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기계 도시 알마티 (2)
“그러니까, 날더러 여기서 다빈치를 지키고 있으라고?”
“그래, 프랑켄과 함께.”
“웃기지 마. 내가 왜?!”
“알마티에 들어가는 건 위험해.”
“위험? 지금 위험이라고 했어?! 나, 녹스가 위험하다고? 개소리하지 마!”
녹스가 펄펄 뛰며 고함을 질러 댔지만, 태일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지금 요새 하나를 통째로 운용하던 시스템이 아니야. 그저 평범한 신체를 지닌 여자애란 말이야.”
“흥, 당신이 날 막을 순 없어! 프랑켄, 보고만 있지 말고 뭐라 말이라도 좀 해 봐!”
“우린 지금 놀러 가는 게 아니야. 게다가 알마티는…….”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던 태일이 잠시 말을 멈춘 뒤, 녹스의 옆에 서 있는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프랑켄 역시 태일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다만, 녹스의 욕망을 이해하기에 망설일 뿐이었다.
결국 태일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한 프랑켄은 녹스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녹스, 태일 씨 말이 맞아. 우린 여기서 기다리자.”
“싫어, 싫다고! 나도 알마티에 갈 거야! 나도 구경할 거란 말이야!”
프랑켄은 막무가내로 달아나려는 녹스를 단단히 붙잡았다.
한낱 여자아이의 몸에 불과한 녹스는 프랑켄의 강한 팔 힘을 이겨 내지 못한 채 발만 버둥거릴 뿐이었다.
“이거 놔! 안 놔?!”
프랑켄은 녹스를 붙잡은 가운데, 태일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녀오십시오.”
“부탁한다.”
“꼭 성공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렇게 태일은 다빈치에 프랑켄과 녹스를 남겨 둔 채 뒤돌아섰다.
한편, 민호와 카츠미, 페이진은 녹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정말이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단 말이지. 저 애가 정말 그 시퍼런 녀석이란 말이지?”
“나 역시 믿기지는 않지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겠지.”
“점점 익숙해질 거다. 50구역 촌구석과 달리 대륙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거든.”
“야, 첫째. 너도 50구역 시장 마을에서 굴러먹던 녀석이면서 웬 잘난 척이야?”
“그래도 너보단 대륙으로 자주 나와 봤어.”
“둘 다 그쯤 해 둬. 유치하니까.”
태일은 그런 셋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희 셋,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았던가?”
“…….”
페이진은 실제 용병까지 동원해 카츠미를 죽이려 했고, 카츠미는 포트리스에서부터 민호를 향해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던 세 사람이 언젠가부터 남매처럼 붙어 다니더니, 이젠 십 년지기 친구처럼 허물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지어 셋은 한쪽 귀에 같은 모양의 통신 장비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뭐, 내가 신경 쓸 바 아니지만.”
태일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세 사람을 지나쳐 선두에 섰다.
친구도, 적도 되지 못한 채 과거에 박제된 셋은 과연 어떤 관계인가.
그건 세 사람 본인들조차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태일의 뒤를 따랐다.
“으아아아아!! 어디 가!! 나도 갈 거야아아아아!!”
뒤쪽에서 우악스러운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동대륙을 오가던 열차들 대부분이 멈춰 서면서 철로는 한산했지만, 알마티로 이어지는 차로에는 쉴 새 없이 화물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온갖 물건들을 실은 화물차들의 운전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가운데, 핸들만 자동으로 돌았다.
기계 도시라는 별명처럼 알마티에서 많은 노동들은 이미 기계로 대체되었고, 도시 근방에서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한편, 도로 옆을 따라 걷던 카츠미와 페이진은 이미 진이 빠진 상태였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막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은 도무지 가까워질 줄 몰랐다.
“빌어먹을, 끝이 없네. 후우…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10분 정도만 더 가면 돼.”
“뻥치고 있네! 20분 전에도 그렇게 얘기했거든?!”
“…….”
