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65화 (66/220)

65화 붉은 눈의 기계병단 (2)

셸터.

카츠미의 할아버지이자 카게구미의 전 당주였던 우에스기를 살해한 배후.

― 전대 당주 살해의 배후, 셸터를 처단하라.

당주가 된 후 첫 명령을 내린 날 밤, 카츠미는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집무실에 앉은 채 물었다.

“‘셸터’라는 조직, 어떤 집단이죠?”

“그런 조직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자켄의 대답이 들려왔다.

가면을 쓴 자켄의 말투는 냉철한 무사의 것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분명 회담에서 셸터를 배후로 지목했을 텐데요?”

“신태일, 그 남자가 전쟁을 막기 위해 만든 명분입니다.”

자켄은 셸터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도 셸터를 적으로 알렸다.

처음부터 복수는 명분에 불과했다.

아직 어린 카츠미가 당주의 자리에 앉은 지금, 카게구미에게 필요한 것은 내부 결속과 조직의 안정이었고, 셸터라는 적의 등장은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자켄은 물론, 천중회에서도 태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중회의 웨이창 역시 장단을 맞춰 주었다.

피비린내 나는 확장보다 안전한 현상 유지, 예측 불가능한 전쟁보다는 예측 가능한 내부 조직 관리를 선택한 것이다.

“셸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웨이창은 내부 숙청을 시작할 겁니다.”

적의 등장으로 인해 지도자에게 권력이 집중된다.

그런 점에서 ‘셸터’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충분히 유용했다.

“당주님께서도 이번 기회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

그렇게 카게구미는 우에스기의 죽음을 사실상 덮었다.

그러나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 다케다가 단번에 경호 무사들과 우에스기까지 베어 버리게 만든 비약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

― 누가 다케다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에게 비약을 제공했는가.

― 사건의 배후에 과연 누가 있는가.

― 셸터는 정말 존재하는 조직인가.

얼마 뒤, 대장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바로 해소되지 않은 의혹이었다.

규명되지 않은 죽음은 필요에 따라 이용당했다.

그 와중에 카츠미는 몇 번씩이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던 날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 * *

딘의 입에서 ‘셸터’라는 이름을 들은 카츠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셸터는 당신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 꾸며낸 조직 아니었나?”

카츠미의 시선이 태일에게 향했다.

태일은 카츠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

“난 거짓말을 한 적 없어.”

셸터는 실존한다.

셸터가 당주를, 할어버지를 살해했다.

카츠미는 셸터를 배후로 지목했지만, 카츠미 자신부터도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테러를 일으킨 주범은 할아버지의 부하인 다케다였어. 내가 직접 봤어. 다케다가 샬롯의 잔당들을 데리고…….”

다케다는 10년 넘게 할아버님이 거둬 키운 무사였다. 늘 소심하고 조용하던 남자다. 남의 앞에 나서는 일이 좀처럼 없고, 사소한 농담에도 쉽게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런 사내가 과연 테러범들의 우두머리였을까?

아니. 말이 되지 않는다.

카츠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억지로 무시했을 뿐이다.

태일은 카츠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카츠미를 가만히 응시했다.

“진실이 중요한가?”

진실을 보려 하지 않은 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태일의 물음에 카츠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주,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에요.”

자켄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진실에 대한 외면의 대가로 지켜 낸 평화는 일시적이었다. 결국 반란을 마주했으며, 천중회와의 격돌도 피할 수 없었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진실에 대한 외면은 결국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나는…….”

“당주, 지금 중요한 건 셸터의 정체 따위가 아니야.”

페이진이 낮은 목소리로 충고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모두가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었다.

50구역을 구하기 위해 49구역을 빠져나갈 수단이 필요하고, 알렉세이 딘에게는 그 수단을 제공할 능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셸터가 테러의 배후로 밝혀진다 한들 카츠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 정체불명의 요새에서 알렉세이 딘을 향해 검을 겨누는 것은 미친 짓일 뿐이다.

“50구역을 위해서라도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그러나 카츠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

그래야 비로소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알렉세이 딘.”

입술을 깨문 채 고민하던 카츠미는 딘을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셸터의 대장인가요?”

카츠미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던 딘은 다소 당황한 듯 보였다.

