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포트리스의 기억들 (3)
[좋아, 좋아. 아아, 들립니까, 선수들?]
녹스의 들뜬 목소리가 훈련장 전체를 메웠다.
원형 필드 안에 들어선 페이진은 믿기지 않는 듯 자신의 몸을 살폈다.
주먹을 쥐었다 펴고, 어깨를 움직여 본다.
팽팽한 근육의 감각, 줄곧 그를 괴롭혀 온 등 뒤의 통증까지.
‘믿기지 않는군.’
분명 바로 뒤, 캡슐 안에 자신의 몸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경기장 안의 몸체가 느끼는 모든 감각은 의심할 여지없이 ‘진짜’였다.
텅 빈 경기장 반대편, 민호가 말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필드 전체에 녹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드를 좀 바꿔 볼까?]
쿠구구구…….
텅 비어 있던 필드 전체가 흔들리면서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방에 구조물들이 줄지어 솟아오른다. 아니, 정확히는 건축물이 실시간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건물뿐이 아니었다.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담배꽁초, 휴지조각, 술병들까지… 현실인지 가상인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의 모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황량한 느낌의 길거리, 제대로 닫히지 않는 창문들, 불 꺼진 네온사인 간판, 망가진 문짝.
문 앞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의자와 버려진 담배꽁초까지.
당장에라도 취객이나 술집 여자들이 나와 흐느적거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곧이어 뿌연 안개가 드리워졌다.
[어때? 나름 거리의 모습을 재현해 봤는데.]
철컥.
리볼버를 꺼내 든 페이진은 거리의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미 상상을 불허하는 오버테크놀로지를 경험했기에 갑자기 마을 하나가 솟아났어도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작 페이진을 당황하게 한 것은 필드에 구현된 거리의 구조였다.
평생 수천, 아니, 수십만 번은 걸은 바로 그 거리.
길의 구조와 사거리로 향하는 길가, 건축물 배치.
그 모든 게 페이진에게는 너무도 익숙했다.
녹스가 구현해 낸 필드는 틀림없이 50구역 환락가 거리였다.
‘실제와는 미묘하게 달라.’
4층 규모의 주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다 무너져 가는 2층 건축물이, 3층 규모 도박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다.
페이진이 기억하는 환락가에 비해 건축물들은 비루하고 촌스럽다.
‘이건 마치…….’
환락가의 수십 년 전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대체 이 모습을 49구역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녹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이 결투에서 승리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페이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바로 그 순간, 녹스의 목소리가 필드 전체에 울렸다.
[시작해 볼까?]
타탁!
필드 전체에 불이 꺼지고 어둠이 내린다.
네온사인도, 햇볕도 없는 가운데, 완벽한 어둠이 내린다.
평소 환락가에 밤이 내리면 네온사인의 불빛이 태양을 대신한다.
결코 불빛이 사라지지 않는 거리, 그게 바로 환락가였다.
그러나 해가 진 뒤에도 네온사인의 불빛까지 사라지는 날이 1년 중 딱 하루 있다.
“그래, 제법 비슷하군.”
비릿하게 웃으며 천천히 거리를 걷는다.
환락가는 1년에 단 하루, 영업을 완전히 멈춘다.
센트럴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국가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전 대륙을 손에 넣은 날, 8월 29일.
그날 하루만큼은 대륙 전체가 침묵하며, 해가 지고 난 뒤에도 불을 밝히지 않는다. 평범한 시민들은 집 밖으로 아예 나오지 않으며, 메타휴먼들조차도 노동을 멈춘다.
승전기념일은 종전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피가 흐른 날이기도 했다.
‘결투에 이보다 어울리는 배경은 없지.’
승전기념일의 환락가.
페이진은 12년 전 그날, 처음으로 살인을 경험했다.
철컥!
리볼버를 꺼내 들고 장전을 마친 페이진은 눈동자를 빛내며 천천히 구조물 사이의 골목길을 걸었다.
8월 29일, 그날 그 누구도 불을 밝히지 않는 이유.
그날 하루 사이 벌어진 일체의 범죄에 대해 센트럴은 결코 심판하지 않는다. 살인조차도.
