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54화 (55/220)

54화 열차는 멈춰 서고 (2)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았지만, 50구역에는 없는 게 확실해요.”

자켄은 이미 지난 2주간 카게구미의 단원들을 풀어 곳곳을 뒤졌다. 제인을 찾기 위해 제법 큰 액수의 상금까지 걸었지만, 그녀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행이죠, 지금의 50구역을 생각하면. 도망치는 게 현명한 행동이에요.”

“도망?”

그럴 리가. 납치라면 또 모를까.

태일은 제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피아 전쟁을 막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여자다. 그런 제인이 전쟁 직전에 자기 발로 순순히 50구역을 빠져나갔을 리 없다.

“열차를 탔겠군.”

50구역을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낡디낡은 증기기관차.

강필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전산망에서 별다른 정보는 찾지 못했어. 하지만 애당초 그 전산망이라는 것도 딱히 신뢰할 수는 없어. 그날, 열차 암표상들이 워낙 기승을 부렸으니까.”

마피아 간 전쟁이 터지고 의원들이 살해당한 당일, 그 누구보다 발 빠르게 행동한 이들은 다름 아닌 암표상이었다. 그들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열차표를 사들이기 시작했고, 50구역을 떠나는 아침 열차의 표 값은 자그마치 평소 가격의 수백 배를 호가했다.

무차별적 테러로 인해 겁에 질린 손님들은 거품 낀 표의 가격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허겁지겁 구매했다.

물론 암표상들은 신분이 불분명한 노숙자나 실종자의 신분을 이용했기 때문에 전산망에 뜨는 이름들은 하나같이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들이었다.

“방법이 없다는 거군.”

“…더 찾아봐야지.”

강필이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사실 태일보다 더욱 열심히 제인을 찾은 이는 강필이었다.

요한의 상관인 강필에게는 그의 죽음을 제인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다.

“열차를 탔다면, 설사 위치를 안다 해도 당장 찾는 건 불가능하겠지.”

태일이 팔짱을 낀 채 주점 내 빈 자리에 걸터앉았다.

제인은 세연과의 몇 안 되는 연결 고리였다. 더구나 제인과 나름의 계약을 맺기까지 했다. 그런 제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켄은 그런 태일의 심정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꽤 있는 집안의 따님 아닌가요? 호들갑스러운 부모님이 귀하신 따님을 빼낸 모양이죠.”

자켄은 제인과 예술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있기에 그녀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

그러나 태일은 자켄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제인은 이미 몇 차례나 목숨을 잃을 뻔했다.

첫 번째는 샬롯에 의해, 두 번째는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서.

열차 테러를 일으켜 딸을 붙잡아 두려 할 정도이니, 민감한 사건 직전에 딸을 납치하는 것 정도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이 얘기는 그쯤 해 두지.”

태일이 짜증 섞인 눈으로 두 불청객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제인의 소식을 전달해 주기 위해 이곳에 왔을 리는 없다.

자켄과 강필은 50구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자켄은 50구역의 마피아들을 모조리 굴복시켰고, 강필은 LAPD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공권력, 그 자체가 되었다. 사실상 자켄과 강필, 두 사람 덕분에 그나마 50구역의 혼란이 억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바쁘신 양반들이 대체 왜들 이래?”

둘은 최근 들어 시도 때도 없이 레미제라블을 찾아와 아르바이트생들을 괴롭혔다.

레미제라블은 마음을 터놓고 위로받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지만, 위험천만한 50구역의 잔혹사를 공유하기에 적당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강필과 자켄은 비밀스럽고도 위험한 이야기를 아예 들으라는 듯 지껄였고, 하나같이 도영과 지은이 완전히 질려 버릴 정도의 주제들이었다.

카게구미 대장의 첩에 대한 이야기, LAPD 내부의 권력 암투에 대한 이야기, 반란 사건 이후 배신자들의 사후 처리에 대한 이야기…….

알아서 좋을 게 하나 없는 정보들이었다.

덕분에 태일이 둘을 피해 바를 찾아올 때면 도영과 지은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태일의 옷소매를 붙잡곤 했다.

당장 바깥으로 말이 새어 나가면 밤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니, 둘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결국 태일은 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당신이 날 피하니까.”

“그러게요. 제가 설마 태일 씨를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뻔뻔한 둘의 반응에 태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나한테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헛수고야. 난 그저 평범한 술집 주인일 뿐이란 말이야.”