딘 역시 카츠미와 페이진, 프랑켄, 태일의 반응을 보며 ‘셸터’라는 이름이 갖는 파급력을 뒤늦게 체감했던 것이다.

“저기…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난…….”

쾅!!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요새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삐삐삐삐삐삐삐!!

요란한 경보음이 포트리스 전체에서 울려 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쾅!! 쨍그랑!

다시 한 차례의 거센 진동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던 로봇이 옆으로 기울며 찻잔을 모조리 깨 먹었다.

상황을 전파하는 방송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요새에 대한 공격이 감지되었습니다. 실드 파손율 5.42%…….]

[근방에 5Level 이상의 소울이 포착되었습니다…….]

[녹스 멤브레인 시스템에 파손이 발생했습니다. 복구 중…….]

실드의 파손, 고레벨 소울의 포착.

페이진과 카츠미는 알림의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했지만, 태일은 상황을 파악한 듯 재빨리 원탁 한가운데를 응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녹스, 바깥 상황을 띄워!”

“무슨……!”

녹스를 부르는 목소리에 프랑켄이 의아해하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녹스는 권한을 가진 극소수 외에 컨트롤할 수 없다.

[영상 전송…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3, 2, 1… 완료.]

이제 막 정리를 마친 원탁 한가운데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홀로그램은 포트리스 근방을 미니어처처럼 보여 주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태일의 명령에 따라 시스템이 동작하자 프랑켄은 깜짝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태일에게는 이런 상황이 더없이 익숙했다. 재빨리 포트리스 주변에 몰려든 이들의 모습을 살핀다.

펑크라이더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무장과 규모, 게다가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나름 대형을 갖춘 모습은 제법 위협적이었다.

“…용병들이군.”

카츠미와 페이진에게 살해당한 라이더들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최소 수백은 되어 보이는 용병들이 모여 있었다.

쾅!!

요새가 마구 흔들리는 가운데, 카츠미와 페이진은 제각기 무기를 꺼내 들고 원탁 위의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할 수 있는 놈은 몇 안 될 텐데…….”

페이진이 포트리스 근처에 몰려 있는 용병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이를 악물었다.

용병단은 장비와 실력 등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마피아 조직에 비해 우위에 있었다. 용병단에 따라 실력의 편차 또한 매우 심했다.

한편, 셸터에 대한 의혹을 잠시 접어 둔 카츠미는 냉정을 되찾은 듯 페이진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아는 녀석들인가?”

“용병 몇 놈과 같이 움직였다고 해서 놈들을 전부 아는 건 아냐.”

“…….”

문득 카츠미 쪽으로 고개를 돌린 페이진은 뜨끔한 듯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카츠미의 눈에 노골적인 불만이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 몰라? 모르면 다야? 내가 널 왜 데려왔을까?

‘눈으로 욕한다는 게 이런 건가…….’

페이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부산히 눈동자를 굴렸다.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갈 곳 모르던 페이진의 시선이 알렉세이 딘에게 닿았다.

“이봐, 딘이라고 했던가?! 당신이 여기 주인이잖아!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민망함에 애써 화살을 돌린 것이지만, 실제로 딘의 행동은 어딘가 이상했다. 계속되는 진동 속에서 정작 요새의 주인은 딘은 눈을 감은 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다.

쾅!

그 순간, 네 번째 충격파가 이어졌다.

“하, 할아범?! 어째서…….”

줄곧 조용하던 라비가 원탁에 매달려 홀로그램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라비의 시선이 홀로그램 속 뚱뚱한 노인, 장 영감에게 고정되었다.

용병들의 총구들은 이미 장 영감을 향해 있었다.

“아, 안 돼! 멈춰, 이 개새끼들아!!”

라비는 주먹으로 원탁을 마구 쳐 대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바깥쪽에 들릴 리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라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날, 날 여기서 내보내 줘! 빨리!!”

멤브레인을 다시 열고 라비를 원래의 차원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딘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입술을 깨문 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라비는 품에 숨겨 둔 단검을 꼬나 잡은 채 원탁 위에 올라 딘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라비의 팔을 붙잡았다.

“뭐, 뭐야?!”

라비가 자신을 붙잡은 이에게 칼을 휘두르는 찰나, 태일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해라.”

곧이어 라비의 귓가에 회중시계의 태엽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소리와 함께 라비의 시야가 비틀렸다.