“어이, 쥐새끼! 들리나?!”
페이진의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시끄럽군.”
페이진의 고함 소리를 들은 민호가 조용히 중얼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키릭.
소총을 내려놓고 조준경에 눈에 가져다 댄다.
3층 높이 건물의 지붕에 자리 잡은 민호는 조준경을 통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가운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민호 역시 환락가에서 나고 자랐다. 어둠의 의미를, 8월 29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범죄에도 면죄부가 부여되는 그날, 마피아들은 ‘성인식’을 진행한다.
규칙은 단순했다.
― 거리에 나가 다른 조직의 후보생을 살해할 것.
동이 틀 때까지 다른 조직 후보생의 목을 들고 돌아가면 마피아의 조직원으로 인정받는다.
성인식이란 곧 처음으로 허가받은 ‘살인’을 의미한다.
12년 전 8월 29일, 페노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민호 역시 칼 한 자루를 받은 채 거리로 내던져졌다.
그날 민호 역시 첫 살인을 경험했다.
필드의 배경은 그런 민호의 기억을 되살렸다.
녹스는 민호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다. 모두가 떠나 버린 사막에서 홀로 방치된 녹스는 제 나름의 방법으로 민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응해 주지.”
기꺼이.
* * *
8월 29일.
고아원 아이들 중 누군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또 누군가는 그날을 두려워한다.
열다섯 살이 넘으면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이 고아원 밖으로 내몰렸다.
내몰린 아이들에게는 단 한 자루의 칼만 주어졌다.
언뜻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적인 사냥이었다.
몸집이 크거나 호기로운 아이는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살해해 ‘성인’이 되고자 하며, 반대로 몸이 약하고 겁이 많은 아이는 어딘가에 숨어 벌벌 떨며 밤을 보낸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아이는 겁에 질린 아이를 먹이 삼아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강자가 약자를 사냥한다. 그저 그뿐이었다.
12년 전 8월 29일, 그날도 같았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이들은 겁에 질린 채 숨을 곳을 찾아다녔고, 마피아가 될 준비를 마친 아이들은 먹잇감을 찾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극소수이지만, 그 와중에 다른 선택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지붕 위의 소년이 그랬다.
“다들 꼭 붙어 있어. 떨어지지 말고.”
“형…….”
“으, 이게 무슨 냄새야!”
“막내, 너, 오줌 쌌니?”
“칼은 어디다 버렸어?”
“쉿! 울지 마, 막내야.”
소년의 옆에는 어린 동생들이 함께였다.
지붕 위에 고아원 동생들을 모았고, 자신이 직접 경계를 섰다.
마피아가 되고 싶은 아이들의 눈을 피해 동생들을 보호했다.
벌써 5년째였다.
소년은 5년 동안 이렇게 자신 또래의 아이들을, 동생들을 보호하며 살아남았다.
그사이, 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일부는 마피아가 되어 양복을 입었다.
하지만 소년이 약자들을 보호한 덕에 소년이 머무르는 고아원의 생존율은 단연코 높았다.
“첫째 형, 괜찮겠어?”
일곱째가 소년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고아원 아이들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저 들어온 순서대로 첫째, 둘째, 셋째… 그렇게 이름을 붙인다. 그러다 앞선 아이가 죽거나 마피아가 되면 뒷번호의 아이가 앞선 번호를 물려받는다. 다섯째는 넷째로, 여섯째는 다섯째로 바뀐다.
스무 살을 맞은 소년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첫째’였다.
“막내가 많이 힘들어하지? 네가 잘 좀 돌봐 줘.”
소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일곱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17세의 일곱째는 지난 2년간 첫째 덕분에 살아남았다. 일곱째는 마피아가 되기 위해 거리에 사냥꾼으로 나선 형제들과 달리 첫째를 돕고 있었다.
그러나 일곱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니, 그 얘기가 아니야. 형은… 괜찮겠어?”
“…….”
“다 알고 있어. 형한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잖아.”
첫째는 5년째 그 끔찍한 사냥터에서 그 누구도 살해하지 않은 채 동생들을 지켜 왔다.
성인이 되어 조직에 들어가거나, 살해당하거나.
