 많은 피를 묻혀야 했다.

그처럼 갈 곳 잃은 쌍둥이에게 단 한 명,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면 너희의 신분과 과거 행적을 전부 지워 주지. 다마스커스라는 이름을 대륙의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해 줄 수 있어.”

큰 보상을 약속하는 의뢰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5년, 나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해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이후 나 역시 너희를 잊어 주겠어. 그 순간, 너희는 완벽히 자유가 될 거다.”

거래는 성립되었고, 지난 4년 11개월 동안 쌍둥이는 아크의 지시에 따라 수많은 이들을 암살했다. 그사이, 쌍둥이에게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아크의 장담처럼 히트맨들은 다마스커스 형제에 대한 사냥을 멈추었고, 다마스커스라는 이름 자체가 잊혀졌다.

이제 탈로스 가문에서의 흔적만 지운다면, 형제는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1개월이 남아 있었다.

* * *

동생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하딘……!”

오랜 시간 악착같이 싸우며 살아남았다.

살기 위해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혔고, 이제 앞으로 한 달이면 이 모든 생활은 끝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딘은 차가운 주검이 되어 버렸고, 칼리드는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파스스스스…….

몸에 구멍이 뚫린 하딘의 몸뚱어리가 마치 미라처럼 바짝 말라 간다.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간 듯 하딘의 몸이 바스러지는 가운데,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회색 물방울들이 뒤쪽 회색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아아……!”

그 순간, 여인의 보검이 호를 그렸다.

콰직!

검에 베인 팔 한쪽이 날아간다.

그러나 칼리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지나쳐 동생에게로 다가갔다.

사방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깔깔거리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인의 보검은 칼리드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게걸스럽게 흡수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동생의 미라에 닿았을 때 즈음, 회색 연기를 뚫고 웬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동생의 심장을 부수고 모든 힘을 흡수한 남자.

“살아남아야 해, 반드시.”

습관처럼 하던 한마디 뒤에 숨어 있던 말.

“너만큼은…….”

가만히 하딘의 몸뚱어리에 손을 올린다.

“너는 살아야 하는데, 너만큼은…….”

칼리드의 손이 하딘의 몸에 닿자 그 몸이 부스러진다.

“아, 아아… 아아아아!!”

비명을 질러 대는 와중에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몸부림치지 마. 털 날린다.”

칼리드는 하딘의 몸 위에 올린 팔을 청년 쪽으로 내뻗었다.

그런 칼리드의 몸부림이 우스운 듯, 청년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이다.

“네가… 네가……!!”

고함을 내지르는 찰나, 청년이 회색빛의 권총을 칼리드의 팔에 갖다 대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펑!

칼리드의 팔이 풍선처럼 터져 나간다.

“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고통 속에서 칼리드는 피눈물을 흘리며 동생의 주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뒤쪽에서는 붉은 보검을 든 여인이, 앞에서는 회색 권총을 쥔 청년이 잔혹한 웃음을 흘리며 칼리드를 향해 다가온다.

둘은 일부러 칼리드를 죽이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 칼리드는 그저 재미있는 장난감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 관자놀이에 차가운 쇳덩어리가 닿았다.

철컥.

귓가에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안하군.”

탕!!

외마디 총성과 함께 칼리드의 몸이 동생의 주검 위로 엎어졌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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