* * *

“과연…. 여기인가?”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백련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상태였다.

“정말 오랫동안 찾아다녔구나. 정말… 길었어.”

언뜻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과했지만, 틀림없이 미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번 균열이 일어난 소울의 흐름에는 일종의 상흔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 백련이 발견한 상흔은 너무나도 작고 사소하기에 꼼꼼히 살피지 않는다면 찾아내기 힘든 수준이었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요새가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는 증언이 없었다면, 결코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균열을 만들고, 이를 다시 복구한 기술자의 능력은 그만큼 엄청난 수준이었다.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가, 감사합니다!”

몽키는 술에 취해 널브러진 상태로 자신이 본 장면들을 모두 보고한 참이었다.

갑자기 요새가 나타났고, 잠시 뒤 라비와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광경이기에 자신의 증언이 거짓말로 몰리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백련의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몽키는 이마를 땅에 찧어 대며 고개를 조아렸다.

백련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고생이 많았구나.”

물론 방금의 감탄사는 몽키에게 한 말이 아니지만, 백련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 저, 저는 오로지 교주님을 위해……!”

몽키는 당황한 나머지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넌 지금… 취해 있구나.”

“그, 그게…….”

몽키의 몸에는 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깜짝 놀란 몽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덜덜 몸을 떨었다.

“우리의 성지를 되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라는 교단의 지시를 들었을 테지. 그런데도 너희는… 술을 입에 댔구나.”

백련의 말투는 여전히 평온했다.

“죄,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펑크라이더에게 있어 술과 마약은 일상과도 같다. 약탈과 전투, 살인으로 점철된 그들의 삶에서 피로감과 공포, 죄책감을 덜어 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기에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넌 나의 물음에 충실히 답해 주었다. 그러니 난 네게 기회를 주려 한다.”

백련의 얼굴에 조용히 미소가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

“떠나거라.”

“…네?”

“3분이면 충분할 것 같구나. 클론터.”

백련의 말이 끝남과 함께 저격용 소총을 든 용병이 유령처럼 소리 없이 앞으로 나섰다.

“예에?”

백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몽키가 멍청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백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클론터라 불린 용병은 묵묵히 저격용 소총의 탄실을 확인했다.

“교, 교주님…….”

“10초 지났다.”

클론터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백련이 주는 ‘기회’의 의미를 깨달은 몽키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에 선 용병 중 몇몇은 그 장면이 그저 재미있는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히, 히이이익!!”

몽키는 절뚝거리며 자신이 타던 바이크 앞으로 다가가 힘겹게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철컥!

그 와중에 클론터는 이미 격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줄곧 몽키의 옆에 죽은 듯 엎드려 있던 폴의 무리와 장 영감의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련은 회색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이 발견한 소울의 균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땅의 합당한 주인이 찾아왔으니…….”

조용히 읊조린 백련이 천천히 앞으로 오른팔을 뻗었다.

곧이어 백련의 손끝에서부터 하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개가 피어올라 뿌옇게 변해 버린 공간, 그 공간 속에 미세한 틈새가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스스스…….

안개가 틈새 속을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간이 점차 넓게 벌어진다.

용병들은 경이롭다는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편, 슬쩍 고개를 들어 공간의 틈새를 엿본 장 영감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 저런……!”

다른 용병들은 몰라도 장 영감은 그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백련은 멤브레인, 즉 차원의 껍데기에 구멍을 내고 있었다. 가설로 여겨지던 것을 실제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이다.

장 영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느새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어, 어이, 영감! 뭐 해?!”

옆에 엎드려 있던 폴이 깜짝 놀라 팔을 잡아당겼지만, 장 영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차원의 틈을 바라보았다.

약 3분이 지났을 무렵, 백련이 나머지 왼팔을 들어 올렸다.

백련의 왼팔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왼팔에서 뿜어진 흑색 연기는 빠른 속도로 압축되면서 끈끈하게 뭉쳤고, 곧이어 거대한 화살의 형상을 갖췄다.

그리고…….

탕!!

백련의 머리 위에 형성된 검은 화살이 차원의 틈으로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클론터의 총구가 불을 내뿜었다.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던 몽키의 몸뚱어리가 땅바닥에 힘없이 내팽개쳐졌다.

“멈춰!!”

장 영감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백련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