태일은 이쪽 세계의 일에 지나치게 깊이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다. 아니, 방주를 본 이후에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개입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평범? 누가? 당신이?”

“소름 끼치는 농담이네요. 몇 명만 더 평범했으면 50구역 따위 전부 박살 났겠는데?”

“…진심이야.”

태일은 자신의 그릇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한때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뛰어난 지휘관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태일은 실패했다.

의원들의 별장으로 전락해 버린 방주를 찾은 날, 태일은 자신의 처참한 패배를 다시금 떠올려야 했다. 저항군의 실패는 내부자들의 배신에 의한 것이었고, 태일의 혁명군 역시 같은 이유로 무너져 내렸다.

“너야말로 진짜 지휘관이야.”

세연이 지휘관의 시계, ‘X―7’을 넘겨주며 태일에게 한 말이다.

지휘관이란 무엇인가.

지휘관은 조직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태일은 조직을 파멸로 이끈 이상주의자였다. 그 결과, 동료들에게 배신당했다.

지휘관은 책임을 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태일은 실패를 경험한 뒤, 꼬리를 말고 숨어 버렸다. 같은 실패를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태일은 나약했다.

결국 세연은 틀렸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태일은 다시 나설 생각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저 세연을…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여긴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더는 날 찾아오지 마.”

태일의 차가운 반응에 강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책임하군.”

“…….”

“그저 조용히 숨어 살고 싶은 모양이지만… 신태일,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야.”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군.”

태일이 강필을 노려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글쎄, 당신이 겁쟁이라는 것만큼은 알지.”

“잠깐. 난 그저 얘기나 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자켄이 예의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격앙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뭐, 나도 딱히 싸우러 온 게 아니야. 여기 술이 꽤 맛있기도 하고.”

강필 역시 언뜻 내비친 감정을 숨긴 채 잔을 만지작거렸다.

태일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도무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지은아, 오늘은 이만 퇴근해.”

“…예?”

본격적인 근무는 사실 해가 막 지려는 지금부터다.

“오늘 밤은 길어질 거 같아서 말이야. 가게 문 닫는다, 오늘은.”

“하, 하지만…….”

“오늘 일당은 안 깔 테니까, 문 닫고 빨리 퇴근해.”

“넵!”

지은은 태일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세라 황급히 행주를 내려놓고 쪼르르 사라졌다.

그렇게 지은이 사라진 뒤, 태일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냉장고를 열었다.

일단 얼음물 한 잔으로 목을 축였다.

살얼음 낀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머리의 열이 좀 식는다.

태일은 어느새 웃음기 없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필과 자켄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

“어디 한번 하고 싶은 얘기 전부 해 보지. 밤은 길 테니까.”

무거운 분위기에서 시작한 데 비해 강필과 자켄의 말투는 한없이 담담했다.

지난 2주간 50구역 주민들은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들을 부정당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었다고 생각한 사업장도, 자유도 사실은 센트럴이 주는 사료에 불과했다.

센트럴은 언제든 50구역을 고사시킬 수 있었고, 그건 그들에게 있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봉쇄 조치만으로도 50구역의 경제는 괴멸적 피해를 입었고, 그것은 자생적인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조직의 원로급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미리부터 그 사실을 알고 중재하던 각 조직의 보스들은 전부 사라졌다.

“지금 내부에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어요. 당주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운 뒤, 센트럴 앞에 무릎을 꿇자는 입장과…….”

꼬리를 흔들고 다리 사이를 기어가자는 입장.

“…레지스탕스와 손을 잡고 센트럴에 맞서 보자는 입장이죠.”

저항의 불꽃을 들어 올려 맞서자는 입장.

자켄의 주먹이 살짝 떨렸다.

“…….”

어느 쪽이 더 쉽고 더 간단한 길인가.

“당연히 전자 쪽 의견이 압도적이에요.”

힘이야말로 모든 것이라 여기며 무모하게 일을 저지른 마피아들조차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비겁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오로지 저 때문이죠.”

자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필사적으로 카츠미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카츠미를 제거한 뒤, 센트럴에 항복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켄부터 쓰러뜨려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50구역에 자켄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마피아 끄나풀들이 감히 내게 선을 대려 하더군.”

강필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항복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켄을 쓰러뜨리기 위해 선봉에 설 사람으로 강필을 떠올렸다. LAPD 서장에게 보스의 목을 쳐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들의 상황은 다급했다.

물론 지금 자켄의 앞에서 이 얘기가 나온 건, 일을 꾸민 놈들이 자켄의 손에 모조리 끝장났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

강필의 말이 맞았다.

