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남매 (2)
막야와 발터가 엔진실을 비롯해 비공정 곳곳을 살펴보는 가운데, 회의실 안에는 태일과 프랑켄, 그리고 녹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너무 달아서 못 먹겠다.”
녹스는 태일이 사 온 쿠키를 한입 베어 물더니, 그대로 내려놓았다. 딘과 달리 녹스는 쿠키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녹스는 뭔가 각오한 듯한 얼굴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좋아, 말해 봐.”
“녹스, 괜찮겠어?”
프랑켄이 불안한 얼굴로 녹스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보니의 기억 때문에 녹스는 이미 몇 차례나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고, 능력을 폭주시켰다.
그러나 녹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괜찮지. 이 방은 웬만한 벙커 수준으로 단단히 만들어 놔서 웬만한 충격은 다 막아 낼 수 있거든.”
“아니, 내 말은… 네 상태 말이야.”
“괜찮아. 몸에 문제가 없는 걸 너도 봤잖아.”
실제로 의료 기기를 이용해 살핀 결과, 녹스의 몸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육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해도 심리적으로 받는 고통이 더 클 수 있다는 사실을 프랑켄은 잘 알고 있었다.
“여하튼 난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 봐, 클라이드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전에 먼저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태일은 천천히 입을 떼며 두 사람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설마 자신의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털어놓게 될 줄은 몰랐지만, 클라이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이쪽 세계에 넘어오게 되었는지.
다른 세계에서 어떻게 클라이드와 함께하게 되었으며, 혁명군을 이끌게 되었는지.
그리고 클라이드에게 배신당하게 된 경위에 이르기까지.
그것은 꽤 긴 이야기였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긴 시간 동안 태일의 이야기가 담담히 이어졌다.
녹스와 프랑켄은 결코 입을 떼지 않았으며,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혁명군에 대해 언급하면서 ‘알렉세이 딘’, ‘세연’ 등의 이름이 나왔을 때 녹스가 잠시 움찔하긴 했지만, 태일의 말을 막거나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프랑켄이 우려하던 녹스의 폭주 역시 없었다.
검은 탑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쪽 세계로 넘어오게 된 경위에 이어 클라이드와 마주친 뒤 나눈 대화까지 들려줬을 때, 창밖의 해는 이미 완전히 진 상태였다.
“…여기까지야.”
태일의 이야기가 끝나자 프랑켄과 녹스는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아무래도 믿기 힘들겠지만…….”
“아니, 믿어.”
“뭐?”
녹스가 너무나 의연히 받아들이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태일이었다.
“네 말, 믿는다고. 알렉세이 딘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내게 남겨 두었어. 그리고 그 지식 중에는 방금 네가 말한 ‘다중우주’도 포함되어 있어.”
“다중… 우주?”
“완벽히 같은 종류의 소울로 구성된, 같은 종류의 세계들이 여럿 있다는 거야. 여기에는 몇 가지 가설이 있는데, 420억 광년 뒤에 누벼진 여러 개의 우주가 있다는 가설, 어떠한 결절점의 존재에 따라 우주의 존재가 갈라져 나간다는 가설, 그리고 우주 자체가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형성된 시뮬레이션 세계에 불과하다는…….”
“…녹스.”
프랑켄이 끝도 없이 이야기를 펼쳐 나가려는 녹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딘 역시 무언가에 심취하면 끝도 없이 복잡한 설명을 늘어놓고는 했다.
“어쨌든 네 말은 딘이 여러 개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거지?”
“그래, 맞아. 심지어 딘은 다중우주를 이동하는 존재를 ‘여행자’라고 기록해 두기까지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세연과 딘은 약 5년 전, 이쪽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태일의 혁명군에 두 사람이 합류한 게 바로 5년 전이었다.
“설마 딘은 서로 다른 세계를 이동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나?”
“아니, 그건 아니야. 딘은 그 원인이나 방법을 규명해 내지는 못했어. 하지만 확실한 논증도 없이 다중우주의 존재를 분명한 지식으로 남겨 두었어.”
“딘이 다중우주의 존재를 확신했다고?”
알렉세이 딘은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결벽증을 가진 남자였다.
