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8화 (89/220)

88화 녹스 (3)

펑크 라이더 무리 중에서도 비열하기로 유명한 스캐빈저 일당이 가장 먼저 포트리스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의 일치였다.

스캐빈저는 백련 일당이 패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투 현장에서 뭐라도 주워 먹을 게 있을까 싶어 찾아온 것뿐이었다.

단단한 갑주나 괜찮은 바이크, 정말 운이 좋다면 총과 탄약까지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지고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았건만, 전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거야 뭐, 시체들은 죄다 하늘로 솟아 버리기라도 한 건가?”

“벌써 땅에 다 파묻은 거 아냐?”

“멍청아, 그게 가능하겠냐? 죽은 인원만 자그마치 수백이라고 했는데, 그걸 이틀 만에 흔적도 없이 매장했다고?”

“하지만…….”

“좌표 다시 확인해 봐, 인마! 그 고물이 엉뚱한 곳을 안내했거나, 그 쥐새끼가 잘못된 정보를 흘린 거겠지.”

“…….”

스캐빈저가 총을 매만지며 살벌하게 말하자, 겁먹은 뚱보가 다시금 좌표계를 살폈다.

좌표계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지만, 시체털이를 주로 해 온 스케빈저 일당에게는 최고의 보물이었다.

나름 정확한 좌표계가 있기 때문에 전투가 끝난 현장에 가장 먼저 도달해 제법 재미를 본 것이다.

“대장, 좌표계는 문제없는데요. 아무래도 정보가… 틀린 거 아닐까요?”

“맞아. 백련이 그렇게 처참히 진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지금껏 숨어 지내던 사막여우라니… 처음부터 너무 허황된 정보였어.”

“그래서… 우리가 헛걸음했다는 거야? 그 많은 기름을 그냥 땅에 쏟아 버렸고? 어?”

스캐빈저의 날선 목소리에 부하들이 입을 다물고 슬슬 시선을 피했다. 스캐빈저가 그렇게 뒤틀린 심사를 드러내면 부하들 중 누군가의 팔다리가 망가지곤 했고, 그건 대개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녀석이었다.

그렇게 성난 스캐빈저 앞에서 부하들이 진땀을 빼고 있던 찰나, 갑자기 전조도 없이 뿌연 흙먼지가 일기 시작했다.

큰 바람조차 불지 않았건만, 갑자기 시야를 가릴 정도의 흙먼지가 공중을 덮었다.

콰아아아아아…….

“뭐, 뭐야?!”

“젠장, 이건 또 웬 날벼락이야?!”

아우성치는 사이, 흙먼지는 곧 가라앉았다.

“으으… 퉤퉤!”

“대, 대장…….”

“젠장, 전부 흙투성이잖아!”

“대장!”

스캐빈저가 짜증을 부리며 온몸의 흙을 털어 내던 중 부하들이 스캐빈저를 불러 댔다.

“왜 자꾸 부르고 지랄이야? 딴짓 말고 좌표계나 다시 확인해서 위치를…….”

“대장, 저기…….”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린 스캐빈저의 시선이 부하의 손끝을 따라 어디론가 향했다.

“어… 저거……?!”

스캐빈저의 눈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터무니없는 요새가 나타나 있었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웅장한 벽과 둥그런 원형의 지붕, 높게 솟은 정체불명의 탑까지. 구조물의 웅장함에 스캐빈저를 비롯한 펑크 라이더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와중에 요새의 앞에는 한눈에 봐도 단단히 개조된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스캐빈저의 부하 중 한 놈이 차에 달려가 내부를 살피고는 앞 유리와 보닛, 타이어 따위를 살폈다.

“이거, 진짜 제대로 개조된 거 같은데요? 가져다 팔 수만 있으면…….”

“그건 보기만 해도 알아, 멍청아!”

스캐빈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팔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찔끔한 부하가 슬금슬금 게걸음을 치며 다시 동료들에게 돌아왔다.

“대장, 이건 아무래도 사막여우의 거처 같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 사막여우, 그 미친놈이 이런 걸 49구역 한가운데에 만들어 놨던 거야.”

스캐빈저가 입맛을 다시면서 견고한 요새를 바라보았다.

