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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92화 (93/220)

92화 비공정 다빈치 (3)

“짜증 나, 정말!”

녹스는 조종실 문을 박차고 나오며 한참을 씩씩거렸다.

“잘난 척하기는! 어디 두고 보라지! 나 없이 얼마나 잘하나!”

모든 것이 손아래 있었다.

녹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포트리스라는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녹스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이 되었다.

포트리스에서만큼은 절대적 존재였던 녹스가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놀림이나 당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얼굴이 벌게진 채 걷던 중 녹스의 시선이 문득 창문 쪽에 닿았다.

환한 빛이 창문을 통해 내리쬐고 있었다.

홀린 듯 창문 앞으로 다가가 바깥의 모습을 제대로 본 녹스는 눈부신 태양 빛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와중에 녹스의 입이 헤 벌어진다.

“이게… 뭐야?”

다빈치는 구름 속을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다. 구름과 햇볕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시선을 조금 내리니 49구역의 광활한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에서 유민들이 만들어 놓은 거주지들은 엄지손가락만으로도 가려질 정도다.

녹스에게는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있었다. 수학적인 거리와 너비, 관측 가능한 가시거리 등 온갖 복잡한 공식과 계산, 과학적인 원리와 화학적 작용 따위로 눈앞의 광경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지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마녀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이 땅의 전사들은 길들일 수 없는 이들이었어. 당연한 일이지. 그처럼 넓고 광활한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어떻게 목줄을 채울 수 있겠어?”

먼 오래전,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다니던 전사들에 관한 이야기.

당시에는 구식 무기를 쥔 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규칙과 질서에 길들지 않은 이들은 야만인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포트리스라는 그 거대한 성채가 사실 얼마나 자그마한 공간이었던가. 다빈치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 속에서 포트리스는 그저 자그마한 블록 정도일 뿐이다.

숨 막히게 넓은 대지에서, 넓은 세상에서 녹스는 얼마나 자그마한 존재였던가.

거대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얼마나 오만했던가.

작은 성채에서 외로운 신으로 남느니, 거대한 세상 속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쪽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녹스의 눈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뒤따라온 프랑켄이 그런 녹스의 어깨에 손을 올려 주었다.

“멋지지?”

“……치사해.”

“왜? 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아니.”

녹스가 조종실에서의 대화 따위 벌써 잊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너만 알고 있던 거잖아.”

“…….”

프랑켄이 투정을 부리는 녹스의 옆에 서서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몰랐어, 이렇게 멋있을 줄은.”

프랑켄 역시 감회에 잠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광경이겠지.”

프랑켄이 녹스를 처음 만난 것은 작년 이맘때쯤이었다.

* * *

작년 7월, 49구역의 흙먼지는 유달리 거세게 몰아쳤다.

아무리 솜씨 좋은 드라이버라 해도 그런 날씨 속에서의 운전은 쉽지 않았다.

“요한, 이 자식. 운도 좋지. 딱 이런 때에 휴가라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우린 이게 무슨 고생인지.”

동료들이 흔들리는 차 안에서 불만을 터뜨리는 와중에 프랑켄은 운전대를 잡은 채 49구역의 모래바람과 한참을 씨름하고 있었다.

“야, 운전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최악의 승차감은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 탓이었지만, 프랑켄은 핑계 대신 묵묵히 대답했다. 어차피 핑계를 대 봐야 욕이나 먹을 뿐이었으니까.

“이게 다 빌어먹을 애송이 때문이야. 애당초 부잣집 도련님이 뭐 하러 환락가에 발을 들이는 거야? 젠장!”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이 50구역 환락가에 놀러 왔다가 납치당해 49구역에 끌려가는 일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꽤 흔한 일이었다.

환락가에 숨어 들어온 펑크 라이더들은 만만해 보이는 호구를 납치해 49구역으로 달아난 뒤, LAPD를 통해 몸값을 요구했다.

당당하게 경찰서에 납치 사실을 알리고 몸값을 요구하는 납치범들의 행태도 우습지만, 그보다 더 황당한 쪽은 부모의 반응이었다.

