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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7화 (88/220)

87화 녹스 (2)

무엇이든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능력, 데미우르고스.

그 무언가에 과연 생명체도, 즉 ‘인간’도 속하는가.

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질문한 이는 다름 아닌 클라이드였다.

“내 능력으로 인간을 되살릴 수 있냐고?”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누군가의 질문에 알렉세이 딘은 히죽 웃었다.

“시도는 했지.”

과연 정신 나간 과학자다운 태도였다.

‘그때 난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당시 딘의 말을 듣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질문을 던진 클라이드의 표정만큼은 확실히 기억했다.

클라이드는 기대에 찬 얼굴로 딘을 바라보았다. 아마 녀석은 캡슐에 봉인된 동생 보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 숨이 멎은 보니의 부활을 기대했을 것이다.

클라이드는 동생 보니의 복수를 위해, 보니의 소생을 위해 혁명군이 된 녀석이었다.

당시 딘은 클라이드의 반응을 즐기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실패했어.”

클라이드의 얼굴에 잠깐 떠오른 희망이 사라지고, 딘은 킬킬거리며 웃어 댔다.

녀석은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을 뒤섞곤 했고, 수수께끼를 즐기곤 했다.

태일은 당시 딘의 대답을 곱씹으며 캡슐 안에 잠든 소녀, 보니를 바라보았다.

딘은 자신의 소울을 분리해 내 녹스를 만들었고, 녹스는 이제 보니의 몸을 빌려 인간이 되려 하고 있다.

녹스는 당시 중단된 딘의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스스스―

녹스의 영체가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곧이어 기계실 전체에서 정체 모를 엔진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키리리리리… 쿠궁쿠궁쿠궁…….

붉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가운데, 톱니바퀴들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기계실 전체의 동력은 보니가 담긴 캡슐을 중심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캡슐 안, 미라처럼 남겨진 보니의 하얀 피부에는 생기가 없다.

곧이어 캡슐을 중심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티딕… 틱!

기계실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아니, 포트리스 내부의 모든 전력이 요동쳤다.

캡슐을 중심으로 몰려드는 에너지야말로 지금껏 포트리스를 지탱하던 동력이자 녹스, 그 자체였다.

이제 그 엄청난 에너지는 보니를 소생시키는 데 동원될 것이다. 아니, 녹스가 보니의 몸을 차지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태일은 몰려드는 에너지가 만들어 낸 진동의 한가운데에서 담배를 문 채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은 어쩌면 ‘인간’의 의미 자체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알렉세이 딘의 소울로부터 탄생한 녹스는 정말 딘과 별개의 존재인가.

만약 보니가 눈을 뜬다면 녹스의 의식을 가진 그녀는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존재 의의는 육체인가, 의식인가.

온갖 복잡한 질문의 답을 태일 역시 알지 못한다.

그저 이해했을 뿐이다.

다른 차원에서 혁명군을 배신한 녹스의 욕망을.

이쪽 차원에서 동료에게 버려진 녹스의 분노를.

‘클라이드, 네가 이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치지지지지……!

이제 기계실의 동력은 캡슐의 위쪽, 거대한 구체에 집중되었다.

기계실의 태엽들이 어지럽게 회전하는 가운데, 프랑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녹스, 진심이야? 정말… 인간이 될 생각이야?”

“그래.”

녹스의 목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모여든 에너지가 캡슐로 흘러 들어갔다.

쿠구구구…….

포트리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계실의 모든 불빛이 깜빡거리며 희뿌연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태일에게는 꽤 낯익은 광경이었다. 알렉세이 딘은 수시로 포트리스를 통째로 뒤흔들 만한 실험을 제멋대로 진행하곤 했다. 물론 그 실험에 있어 다른 이의 동의 따위는 없었다.

“무, 무슨 일이야?!”

기계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딘과 라비가 뛰쳐 들어온다.

그래, 보통 저렇게 얼빠진 얼굴을 한 채 기계실로 들어오는 쪽은 바로 태일과 세연, 클라이드를 비롯한 간부들이었다.

알렉세이 딘의 놀란 얼굴을 보니,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녹스! 뭘 하고 있는 거야?”

각종 톱니바퀴들이 정신없이 돌고 있으며, 붉고 푸른 빛이 사방에서 울려 댄다.

삑삑거리는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려 대는 와중에 정체 모를 엔진의 진동이 계속되었다.

황동 계기판의 각종 바늘들은 이미 임계치를 한참 넘어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딘과 함게 기계실에 들어온 라비는 온 방에 가득 찬 이름 모를 기계들을 보며 넋이 나가 버린 듯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기계실의 각종 장비들이 제멋대로 작동하는 꼴을 본 딘은 사방을 둘러보며 고함을 질러 댔다.