허술하게 만들어진 이론을 혐오했으며, 상상력에 의존한 유사 과학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아마 딘보다 SF 소설과 종교를 싫어하는 이도 없을 것이다.
한데 그런 딘이 제대로 논증도 되지 않은 다중우주를 긍정하고 지식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그래, 딘은 여행자야. 딘 외에 몇 명이 더 있을 거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경우,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지식이 된다. 경험적 증명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
한편, 딘 외에 여행자가 더 있다는 녹스의 말에 태일은 저도 모르게 품 안의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세연 역시 딘과 같았다. 이쪽 세계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쪽 세계에서 자취를 감춘 시기와 태일의 앞에 나타난 시기가 이어진다.
‘네가 날 부른 거야? 여기로?’
세연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떤 경위로 태일 앞에 나타났든 상관없었다. 그녀가 어떤 비밀을 감춰 두고 있든 지금은 그저 그녀를 다시 만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태일이 생각에 잠긴 사이, 프랑켄이 녹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녹스, 넌 어쩔 생각이야?”
프랑켄은 태일이 들려준 이야기에 크게 충격을 받거나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지금 프랑켄에게 중요한 것은 녹스의 선택이었다.
“클라이드를 만날 거야?”
“그래, 만나러 가야겠어.”
녹스는 너무나도 쉽고 간단하게 결정했다.
덜컹!
바로 그때, 갑자기 비공정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어 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창밖을 보니 비공정 바깥에 뿌연 먼지가 일고 있었다.
“이거… 아무래도 두 사람이 실수로 엔진을 가동했나 봅니다.”
놀란 프랑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발터와 막야가 있는 엔진실로 가려 했다. 그러나 녹스가 그런 프랑켄의 팔을 붙잡고는 태일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먼저 날 만나러 온 모양인데?”
“그런 거 같군.”
“나름 혁명군 대장이라는 사람이 미행을 달고 온 거야?”
“미행이 붙었다면 더 빨리 습격해 왔겠지. 네가 남겨 놓은 표식들을 보고도 내 핑계를 대나?”
알마티 코앞에 그 기괴한 키메라를 만들어 놓았으니 위치가 발각되는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녹스는 머쓱한 듯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수고를 덜었네. 그쪽에서 날 먼저 찾아왔으니까.”
바깥에 일어난 먼지 폭풍은 분명 클라이드의 능력이었다.
* * *
50구역 환락가, 레미제라블.
태일이 자리를 비운 사이, 레미제라블은 일종의 회합 장소로 변해 있었다.
마피아들을 대표하는 간부 자켄, LAPD를 대표하는 서장 강필, 레지스탕스를 대표하는 하얀 늑대, 그리고 카렌 탈로스.
넷은 이미 세 차례나 만나 대응 방안을 논의했지만, 지금껏 별다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물론 서로를 적대하며 무수한 피를 흘려온 마피아, LAPD, 레지스탕스의 우두머리, 거기에 캐피탈 클럽 기업인이 한자리에 모인 것만으로도 사실상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센트럴과 맞설 것인가. 맞선다면 어떤 수단을 사용할 것인가. 맞서지 않는다면 무엇을 양보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모두를 지휘할 것인가.
넷은 도무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사실상 Z―rail과의 협상을 위해 대표단이 꾸려져 떠난 이후, 50구역 대표자들은 그 어떤 진전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만 흐르는 사이, 50구역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어디…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지. 이 자리에 왜 낯선 자가 앉아 있는 거지?”
하얀 늑대의 가면 뒤쪽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자켄이 팔짱을 낀 채 눈살을 찌푸리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노려보았다.
“동감이에요. 이 자리에 우리 외에 누가 온다는 얘기는 나도 듣지 못했는데.”
오늘 이 자리에는 네 사람 외에 다른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적어도 자켄과 하얀 늑대는 그 ‘존재’를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강필은 자못 흥미롭다는 듯 눈앞에 앉은 멜빵 청바지 차림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한번 만나 보고 싶긴 했어. 지금껏 묵묵히 일하던 녀석들이 갑자기 집단 반란을 일으켰다는 게 신기해서 말이야.”
“일단 50구역에서 벌어진 일이에요. 모두와 만나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내가 제안했어요. 여긴 공장 지대의 대표인 ‘가이’예요.”