사막여우가 어떤 자인가.

49구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무기들은 죄다 그 남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사막여우의 거처 안에 엄청난 보물들이 쌓여 있다는 소문 역시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스캐빈저는 지금 바로 그 보물 창고를 찾은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단하다는 백련이 사막여우에게 완전히 박살이 나지 않았던가. 한낱 하이에나 무리에 불과한 스캐빈저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스캐빈저의 눈은 탐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대, 대장? 아무리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요…….”

“나도 알아, 인마. 그래도 안에서 총 한 자루만 얻어 나올 수 있으면 팔자 고치는 거야. 어? 그 총이 어디 평범한 총이겠냐고.”

“…….”

3대 용병단의 보스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수부티도 한때는 펑크 라이더에 불과했다. 그런 녀석이 사막여우의 총 한 자루를 얻고는 몇몇 유명인을 사냥하면서 세력을 키운 것이었다.

“그래, 총 한 자루면 되는 거야. 그거면…….”

부하들은 불안한 얼굴로 스캐빈저를 바라보았다.

백련을 전멸시킨 괴물을 대체 무슨 수로 상대한단 말인가. 차라리 요새 발견의 정보를 값비싸게 파는 게 훨씬 현명했다. 그러나 이미 욕심으로 눈이 돌아간 스캐빈저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일단 근처에 숨어서 대기한다.”

스캐빈저의 말에 부하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스캐빈저는 지치지도 않는지, 집요하게 요새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하이에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강한 힘이 아니라 민감한 촉이다.

스캐빈저의 본능은 요새에 대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대박을 잡을 수 있다는 촉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하나면 돼. 놈의 발명품 하나면…….’

요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인기척조차 없었다.

문이 열리기는커녕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기다림에 지친 스캐빈저가 주변을 살피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이, 막내!”

“네, 네! 대장!”

비쩍 마른 막내가 허겁지겁 바이크를 끌고는 스캐빈저 앞으로 달려온다.

“너, 가서 저 요새 문 좀 두드려 봐.”

“예? 제가 어떻게…….”

퍽!

막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캐빈저의 주먹이 뺨으로 날아들었다.

“그냥 길 가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물 한 모금 마시게 해 달라고 하면 되잖아, 인마!”

부하들은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실소를 터뜨렸지만, 입 밖으로 솔직한 생각을 꺼내지는 못했다.

“가서 뭐든 해 봐, 인마! 문만 열면 내가 바이크 한 대 뽑아 줄 테니까!”

“네, 네……!”

울상이 된 막내는 터덜터덜 문 앞으로 다가갔다.

황량한 땅에 거대한 성처럼 위치한 요새.

그 앞에 선 막내는 거의 개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요새 벽면의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한 막내가 겁에 질린 얼굴로 뒤쪽을 바라보았다가 스캐빈저의 주먹을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돌아가면 스캐빈저에게 또 얻어맞게 될 테니,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결국 막내는 눈을 감고 문을 두드렸다.

쿵! 쿵!

살짝 두드렸을 뿐인데도 문에서 거대한 소리가 들려온다.

“저, 저기요!”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그렇게 막내는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렸다.

스캐빈저가 무서워 뒤로 물러나지도, 그렇다고 문을 더 세게 두드리지도 못한 채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멀찌감치서 그 꼴을 본 스캐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 병신 같은 새끼.”

그러고는 총을 들어 올렸다.

“대, 대장?!”

철컥!

“다들 시동 걸어.”

여차할 경우, 도망가면 그만이다.

부르릉!

부하들은 스캐빈저의 말을 이해한 듯 저마다 바이크의 핸들을 붙잡았다.

탕!! 탕탕!!

곧이어 스캐빈저의 총구에서 연달아 불이 뿜어졌다.

갑작스러운 사격에 놀란 막내는 머리를 바짝 숙인 채 제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그렇게 몇 차례의 사격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안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총알을 몇 발이나 쏘아 댄 스캐빈저는 곧 총을 거두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안에 아무도 없나? 어디 산책이라도 간 거 아냐?”

“그, 그런가 봅니다.”

부하들은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헤헤 웃으며 스캐빈저에게 맞장구를 쳐 주었다.