“녹스, 대답해!!”

녹스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없자, 딘의 시선이 프랑켄에게로 향했다.

“이봐, 프랑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그러나 프랑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캡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캡슐을 발견한 딘이 놀란 듯 중얼거렸다.

“저 아이는 녹스가 찾아온…….”

“시체지.”

태일이 대신 딘의 말을 끝맺으며 가만히 캡슐을 바라보았다.

주변에서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캡슐 안 액체에서 무수한 거품이 일었다.

“넌 알렉세이 딘의 지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했지?”

“…내가 바로 딘이니까.”

“그럼 맞춰 봐. 저 캡슐과 기계실의 이 장비들을 가지고 녹스는 뭘 하려는 걸까?”

딘은 그제야 방 전체에서 작동하는 기계와 캡슐 주변에 모여든 에너지를 살폈다.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설계되어 기계실에 쌓인 잡동사니들은 녹스의 능력으로 인해 연계되어 하나의 목적을 지닌 거대 기계로 재탄생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기계의 형태와 에너지의 흐름을 살피던 딘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딘의 클론도, 녹스도 모두 알렉세이 딘으로부터 기인한 존재들이다.

즉, 생각의 구조는 결국 같다.

“인간이 되겠다고?!”

처음 딘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자, 당혹감은 곧 승부사의 광기로 바뀌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프랑켄이 미친놈 대하듯 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일에게는 그리 새삼스럽지 않은 반응이었다.

알렉세이 딘은 원래 그런 녀석이었다.

수십 분 동안의 불안정한 에너지 흐름 속에서 딘은 곧 정신을 차린 듯 기계실 곳곳을 바삐 돌아다니며 손을 놀렸다.

“이런… 이쪽은 과부하야.”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계들을 손보았고, 이미 제 역할을 다해 멈춰 버린 기계의 부품을 뽑아내 다시 재조합했다.

기계의 설계를 완전히 이해한 딘은 에너지가 적절한 방식으로 흐를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기기들의 배치를 변경했으며, 각 단계에 맞게 다시 조립했다.

그 과정에서 수십, 수백 개의 톱니와 나사, 정체 모를 쇳조각 따위가 기계실 곳곳을 날아다녔고, 순식간에 복잡한 장비들이 만들어졌다가 금세 해체되어 다른 형태로 변해 버렸다.

수십 차례에 걸쳐 이뤄져야 할 개조 작업이 단 몇 초 사이에 계속되고 있었다.

딘은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의 실험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보통의 과학자들이 일생에 걸쳐 이룩할 연구를 고작 수분 만에 끝내 버리곤 했고, 그로 인해 몇 세대를 앞선 오버테크놀로지를 구현해 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딘마저도 식은땀을 흘리며 온 집중을 쏟아 내고 있었다.

캡슐의 계기판은 과부하를 뜻하는 붉은 영역과 안정을 의미하는 초록 영역을 몇 번이나 오가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사이, 완전히 타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부품들이 구석에 잔뜩 쌓여 갔다.

“세상에…….”

라비와 프랑켄은 뒤로 물러서서 소파 옆에 선 채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녹스는 이미 알았던 거군요.”

프랑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자신이 일단 일을 벌이면 박사님이 와서 나머지 단계를 진행할 거란 사실을.”

“결국 둘만큼 서로를 잘 아는 존재도 없을 테니까.”

녹스는 처음부터 완성된 기계장치로 작업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그저 시작 단계에 불과한 장치로 ‘인간화’를 시도했다.

그 와중에 알렉세이 딘이 클라이드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실험에 성공하려면 나 정도 되는 조수가 한 명 더 필요해. 나 혼자서는 손이 부족해.”

기계실의 부품들 중 절반 이상이 잿더미로 변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모든 기계가 멈추었다.

줄곧 불안하게 깜빡거리던 기계실의 불빛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지진이나 소음 역시 더는 없었다.

딘은 그야말로 녹초가 되어 멍하니 캡슐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츠츠츠츠…….

천천히 캡술의 문이 열린다.

뿌연 안개 속에서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잠시 뒤, 소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였다.

어쨌든 결국 미친 과학자는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키고야 말았다.

소녀가 천천히 캡슐 밖으로 걸어 나온다.

그러나 아직 걸음에 익숙하지 않은 듯 어딘지 모르게 엉성하고, 불안하게 기우뚱거렸다.

“아… 아…….”

목소리 역시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입을 벙끗거린다.

라비는 황급히 그런 소녀에게 달려가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천을 걸쳐 몸을 가려 주었다.

“녹스……?”

