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62화 (63/220)

62화 포트리스의 사막여우 (3)

“이봐, 신태일 씨.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보지?”

알렉세이 딘이라면 태일을 그렇게 부를 리 없다.

“…….”

태일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틀림없이 태일이 기억하는 그 얼굴, 그 말투다. 개구쟁이 같은 모습과 가벼운 말투는 영락없는 알렉세이 딘의 것이었다.

“넌…….”

그러나 태일이 눈앞에 선 남자의 눈동자는 그의 머리처럼 붉은색이었다.

“너는 알렉세이 딘이 아니군.”

태일이 기억하는 알렉세이 딘의 눈동자는 에메랄드를 닮은 푸른색이다.

딘의 모습을 한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알렉세이 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이네?”

“넌 대체 누구지?”

“실은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과연 누구인지 말이야.”

“…….”

“하지만 지금껏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무래도 내가 바로 알렉세이 딘인 것 같아.”

남자는 너무도 가볍게 대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유전자가 98.8% 일치하거든.”

태일은 스스로를 알렉세이 딘이라 말하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1.2%가 다르다는 뜻 아닌가?”

“오차 범위 안이지, 뭐.”

남자의 뻔뻔한 태도 덕분에 태일은 모처럼 딘과 대화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딘이 아니다.

“대화 중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군요.”

프랑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새 근방으로 미세한 막이 둘러쳐진 가운데, 수많은 바이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해골 문양을 곳곳에 새겨 넣은 펑크라이더들이었다.

가슴팍, 팔, 얼굴 등에 새겨 넣은 해골 문양, 흉측한 피어싱과 귀걸이 등… 놈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딘은 펑크라이더들의 흉측한 모습에 어지간히 질렸는지 혀를 찼다.

“대체 뭐야, 저놈들은? 설마 여길 노리는 건가?”

그러나 태일은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태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무슨 걱정이야?”

펑크라이더의 숫자는 언뜻 보아도 태일이 상대한 이들의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포트리스를 발견하지도, 들어오지도 못할 것이다.

“녹스(Nox)가 있잖아.”

당장 카츠미와 페이진만 해도 그들의 바로 뒤에 있는 태일과 포트리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페이진의 다리와 G―7의 차체가 겹쳐 있지만, 물리적으로 닿지 않았고, 마치 영상물처럼 통과되어 보였다.

아마 둘의 시점에서는 태일과 프랑켄, 심지어 차까지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보일 것이다.

포트리스 주변에 둘러진 역장, 녹스는 완벽하게 공간을 분리시킨다. 정확히는 차원을 달리한 아공간[Subspace]에 특정 범위를 통째로 집어넣어 버리는 기술이었다.

즉, 지금 카츠미와 페이진은 태일과 완전히 다른 공간에 있는 셈이었다.

“뭐야, 녹스를 알아?”

딘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태일이 모를 수 없는 기술이었다.

“딘이 알려 준 거야.”

딘이 이 기적적인 기술을 구현해 냈을 때, 그는 가장 먼저 태일에게 연락해 호들갑을 떨었다.

이후에도 술만 마시면 녹스에 대해 밤새도록 떠들어 대곤 했다. 그만큼 딘의 자부심과도 같은 기술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녹스에 대해 알려 줬다고?”

“당신이 정말 알렉세이 딘이라면 말이야.”

딘은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공간 사이의 틈을 기어코 열어젖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거대 요새 포트리스를 욱여넣는 데 성공했다.

그 엄청난 성공담을 열심히 떠들어 댔기에 태일은 그 원리를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재미있네. 내가 그 정도로 당신과 친한 사이였다는 거지?”

딘은 생각보다 훨씬 입이 가벼운 남자였다. 그러나 태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주변에 몰려든 라이더들을 바라보았다.

한편, 딘은 태일을 유심히 살피다가 곧 머스킷에 시선이 멈추었다.

“AL―13도 내가 준 거야?”

딘을 자칭한 남자는 태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딘이 만든 장비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었다.

“아니. 잘못된 녀석의 손에 들려 있길래 내가 직접 회수했지.”

알렉세이 딘은 꽤 까다로운 장인이었다. 장비를 사용할 사람의 자격을 꽤 꼼꼼하게 따졌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거액을 제시해도 제작을 거절했다.