상당수의 부자들은 자식이 납치당했을 경우, ‘시세’에 따라 몸값을 낸 뒤, 사건을 덮어 버리곤 했다. 히트맨을 고용해 납치범들을 쓸어버리는 일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자칫 자식의 치부가 소문나면 잃을 게 많은 이들이다. 게다가 히트맨 고용에는 보통 몸값보다 비싼 수준의 비용이 청구되었다.

결국 부자들은 LAPD에게 납치범 체포 대신 다른 요청을 건넨다.

당시 프랑켄의 팀은 납치범들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49구역에 들어왔다.

“빨리 해치우고 가시죠.”

“젠장. 어이, 가방은 어딨어?”

차에서 내린 팀장이 짜증스럽게 외치며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펑크 라이더들이 머무르는 ‘포인트’라는 곳은 수십 년 전 폭탄에 의해 반파된 폐허였다. 한눈에 보아도 음산한 느낌을 풍기는 건물 앞에는 십여 대의 바이크가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었다.

“어이, 버그! 넌 밖에서 경계 서고 있어. 차 안에서 농땡이 피우고 있으면 뒈질 줄 알아! 응?”

요한이 곁에 없을 때면, 경관들은 프랑켄을 ‘버그’라 부르며 멸시했다. 경관들 역시 로보티안 버블 사태 당시 많은 돈을 잃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분노는 자연스레 최초의 로보티안, 프랑켄에게 향했다.

“…알겠습니다.”

프랑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교섭에서 배제된 프랑켄은 모래바람을 맞으며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간 경찰들은 돈을 전달한 뒤, 수수료 교섭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전달책을 맡은 경찰들은 납치범에게 일부 ‘수수료’를 받아 챙겼고, 그 안에 프랑켄의 몫은 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갑자기 건물 안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탕! 탕! 탕!

교섭이 틀어져 위협용으로 사격이라도 했나 싶어 건물 위쪽을 바라보았지만, 곧이어 끔찍한 비명과 함께 건물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쿠쿵! 쿠구구구구!

“으, 으아아아악!!”

“사, 사, 살려 줘!”

프랑켄은 급히 권총을 쥔 채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요란하게 들려오던 소리들은 거짓말처럼 금세 멎었다.

삐걱… 삐걱…….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계단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가운데, 총성과 비명 소리는 물론, 인기척 자체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피 냄새와 화약 냄새만이 지독하게 풍길 뿐이었다.

그렇게 2층에 올랐을 때, 프랑켄은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프랑켄은 경찰 생활을 하며 온갖 종류의 살해 현장을 보아 왔지만, 눈앞의 장면처럼 참혹한 광경을 본 적은 없었다.

“이게 대체……!”

열댓 명의 펑크 라이더와 LAPD 경관들, 그리고 납치당한 소년의 시신.

그저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린 상처가 아니다.

시신들은 무언가에 마구 할퀴어진 것처럼 마구 찢어발겨진 상태였고, 신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똑… 똑…….

프랑켄의 머리 위로 몇 방울의 피가 흘러 떨어진다.

벽과 바닥은 물론, 천장까지 시뻘건 피로 완전히 뒤덮여 있었다.

고작 몇 분 전에 2층에 올라온 경관들마저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의 한가운데, 한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황금빛 장발에 붉은 눈동자.

그는 긴 코트를 입고 한 손에 머스킷을 쥔 채 프랑켄을 바라보았다.

“너도 경찰인가?”

그의 몸은 이상하리만치 깔끔했다. 피 한 방울조차 튀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켄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이런 겁니까?”

남자의 짓이다.

“그래.”

남자는 너무나도 순순히 자신의 살인을 인정했다.

붉은 눈을 가졌으면서 이성을 가진 존재.

그는 프랑켄과 같은 로보티안이었다.

철컥.

프랑켄은 남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무기를 버려. 지금 당장…….”

그러나 프랑켄은 미처 자신의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남자가 머스킷을 살짝 들어 올리는 순간, 남자를 중심으로 수십 갈래의 바람이 휘몰아치며 주변에 흥건하던 피가 무수히 많은 토네이도를 형성했다.

