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열차는 멈춰 서고 (1)
해가 질 무렵의 레미제라블.
보통 이즈음 바텐더는 실내를 청소하고, 창고를 정리한다.
하지만 바텐더 지은은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바짝 얼어있었다.
바를 차지하고 앉은 두 명의 손님 때문이었다.
둘은 벌써 바에 들어온 지 수시간이 지났건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조직들이 전쟁을 피해 온 건, 사거리에서 무기를 들지 않은 건 평화를 존중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자켄이 칵테일 한 모금을 부드럽게 넘긴 뒤, 말을 잇는다.
짙은 화장에 붉은 드레스.
그녀는 마치 센트럴의 귀부인처럼 매혹적이었고, 40대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젊어 보였다.
자켄의 정체를 몰랐던 지은은 처음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한동안 넋이 나가 눈을 떼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자켄의 아름다운 모습 뒤편에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도륙하는 검사의 모습이 숨어 있었다.
한때 ‘히나코’라는 이름을 쓰며 기괴한 옷가게를 운영하던 여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칼잡이 ‘자켄’으로 복귀했고, 50구역 무법자 중 최강자로 군림했다.
“…마피아들끼리 싸워 봐야 그 끝은 파멸이죠. 더구나 환락가에서의 싸움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자켄은 모처럼 긴장이 풀린 듯 취기가 살짝 오른 상태로 마피아들의 사정에 대해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자켄의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강필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재밌네. 마피아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다니 말이야.”
“어머, 경찰 아저씨 눈에는 우리가 싸움만 아는 멍청이로 보였을까?”
자켄이 눈웃음치며 바라보자, 강필은 무안한 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뭐, 이 거리에서 살아가려면 힘이 필요하긴 하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마피아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만, 조직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마피아 조직들의 자금줄은 바로 환락가였다.
힘을 과시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 자금줄을 부술 경우, 결국 마피아들은 공멸한다.
때문에 천중회, 페노제, 카게구미는 중립 조직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서로를 견제하고 싸움을 피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평화 속에서 환락가는 성장해 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은 조직을 향해 손가락질하겠죠. 무법자라느니, 불한당이라느니. 하지만 우리들이 있었기 때문에 50구역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던 거예요.”
50구역 주민 중 상당수는 타 구역에서 밀려난 약자들이다. 돈도, 집도, 심지어 가족도 잃은 자들은 자포자기한 채 50구역으로 밀려 들어온다.
그리고 마피아들은 그런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강필이 코웃음을 치며 잔을 내려놓는다.
“어처구니없는 정당화군.”
“현실이죠.”
“그 잘난 마피아 조직이 무슨 사업들을 하셨더라?”
마피아 조직은 일반적인 기업과 다르다. 마피아들이 제공하는 일자리라고 해 봐야 대부분은 정상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싸움질, 몸을 파는 일, 마약 거래 따위를 정상적인 일자리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마피아 조직들은 약자들을 끌어모아 그들의 몫을 갈취하고 빼앗았다. 힘을 가진 그들은 구석에 몰린 이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LAPD 서장으로 부임한 강필은 그런 마피아들을 혐오할 수밖에 없었다.
“무법자 집단 주제에 되도 않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군그래. 정말 웃지 못할 얘기야.”
“후후… 경찰 아저씨,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 우리도 손님이 있으니까 사업을 벌이는 거예요. 마피아 조직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는 센트럴과 캐피탈 클럽에서 암묵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이에요.”
“퍽도.”
강필은 자켄의 지적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센트럴이 마음만 먹는다면 마피아 조직 정도는 언제든 없애 버릴 수 있다.
오버테크놀로지로 역사 시대를 끝낸 자들이 마피아 조직 따위를 겁낼 이유는 없었다.
캐피탈 클럽의 사업가들 역시 마피아 조직을 거래 파트너로 인정했다.
마약이나 폭력 등 온갖 불합리한 것들에도 나름의 상품성이 있고, 마피아와의 뒷거래로 기업들은 나름의 이윤을 취할 수 있었다.
결국 마피아들은 자생적인 조직이라기보다 필요에 따라 의도적으로 육성된 단체에 가까웠다.
“그래, 인정해요. 웃긴 얘기죠. 무법자 조직이 법적 테두리 안에서 성장해 온 거예요. 지배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말이에요.”
자켄이 몽롱한 눈빛으로 칵테일 잔을 빙글 돌렸다.
“…한 잔 더.”