알마티는 본래 전쟁에 대비한 요새로 건설되었고, 방어를 위해 높은 고도에 자리했다. 그렇기에 알마티로 진입하는 길 역시 전부 오르막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가벼운 차림으로 준비하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알마티에 가는데 어떻게… 맨몸으로 그냥 가냐?”
배낭 가득 장비들을 싸 들고 나선 바람에 페이진의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기계 도시 알마티에는 그 이름처럼 수없이 많은 기계와 장비들이 거래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개중에는 구식 라이플이나 권총을 개조할 수 있는 부품과 제조법 역시 분명 존재할 터였다. 운이 좋다면 가지고 있던 애장품들을 신형 장비로 교환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페이진은 내심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온갖 총기 부품과 장비들을 챙겨 들고 온 것이다.
“으으… 젠장, 더는… 못 걸어…….”
숨을 헐떡이던 페이진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어나, 페이진.”
카츠미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자, 페이진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도로를 통과하는 화물차를 바라보았다.
“당주, 지나가는 차들 중 한 곳에 올라타면 어떨까? 자리는 충분할 거 같은데.”
“…….”
역시 배낭에 도검들을 싸 들고 온 탓에 지쳐 있던 카츠미는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페이진의 말에 대답할 기운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마지못해 엉덩이를 일으킨 페이진은 스트레스를 입으로 풀겠다고 마음먹기라도 한 듯 열심히 떠들어 댔다.
“G7을 타고 왔으면 좋았잖아. 젠장…….”
“너무 눈에 띄어서 안 돼.”
간편한 차림으로 걷던 민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기억해 둬. 사람이 없다고 해서 눈과 귀가 없는 건 아니야. 알마티에서는 모든 게 눈과 귀의 역할을 한다.”
“…….”
알마티에서 생산되어 도시 내외를 오가는 차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장치의 역할을 수행한다.
알마티는 동대륙과 서대륙을 잇는 통로인 만큼 온갖 외지인들이 거쳐 가는 도시이지만, 그만큼 감시가 삼엄한 곳이기도 했다.
G7과 같이 눈에 띄는 개조 차량이 도로를 달린다면 금세 주의를 끌 게 분명하고, LAPD의 표적이 될 터였다.
“애당초 이 답 없는 도로를 걷는 건 우리들뿐이잖아. 이미 충분히 눈에 띄었겠구만, 뭐.”
어느 순간부터 페이진의 투덜거림에 익숙해진 일행은 대꾸조차 하지 않은 채 앞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분을 더 걸은 끝에 네 사람의 눈앞에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여기야.”
“여기가 바로 그 기계 도시인가?!”
“세상에…….”
카츠미와 페이진은 한동안 도시 입구에 서서 멍하니 거대한 첨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 기업과 더불어 온갖 길드들이 난립한 알마티에는 49구역이나 50구역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도시 곳곳에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 터빈과 건물 곳곳에 설치된 판넬들이었다.
“저게 다 뭐야?”
“에너지를 뽑아내는 설비들이야.”
태일은 담담히 대답하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결국 이곳의 풍경만큼은 태일이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수력발전, 풍력발전, 지열발전, 원자력발전, 태양열발전, 바이오에너지 발전…….
알마티는 바람과 비, 땅과 태양으로부터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낸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기계로 뒤덮인 도시에서 에너지 공급은 최우선 과제이고, 도시 전체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알마티가 에너지에 집착하는 사이 물은 오염되었으며, 땅은 황폐화되었고, 지반은 불안정해졌다. 심지어 49구역을 비롯한 근방 구역 생태계의 황폐화마저 불러올 정도였다.
그러나 알마티는 진보에 대한 열망으로 그 모든 희생을 무시했다.
“진보? 그 멍청한 놈들이 말하는 진보란 자기 파괴야.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놈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없애고 있으니, 그런 사이비가 또 있을까?”
알렉세이 딘은 알마티의 존재 자체를 비웃곤 했다.