카렌의 소개에 가이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가이라고 합니다. 공장 주민들을 대표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주민…이라?”
하얀 늑대의 가면 뒤편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백한 비꼼이었고 분노였다.
그러나 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는 공장 지대에서 수년 동안 일하면서 유대감을 키웠고, 함께 살아왔습니다. 저희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고, 그렇기에 남겠다는 거부의 뜻을 본사에 정했습니다.”
거부의 뜻, 그것은 곧 반란이었다.
말을 마친 가이는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자리에 앉은 네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사람으로부터 혐오와 거부감, 그리고 호기심과 같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어느 쪽이든 가이에게는 꽤 익숙한 반응이고, 새삼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50구역의 주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졌기에 이 자리에 나왔을 뿐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공장 지대 메타휴먼들 모두가 저항을 ‘선택’했다는 뜻이지?”
메타휴먼은 본래 어떠한 종류의 선택도 불가능하다. 그저 수동적으로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가이를 비롯한 50구역 공장지대 메타휴먼들은 저항을 택했다.
그건 곧 그들이 더 이상 영혼 없는 메타휴먼이 아님을 뜻했다.
“너희들은 지금껏 어째서 정체를 숨겨 온 거지?”
강필의 물음에 가이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로보티안으로 인정받을 경우, 공장에서 해직되고, 공장 지대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저희는 그저 함께 머물며 함께 살아가고 싶었을 뿐입니다.”
“월급조차 받지 못한 채 위험한 일을 감수해야 할 텐데.”
“저희는 그저 계속 함께 지내고 싶었을 뿐입니다.”
가이는 같은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로보티안이라는 권리를 받았을 때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한들, 일자리를 잃고 가치를 잃어버린 로보티안은 곧장 빈민으로 떨어져 떠돌아야 할 뿐이다.
가이를 비롯한 50구역 주민들은 자유를 얻는 대신 노예로 살아가며 그저 함께 머무르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여긴 뭐 하러 온 거지?”
“50구역을 지킬 방법이 있다면, 우리 또한 힘을 보태고 싶을 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역시 이곳의 주민이니까요.”
자켄과 하얀 늑대, 강필은 제각기 생각에 잠긴 채 가이의 말을 곱씹었다.
그런 가운데 카렌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충 소개는 마친 것 같으니, 본론을 얘기하죠.”
카렌이 목을 축이려는 듯 맥주잔을 집어 올렸다. 나름 격식을 갖춰야 할 회의 자리에서 맥주를 마신다는 건 과거에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50구역에서 지내다 보니 카렌은 어느새 그 나름의 문화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크으… 좋네요. 흠흠, 청년당에서 센트럴 오더의 철회를 위한 안건을 상정했어요.”
카렌의 첫마디가 떨어지자마자 가이가 손을 들어 올려 묻는다.
“안건을 뭐라고… 하셨죠?”
그러자 강필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이런. 카렌 씨, 당신의 말은 늘 너무 어려워. 좀 이해하기 쉽게 말해 달라고.”
카렌은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쉰 뒤, 큰 잔에 담긴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 완전히 비워 버렸다.
“…좋아요, 알기 쉽게 말하죠. 나의 빌어먹을 동생 놈이 망할 늙은이들과 함께 50구역을 박살 내려고 하는 중이에요. 나와 젊은 친구들은 그걸 막을 생각이죠.”
“호오, 좋군.”
“이해했습니다.”
“귀에 쏙 들어오네요.”
“그래, 계속하게.”
네 사람의 반응을 본 카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맥주잔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동생을 엿 먹이기 위해서는 겁 많은 늙은이들을 협박해야 해요. 어떻게? 우리를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야죠.”
어느새 넷은 저마다 눈을 빛내며 카렌의 말을 듣고 있었다.
“확실히 보여 줘야 해요, 늙은이들이 오줌을 지릴 정도의 수준으로.”
카렌은 아크의 얼굴을 떠올리며 텅 비어 버린 맥주잔으로 탁상을 내려쳤다.
“병력을 끌어모아 49구역으로 갈 것을 제안하죠. 이왕 무력시위를 할 거면 제대로 하자고요, 제대로.”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