프랑켄 역시 조심스럽게 그런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고, 태일은 딘의 옆에 서서 소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으… 아…….”

프랑켄의 말에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눈을 끔뻑거린다.

“앗, 위험해!”

휘청이며 아예 넘어지려는 소녀를 라비가 가까스로 붙잡았다.

소녀는 팔다리를 풍선 인형처럼 버둥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꼬마야,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 아아아?!”

소녀는 아무리 봐도 자신의 상황에 잔뜩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태일은 그런 소녀를 지켜보다가 가만히 물었다.

“괜찮은 거냐, 저거?”

“…몰라, 나도.”

딘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어찌 되었든 죽지 않고 깨어났잖아. 그럼 성공이지, 뭐.”

“하긴, 넌 그런 놈이었지.”

“내가 뭘?”

“넌 AS가 뭔지도 모르는 놈이잖아.”

알렉세이 딘은 자신이 만든 무기를 두고 사용자의 필요에 맞춰 개조하거나 수리해 주는 경우가 없었다.

“그런 건 덜떨어진 물건을 만들어 낸 멍청이들이나 해 주는 거지.”

“…….”

“내가 만드는 건 늘 완벽해.”

“퍽도.”

그 와중에 소녀는 마구 발버둥 치며 라비를 밀어내더니, 아예 땅바닥에 제대로 엎어져 버렸다.

그러고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곧이어 펑펑 울어 대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앙!!”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태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완벽한 거 맞아?”

“저 애는 내가 아니라 녹스의 결과물이야.”

“…….”

* * *

치료실 안.

장 영감은 아예 딘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팔로 단단히 붙잡아 두고 있었다.

“저 로봇 말일세, 음식을 운반하는 저 녀석. 자동으로 움직이는 건가?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운행 기록 센서의 일종인 건가?”

“영감님, 그런 허접한 장치와 비교하지 마세요. 이 녀석은 실시간으로 지형의 변화를 눈치채고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서빙할 수 있도록 자이로 센서가 부착되어서…….”

딘은 장 영감의 끝없는 호기심에 답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캡슐에서 깨어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큰 문제는 없어요.”

이네사는 녹스의 몸을 진단한 뒤, 안심한 듯 대답했다.

“다만, 근육이 많이 굳어 있고, 뼈나 장기가 매우 약해진 상태예요. 영양이 많이 부족해요.”

“난… 약하지 않아.”

처음 깨어난 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녹스는 금세 자신의 몸에 적응했으며, 곧 여러 단어를 구사했다.

“그래요. 하지만 프랑켄, 당신은 조금 더 안정이 필요해요. 새 팔과 다리 근육에 적응하려면 최소한의 재활 과정은 거쳐야 해요.”

“……괜찮은데.”

“장담하건대, 그냥 가면 이전 팔다리처럼 약간의 충격으로도 신경이 끊어져 버릴 거예요.”

프랑켄은 이네사의 엄한 경고에 마지못해 침대에 누워 다시금 팔다리를 단단히 붙잡히고 말았다.

한편, 라비는 눈을 반짝이며 인형과도 같은 녹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헤에, 근데 진짜 예쁘게 생겼다. 정말 사람 맞아?”

붉은 눈동자에 붉은 머리칼, 유리처럼 하얀 피부.

보니 바토리는 산도적 같은 제 오빠, 클라이드와 달리 엄청난 미녀였다. 오죽했으면 동료들이 클라이드에게 ‘이유 있는 시스콤’이라며 놀릴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말을 들은 클라이드는 벌컥 화를 내곤 했다.

녹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볼을 붉혔다.

이제 포트리스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운용하던 녹스는 없다.

포트리스의 관리자이던 녹스는 모든 시설물과 온갖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었으며, 포트리스 내부의 환경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포트리스 공간 전체를 미궁으로 바꾸거나 거대 비공정으로 만들 수 있고, 독가스를 채워 생명체를 절멸시킬 수도 있었다.

즉, 녹스는 포트리스라는 세상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녹스는 홀로그램과 기계들을 다루기는커녕 문조차 저 혼자 열 수 없었다.

포트리스 전체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볼 수 있던 녹스는 당장 라비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태일은 그런 녹스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인간이 된 기분은 어때?”

녹스가 고개를 들어 태일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또렷하게 말했다.

“좋아.”

그렇게 녹스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쿵! 쿵! 쿵!

[외부에서 충격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훼손률 0.01%]

녹스가 인간이 되면서 포트리스는 평범한 건축물이 되어 버렸다.

“당신은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충격음을 듣고 황급히 몸을 일으키던 프랑켄은 이네사의 팔 힘에 눌려 다시 눕고 말았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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