열정적으로 발전을 꿈꾸지만, 그 발전의 끝이 자기 파괴라는 결론으로 치닫는다면 그것은 과연 발전인가.
어쩌면 알마티는 특정한 방향성을 가진 발전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를 욕망하는 도시인지도 몰랐다.
“빌어먹게도 크군. 저 도시 안에 Z―rail도 있단 말이지?”
“저기.”
민호가 팔을 들어 올려 멀리 보이는 거대한 쌍둥이 빌딩을 가리켰다.
한눈에 보아도 백여 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들이다.
“저 빌딩들이… Z―rail 본사라고?”
“아니.”
“놀랐잖아! 그런 농담을…….”
“저 빌딩 근방 3킬로미터 정도가 전부 Z―rail의 ‘영역’이야. 본사라는 개념은 따로 존재하지 않아.”
“…….”
이번에야말로 카츠미와 페이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둘 모두 Z―rail이 제법 큰 기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그 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드림 코퍼레이션과 같은 초거대 기업에 비하면 훨씬 작은 수준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센트럴 정부나 드림 코퍼레이션이라면 몰라도, Z―rail 정도라면 설득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런 Z―rail조차 대륙 끝 마피아 따위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Z―rail 사장과 협상하겠다며 고물 경찰차 한 대 끌고 50구역을 나선 게 얼마나 우스운 짓이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태일은 넋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너무 기죽을 거 없어.”
“기죽기는 누, 누가! 그렇지, 당주?”
“…….”
페이진은 당황한 와중에도 자존심을 챙겼지만, 카츠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름의 책임감을 지니고 출발한 만큼 자신의 판단 착오에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장을 만나기조차 힘들 거라는 태일의 충고를 불쾌하게 여긴 자신은 얼마나 한심했던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책임지고 왔으면서 자신은 얼마나 무지했던가.
“어깨 펴.”
태일이 충격에 얼어붙어 있는 카츠미의 어깨를 두드리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속은 텅텅 빈 녀석들이야.”
“만난다 한들…….”
카츠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슨 수로 저들을 설득하지?”
수많은 사업장을 운영하며 축적한 부.
VIP들로부터 받은 정치적 후원들.
나름 쓸 만한 카드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열차의 운영을 통해 그들이 얻을 이익에 대해 설명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사업가 대 사업가로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하는 부 앞에서 카츠미가 가진 카드들은 휴지조각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카츠미…….”
“당주, 정신 차려. 허세일 뿐이야, 저런 것들은!”
민호와 페이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와중에 알마티 입구에 도착한 트램에 시선이 닿았다.
소음 하나 없이 레일 위를 유유히 달리는 트램의 옆면에는 보란 듯이 Z―rail의 마크가 새겨져 있다.
평소 50구역에 도달하는 증기기관차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기술력이었다.
Z―rail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낡아 빠진 기관차를 교체하지 않았다. 50구역은 Z―rail에게 딱 그 정도 수준의 위치였을 뿐이다.
언제 손을 털어 버려도 손해가 미미한 곳. 굳이 투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구역.
“애초에 우린… 녀석들을 설득할 수 있나?”
절망하는 카츠미를 가만히 지켜보던 태일이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쌍둥이 빌딩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못 하지.”
“…이봐!”
페이진이 화를 내며 태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태일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애당초 우리가 해야 할 건 설득이 아니야. 설득이 먹힐 놈들도 아니고.”
태일은 설득… 아니, 구걸을 하러 알마티에 온 것이 아니다.
“협상을 해야지.”
태일의 말에 카츠미는 물론, 민호와 페이진마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뭘 갖고?”
“방법이 있는 건가?”
“글쎄, 찾아봐야지. 우리가 제시할 만한 카드를.”
태일은 그렇게 짧게 대꾸한 뒤, 태연하게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찾아? 여기서?”
페이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태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민호 역시 복잡한 표정으로 태일의 뒤를 따랐다.
“협상…….”
카츠미는 가만히 태일의 말을 되짚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