“흠, 벽이라도 타 넘어야 하나?”

스캐빈저의 얼토당토않은 발상에 부하들의 얼굴이 창백해진 가운데, 요새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구구…….

거대한 먼지바람과 함께 요새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 나옵니다!”

“숨어!”

스캐빈저와 부하들이 저마다 바이크의 시동을 끄고는 바위나 둔덕 따위에 몸을 숨긴 채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 * *

“여기가… 바깥세상!”

요새 밖으로 나온 녹스는 눈을 반짝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언뜻 보기에 늘 방 안에 갇혀 있던 소녀가 처음 바깥세상을 보고 감동하는 모양새이지만, 그런 것치고 바깥세상에는 도무지 볼만한 게 없었다.

흙먼지와 끝도 없이 펼쳐진 황무지.

“콜록, 콜록!”

흙먼지 때문에 숨 쉬기 불편하고, 눈마저 따가울 뿐이다.

요새의 상황을 깨달은 딘이 요새 문을 조종해 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녹스, 아무리 그래도 요새 은폐에 쓸 에너지까지 끌어다 쓰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잠깐. 그 에너지에 손댄 건 나 아닌데?!”

녹스가 항의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누가… 아, 나였나?”

녹스에게 불만을 퍼부으려던 딘이 문득 생각난 듯 자신의 이마를 쳤다.

딘은 녹스의 전이(轉移) 작업 와중에 수백 차례 공정을 개조했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다 써야 했다. 그 와중에 멤브레인 은폐 에너지까지 사용해 버린 것이다.

“…한심해.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에너지를 끌어 오다니.”

“야, 녹스! 이건 애당초 너 때문이잖아. 네가 멋대로 그런 일을 저질러서…….”

“아무리 그래도 이 에너지까지 건드릴 줄은 몰랐는데.”

애당초 알렉세이 딘은 요새 은폐 기능 자체를 ‘녹스(Nox)’라 이름 붙였다. 은폐 기술을 융통성 있게 운용하기 위해 관리자를 만들었고, 그 관리자 역시 언젠가부터 녹스라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관리자의 인간화를 위해 은폐에 필요한 에너지마저 모조리 끌어 썼으니, 그야말로 주객전도였다.

“뭐 어때. 어차피 버려져 있던 요새잖아?”

“…너무해!”

태일의 가차 없는 지적에 녹스가 서럽다는 듯 코를 훌쩍이며 태일을 올려다보았다.

상당히 작위적인 녹스의 표정에 태일은 질색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아무리 미소녀의 몸을 가졌다 해도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빤히 아는 태일의 입장에서는 녹스의 표정과 태도가 그저 가증스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거야?”

근육 사용에 익숙해지고, 말이 트이자 녹스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일관된 패턴의 표정과 반응을 흉내 냈다.

순식간에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녹스가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사 시대 말기에 유통된 영상물들을 참고했어. 흔히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던데.”

태일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알렉세이 딘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애니메이션 수집은 딘의 취미였다.

“너,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그렇다고는 해도 설마 이런 취향일 줄은 몰랐는데.”

“실례야! 그건 내가 모은 게 아니라…….”

“언제는 네가 진짜 알렉세이 딘이라며?”

제 편할 대로 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클론이라니.

딘은 대꾸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열린 문 앞을 바라보았다.

“뭐, 어쨌든 이왕 일이 벌어졌으니, 대책을 마련해야지.”

황량하고 척박한 땅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 요새.

49구역 용병단과 펑크 라이더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센트럴은?

쿠구구구…….

수많은 불확실성 속에서 포트리스의 육중한 문이 바깥세상을 향해 열렸다.

그리고… 세 사람의 눈앞에 나타난 건 웬 소년이었다.

그것도 오줌을 흥건히 지려 버린 상태였다.

“뭐니, 넌?”

“그, 그게…….”

얼이 나간 채 주저앉은 소년이 녹스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무, 물 한 모금…….”

“뭐?”

“물 한 모금만 마시게 해 주세요!”

소년의 고함 소리에 녹스는 물론, 태일과 딘마저 멍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뭐라는 거야, 이 병신이.”

소년을 향해 쏘아붙인 건 다름 아닌 녹스였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