50구역 주민들의 생각과 달리 센트럴에서는 카츠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이번 일을 벌인 아크 텔로스가 노린 쪽은 의회 의원들이었다. 더 정확히는 50구역의 혼란이었다.

결국 아크 텔로스는 남의 손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고, 50구역을 박살 내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카츠미는 겉보기에 이번 사태에 가장 큰 이득을 누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드림코퍼레이션에게 휘둘린 천중회 마피아들과 배신자들의 공세를 간신히 막아 낸 것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50구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카츠미를 꽁꽁 묶어 보낸다 해도 별 의미는 없었다. 카츠미를 법정에 세울 뿐, 지금의 봉쇄를 풀어 주진 않을 것이다.

카츠미에게 집중된 적대감은 합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저 지금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마녀사냥일 뿐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아는 이는 당시 방주에 있던 태일과 도영을 포함해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강필과 자켄 역시 나름의 추론으로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다.

“카게구미 보스 한 명으로 해결될 일이었으면, 애당초 봉쇄 같은 조치를 내릴 필요까지도 없었어.”

센트럴 정부는 마피아 보스 따위 단번에 암살해 버릴 정도의 히트맨 조직을 비공식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마피아 보스 한 명을 잡고자 했다면, 굳이 의회를 움직일 필요 없이 암살조를 투입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가만히 듣고 있던 태일이 다소 비딱하게 물었다.

그제야 자켄이 본론을 꺼냈다.

“Z―rail과 인연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

앨리스와 지우는 여전히 자켄의 보호 아래 있었다. 그리고 둘은 제인이 Z―rail 사장에 의해 격리될 당시 함께였다.

“Z―rail을 찾아가서 열차 운행 재개를 설득해 줘요.”

“애당초 이번 봉쇄는 Z―rail 사장 개인의 판단일 리 없어. 게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내 인맥이 아니라…….”

“제인 브레드필드의 인맥이겠지.”

강필이 태일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 이상의 영향력을 이용할 수 있는 인물이 있을 텐데?”

“…….”

아크의 남매이자 드림코퍼레이션의 이사, ‘카렌 탈로스’. 그녀는 마피아들 간의 전쟁이 터지던 날, 레미제라블을 찾아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떠나지 않은 채 제인의 방에 눌러앉은 상태였다.

드림코퍼레이션은 Z―rail의 대주주이고, 따라서 카렌의 발언력은 막강할 것이다.

심지어 대륙 최고의 기업인 만큼 의회에서의 발언력 역시 작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태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안 돼.”

자켄과 강필은 알지 못했지만, 50구역 봉쇄를 주도한 자가 바로 아크였다.

50구역을 끝장내려 하는 주체가 바로 드림코퍼레이션이다.

자켄과 강필은 한동안 말없이 태일을 바라보았다.

둘은 태일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며 무언가 각오한 듯 보였다.

자켄이 다리를 꼬며 빈 잔으로 시선을 돌린다.

“선택을 미룰 수는 없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죠.”

자켄의 눈앞에 있는 선택지는 ‘카츠미의 숙청’과 ‘센츠럴에 대한 반란’, 두 가지였다.

그리고 자켄은 이미 선택했다.

“카게구미는… 아니, 마피아는 레지스탕스와 손을 잡고 센트럴에 저항할 거예요. 그 시작은 Z―rail 습격과 열차 탈취가 되겠죠. 지금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건 유통망이니까.”

자켄의 폭탄 발언에 태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그만큼 위험한 작전이었다.

바로 옆에서 반란을 입에 담는 와중에 LAPD 서장인 강필은 아무 말도 없었다.

즉, 이미 협의가 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협박인가?”

“일단은 블러핑이야.”

강필이 대꾸한다.

마피아의 반란 선언은 이른바 벼랑 끝 전략이었다. 센트럴 의회는 결국 정치 조직이다. 50구역을 상대로 지나친 희생을 달가워할 리 없었다.

반란 선언은 그 자체로 센트럴의 태도 전향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만약 설득에 실패한다면 블러핑이 아니라 진짜 반란이 되겠지.”

강필의 말은 비겁했다.

“…신태일, 네가 나서 줘야겠어.”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는 다름 아닌 강필이었다.

강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관이군.”

태일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경찰과 마피아가 손잡고 술집 주인을 겁박하다니.”

요약하자면, 이런 얘기였다.

― 네가 가서 Z―rail을 설득해라. 실패하면 전쟁이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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