단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어진 성인식에서 첫째는 동생들을 보호하며 끈덕지게 버텼고, 5년이 지났다.
20세. 그때껏 첫째는 기어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사실상 초유의 사태였다.
페노제의 장로인 고아원장 입장에서 첫째의 존재는 눈엣가시였다.
그 어느 고아원보다 생존률이 높지만, 반대로 그만큼 마피아로 승급하는 아이들도 적다. 즉, 실적이 뒤처진다.
하지만 원장은 결코 첫째를 폐기할 수 없었다.
첫째는 5년간 동생들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사실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첫째는 약자들의 무리라 얕보며 달려든 타 조직 유망주들을 모조리 제압했고, 이미 다른 조직 아이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퍼져 첫째를 피해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원장도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원장은 첫째를 따로 방에 불러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조용히 말했다.
“이번 성인식에서는 적의 목을 들고 오거나, 아예 돌아오지 말거라.”
죽기 직전까지 패 보기도 했고, 굶기기도 했으며, 어르고 달래기도 했다. 자질이 아까웠기에 어떻게든 첫째를 페노제의 마피아로 만들려 했다.
첫째는 분명 페노제의 간부 자리에 오르고도 남을 녀석이다.
그러나 첫째는 끝까지 원장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20세가 된 첫째는 이제 고아원을 나가야 했다. 고아원을 나가는 방법은 마피아가 되거나 시체가 되는 방법뿐이다.
원장의 마지막 통보에 첫째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날, 닫힌 원장실 문 뒤에는 일곱째가 있었다.
“형, 가서 싸워. 동생들은 내가 보호할게. 형은 가서… 조직에 들어가. 형은 할 수 있잖아.”
“…….”
첫째는 환락가의 어느 술집 여자에게서 태어났다. 여자는 아비 모를 아기를 고아원 앞에 버렸다. 사실 환락가에서는 꽤나 흔한 일이었다.
고아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첫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 사실을 첫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첫째는 단 한순간도 사람을 죽이는 마피아를 꿈꾼 적이 없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형!”
“올해는 특히 조심해야 해.”
첫째는 입술을 깨문 채 지붕 아래쪽을 노려보았다.
최근 환락가에 소문이 돌았다. 이번 성인식에 나올 아이들 중 각 조직의 기대주들이 끼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환락가에서 ‘기대주’란 어린 나이에 미쳐 버린 놈들을 지칭한다.
“이번에는 유난히 돌아 버린 녀석들이 많다고 하니까 조심을…….”
“어이!!”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첫째는 일곱째를 비롯한 동생들을 돌아보며 눈짓으로 주의를 준 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붕 아래, 대로에서 웬 소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페노제의 첫째! 나와라!!”
“…….”
정확하게 첫째를 지명해 찾고 있다.
어둠 속에서는 사냥꾼도, 사냥감도 섣불리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지붕 아래 있는 소년은 아니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찾아오기를 바라는 듯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 나오면 재미없을 거다! 어?!”
어둠 속의 대로에 선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사, 살려 줘! 아, 아파!”
소년에게 붙잡혀 버둥거리고 있는 아이.
“혀, 형! 제발, 제발 살려 줘!”
“작아! 더 크게 소리 질러! 그래야 놈한테 들릴 거 아냐!”
퍽!
잔혹하게 웃으며 칼로 붙잡은 아이의 허벅지를 찌른다.
“아아아악!!”
그 목소리를 들은 동생들은 겁에 질린 채 벌벌 떨었다.
“다, 다섯째 형!”
줄곧 의연하던 일곱째마저 흙빛이 된 얼굴로 첫째를 바라보았다.
“형…….”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잠시 내려갔다 올게.”
일곱째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첫째의 표정은 담담했다.
작년에 첫째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뒤, 이번에야말로 마피아가 되겠다고 나간 다섯째다. 그런 동생이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저렇게 고문을 당해 다리를 못쓰게 되어 버린다면, 살아남는다 해도 폐기된다.
“다녀올게.”
첫째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고 있는 일곱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동생들 잘 지키고 있어.”
“조심해, 형.”
“금방 끝날 거야.”
“…응.”
지옥이 시작되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