애당초 센트럴의 유명 기술자인 그가 혁명군에 합류한 이유 역시 센트럴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제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받아, 딘.”

태일은 빼앗은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머스킷을 남자에게 건넸다.

더불어 남자를 딘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알렉세이 딘의 지식이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자격이 있었다.

“뇌가 그대로 있고, 신체가 바뀐다면, 그건 과연 나일까?”

딘은 가끔 헛소리를 하곤 했다.

“만약 내 지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그건 곧 나야.”

보통은 기억과 감정, 성격 따위를 정체성으로 삼지만, 딘에게는 ‘지식’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의의였다.

즉, 딘의 정의에 따르면, 눈앞의 남자는 알렉세이 딘이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논리였지만, 알렉세이 딘이라는 남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그렇게 규정지었고, 태일은 그것을 존중했다.

AL―13을 받아 든 딘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혹시 이 두 사람, 당신과 친해? 그러니까… 나와도 친구 사이였나?”

그의 손가락은 페이진과 카츠미를 가리키고 있었다. 녹스 바깥의 두 사람은 펑크라이더들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저 둘은 마피아입니다.”

딘의 물음에 대답한 이는 태일이 아닌 프랑켄이었다.

“마피아?! 범죄 조직 말이야?”

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일은 그런 딘을 보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렉세이 딘은 한때 전 대륙에서 단 네 명뿐인 1급 수배자였다. 심지어 태일보다도 높은 현상금을 자랑했다. 그런 인간이 고작 마피아를 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러는 동안 페이진과 카츠미를 포위한 펑크라이더들은 어지럽게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놈들, 우리를 추적해 온 모양입니다.”

프랑켄의 말에 태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뭐야? 포트리스가 아니라 당신들을 노리는 거였어?”

“오면서 녀석들과 마주치긴 했는데… 아무래도 원한을 산 모양입니다.”

“프랑켄, 그럼 저놈들을 네가 끌고 왔단 말이야?”

“꼬리가 붙은 줄은 몰랐습니다.”

딘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여유롭게 담배를 입에 문 태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태연하네? 저 마피아들, 동료 아냐?”

“잘못 개입하면 펑크라이더 놈들한테 여기 위치가 노출될 수 있는데, 괜찮겠어?”

그러자 딘이 가소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흥, 저 녀석들이 운 좋게 여기에 발을 들인다 해도 이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뭐, 들어온다 해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살아 나갈 순 없겠지만.”

자신만만한 모습은 영락없이 알렉세이 딘이었다.

사실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포트리스에는 녹스를 비롯해 온갖 방호 장비들이 갖춰져 있다. 구식 장비로 무장한 펑크라이더 따위는 포트리스 안에 들어오는 순간,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놈들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트리스의 위치를 숨기는 것은 그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했다.

포트리스는 태일에게도 중요한 장소였으니까.

곧이어 전투가 시작되었다.

페이진은 양손에 권총을 꺼내 든 상태였고, 카츠미는 검과 리볼버를 각각 양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 둘을 향해 라이더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

태일과 딘, 프랑켄 주변에 다른 차원의 광경이 실시간으로 펼쳐졌다.

녹스의 아공간에서는 본래의 차원과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저 얇은 공간의 틈새를 이용해 다른 차원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비명 소리는 물론, 총의 격발음도 들리지 않고, 피의 냄새 역시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투 현장은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총구가 불을 뿜으며 순식간에 라이더들의 숨통이 끊어진다.

페이진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거리를 벌렸고, 쌍권총을 이용해 순식간에 열댓 명을 제압했다.

반면, 카츠미는 놈들을 향해 돌격해 간격을 줄인 뒤, 베어 넘겼다. 그 와중에 칼이 얕게 들어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놈들의 이마에는 기어코 총알을 박아 넣었다.

페이진과 카츠미의 움직임에 놀란 라이더 몇이 급하게 핸들을 돌렸고, 그 바람이 몇 대의 바이크가 저희끼리 뒤엉켜 전복되어 버렸다. 겁에 질린 라이더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전투에 정신을 빼앗긴 페이진과 카츠미는 달아나는 놈들까지도 추격해 확실히 목숨을 끊었다.

고작 몇 분 사이에 전투의 양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딘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건… 사냥이잖아.”

전투는 금세 막바지에 다다랐다.