시신들을 찢어발긴 칼바람들이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공간을 메운다.

한편, 남자의 주변에는 바람의 막이 형성되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잘 생각해라.”

남자의 목소리는 그 난리 통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를 이길 수 있다고 보나?”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비록 버그라 불리며 무시당하더라도,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하더라도 프랑켄은 경찰이다.

철컥!

프랑켄은 피바람 속에서 기어코 권총을 들어 똑바로 남자를 향해 겨누었다. 그런 프랑켄의 눈동자를 보던 남자가 어째서인지 비죽 웃어 보였다.

곧이어 작은 돌개바람들이 급격히 몸집을 키우며 건물 전체를 메웠다.

콰콰쾅!! 우지지직! 쾅!!

굉음과 함께 건물 곳곳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탕!

프랑켄은 그 와중에 남자를 향해 총을 쏘았지만, 총알이 남자에게 닿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격 한 발을 끝으로 프랑켄의 몸은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속에 파묻혔고, 흥건한 핏물 속에 잠겨 버렸다.

“……!”

“…이봐!”

“…어이!”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차려 봐!”

“쿨럭! 으… 으윽…….”

건물에 깔려 다리가 뭉개진 와중에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프랑켄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그 형체 주변으로 푸른빛이 가득하다. 아니, 그 형체로부터 빛이 뿜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이 좀 들어?”

“당신…은…….”

“내 이름은 녹스.”

프랑켄의 의식이 다시 흐려질 때 즈음, 녹스의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너, 내 동료가 돼라!”

지나치게 유쾌한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프랑켄의 의식이 끊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프랑켄은 웬 치료실에 누워 있었다.

찢어발겨진 시체들, 금발 머리의 사내, 피가 뒤섞인 돌개바람, 한 발의 총성, 무너져 내린 건물… 그리고 ‘녹스’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그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통증은 그 모든 것들이 현실임을 생생하게 알려 주었다.

망가진 다리는 다른 기계 다리로 교체되어 있고, 정체 모를 로봇들이 프랑켄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어.”

포트리스 전체에 녹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긴…….”

“손님은 4년 만이야. 예전이라면 안 될 일이지만, 뭐 어때? 이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프랑켄은 그렇게 포트리스의 관리자, 녹스를 만났다.

프랑켄은 그로부터 약 한 달간 포트리스에 머물렀다.

요새에 머무르는 동안 프랑켄은 대개 녹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때로는 그저 목소리로, 때로는 푸른 형체를 지닌 채 프랑켄 앞에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녹스를 비롯해 포트리스를 단 하루 만에 만들어낸 과학자.

아무것도 없는 아스팔트 바닥에서도 온갖 생명을 피워내는 마녀.

그토록 엄청난 능력을 지닌 이들이 만든 ‘셸터’.

녹스는 위대한 발명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목격했고, 역사 시대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세계를 두고 벌어진 토론을 기록했다.

마법 같기도, 과학 같기도 한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것들이지만, 포트리스에 숨겨진 장비들을 보자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4년 전, 셸터라 불리는 조직을 만든 사람들은 녹스만을 남겨 둔 채 떠났다.

넓디넓은 포트리스 안에는 녹스와 녹스가 제작한 로봇들만이 가득했다.

“로봇들은… 재미가 없어.”

직접 듣진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녹스는 친구가 필요해 로봇들을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로봇들은 그저 녹스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 뿐이었고, 학습된 범위 내에서 최선의 답을 읊어 낼 뿐이었다.

서빙 로봇이 갑자기 무의미한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업무를 거부하거나, 청소 로봇이 쌓이는 먼지를 보며 짜증을 내는 일 역시 없다.

그처럼 ‘오류’가 없는 로봇들은 결코 녹스의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널 만난 거야.”

“어째서 날 데려온 거지?”

“그야, 넌 나처럼 반쪽짜리 소울을 지니고 있으니까.”

인간과 한없이 닮았지만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던 둘은 그렇게 만나 새롭게 ‘셸터’를 만들었다.

반쪽짜리 셸터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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