피가 낭자한 광경 앞에서 딘과 프랑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봐, 딘.”

태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딘은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건……!”

태일의 손에 들린 물건, 그것은 다름 아닌 회중시계였다.

“아까 나한테 물어본 거 말인데…….”

태일이 물고 있던 빈 담배를 던져 버리며 조용히 말했다.

“저 둘은 내 친구도, 동료도 아니야.”

태일은 혁명이 실패하던 날, 친구와 동료들을 전부 잃었다.

째깍째깍…….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가 부산스럽게 들려온다.

* * *

카츠미는 처음부터 선하거나 정의로운 쪽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애당초 카츠미가 속한 조직, 카게구미는 약자를 멸시하고 병탄하며 성장해 왔다.

카츠미 역시 그런 카게구미의 후계자로 키워지면서 늘 힘을 추구했다.

“사, 살려…… 컥!”

카츠미는 전투가 시작된 뒤, 말없이 펑크라이더들을 차근차근 죽여 나갔다.

애원하는 놈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

“도망쳐!! 커어억!”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놈의 목을 검으로 벤다.

“제발, 제발!!”

바이크에서 떨어져 전투 의지를 잃은 채 바닥을 기는 놈들까지도 끝까지 쫓아가 확실히 숨통을 끊었다.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환락가는 결국 저런 놈들이 있기 때문에 존속할 수 있는 거야.”

태일의 말이 맞았다.

‘미쳐 버린 세계에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자는 애당초 살아남을 수 없어.’

카츠미는 암흑가의 보스였고, 마피아 무리를 이끌고 있다.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무법자들의 보스가 될 수 없다.

카츠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휘두르고, 방아쇠를 당겼다.

수십 명을 목숨을 거두며, 그사이 온몸은 피로 젖었다.

멀미로 울렁거리던 머릿속은 도리어 맑아졌고, 흔들리던 시야는 또렷해졌다.

아드레날린이 치솟아 오른 듯 몸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무아지경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 콧물 흘리며 발악하던 놈의 가슴팍에 검을 꽂아 넣은 바로 그 순간.

“당주.”

페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났어. 이제 남은 건 한 놈뿐이야.”

페이진은 무리의 가장 뒤쪽에 있던 펑크라이더의 리더를 붙잡은 상태였다.

아니, 리더는 스스로 항복했다. 자신의 손으로 총을 버린 리더는 카츠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졌어. 제발… 살려 줘.”

카츠미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이를 내려다보았다.

“너, 여자구나.”

그 험상궂은 녀석들을 이끌던 리더는 의외로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이름이 뭐지?”

“라비… 라비 애슈턴.”

성(姓)을 가지고 있다. 49구역 떠돌이 출신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카츠미는 탄환이 떨어진 리볼버를 던져 버린 뒤, 양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당주, 잠깐!”

카츠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챈 페이진이 카츠미를 말렸다.

“이 애에게는 꽤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페이진.”

카츠미가 말을 끊은 뒤, 고개를 돌려 페이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지옥 속에서 여자가 리더로 살아남는 방법이 뭘까?”

당주로 추대된 직후, 자켄은 카츠미에게 일러 주었다.

“여자의 몸으로 당주가 되고자 한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에요.”

“강한 남자에게 의지하거나, 그 어떤 남자보다도 강해지거나.”

바로 그 순간, 라비는 주머니에 숨겨 둔 검을 꺼내 들어 카츠미에게 달려들었다.

“죽어!!”

“이런……!”

페이진이 입술을 깨물며 총을 겨누었다.

라비의 단검이 허공에 호를 그린다. 그러나 그 칼날이 카츠미의 몸을 베지는 못했다.

카츠미의 몸은 이미 뒤로 반 보가량 물러선 상태였다.

라비의 눈빛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카츠미의 대응은 신속했다.

단련되지 않은 라비의 움직임에 비해 페이진의 총과 카츠미의 검은 훨씬 빨랐다.

탕!!

총성이 울렸다.

챙그랑!

동시에 날붙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셋의 격돌에서 그 누구도 쓰러지지 않았다.

대신 격돌의 한가운데, 담담한 표정의 장발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싸움은 끝났어.”

태일의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페이진의 총구는 하늘을 향해 있고, 라비의 단검과 카츠미의 칼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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