자켄의 한마디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지은이 급히 빈 잔을 회수해 갔다.
‘대체 사장님은 언제 오시는 거야?’
강필과 자켄은 지은이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에 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낱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한 지은은 둘의 대화를 듣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지은을 바라보며 빙긋 웃어 보인 자켄이 취기 어린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 갔다.
“어린 녀석들은 조직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어떻게 존속할 수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했죠. 어리석게도.”
“당연한 일 아닌가? 처음부터 그렇게 멍청한 놈들을 긁어모아 만든 조직이잖나.”
강필의 냉소적인 말에 자켄이 흐느적대며 키득거렸다.
“정말 그건 그러네요. 아니, 어쩌면 보스들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마피아는 힘을 중시하는 무력 단체이지만, 동시에 수익을 추구하는 조직이기도 하다. 그 사이의 균형을 유지할 때, 비로소 마피아는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피아는 보수화되었고, 수익 사업에 경도되었다.
간부들은 더 이상 불필요한 싸움을 즐기지 않았다.
페노제의 갑작스러운 붕괴, 인형극단의 등장, SB의 제조 등 온갖 말썽들이 벌어졌지만, 간부들은 ‘소모적인 전투’를 피했다. 사업장을 늘리기 위한 싸움 이외의 경우에는 몸을 움츠렸다. 그들은 이미 무법자라기보다 사업가에 가까웠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희생을 치르는 것보다 가진 것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젊은 조직원들은 ‘겁쟁이처럼 구는’ 보스들의 행태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50구역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결국 무력을 입증해야 하죠. 보스들은 그 간단한 사실을 잊은 거예요.”
“야만적이군.”
“어머나, LAPD는 다른가요?”
“…….”
강필은 놀란 척하는 자켄 앞에서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LAPD의 반란 역시 근본적으로 힘에 경도된 이들이 저지른 참사였다. 경찰이라는 자들이 강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제 동료를, 제 조직을 배반했다.
50구역 LAPD 경찰들은 결국 마피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을 다문 강필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자켄이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가장 밑바닥에서 악을 품고 올라와 힘이 전부라고 여기면서 조직의 칼로 자라온 아이들이에요. 그런데 막상 조직 생활을 해 보니, 자신들의 로망과는 달랐던 거죠.”
젊은 조직원들은 정작 성인이 된 뒤, 자신들을 칼로 키워 온 이들의 나약함에 경멸을 느꼈다.
손익을 계산하고 정치를 일삼는 간부들의 행태는 분명 그들의 기대와 달랐을 것이다.
“마피아 본연의 욕망을 과소평가한 거죠.”
마피아 본연의 욕망, 그것은 곧 힘이다.
폭주해 버린 천중회 마피아들은 그동안의 금기조차 무시한 채 사거리에서 총을 난사했으며, 중립 조직을 궤멸시켰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고, 그중에는 마피아나 용병이 아닌 민간인, 그것도 제법 부유한 손님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당신들에게는 잘된 일 아닌가?”
강필의 물음에 자켄이 말없이 술잔을 응시했다.
“…글쎄요.”
배신한 카게구미 대장들은 자켄의 힘 앞에 굴복했고, 카츠미는 붙잡은 페이진을 이용해 천중회를 흡수 통합했다. 이제 카츠미는 환락가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환락가를 전부 차지했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잿더미만 남았는걸요.”
“…….”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되어 버린 지금, 지배자의 자리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50구역으로 들어오는 열차들 대부분이 멈춰 섰어요.”
사건이 벌어지고 지난 2주 사이, 여객 열차 대부분이 운행을 중단했다.
‘테러를 막기 위한 조치.’
센트럴은 그렇게 발표했다.
대륙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봉쇄되었고, 50구역은 그 직격탄을 맞았다.
“손님은 사라졌고, 주민들은 살길을 잃었죠.”
화물 열차가 몇 차례 들어왔지만, 그조차도 센트럴에 공급할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을 위한 것이었다.
센트럴이 50구역을 봉쇄한 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지만, 효과는 파괴적이었다.
환락가는 물론, 시장까지 사실상 마비되었다.
차량들은 완전히 멈춰 섰고, 식량과 필수품의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마약을 훔쳐 달아나다 붙잡혀 맞아 죽는 마약쟁이들이 하루에 수십 명이고, 카게구미를 욕하다가 들켜 집단 폭행을 당하는 경우는 셀 수조차 없었다.
가족과 친구를 잃은 주민들이 늘어갔다.
수입이 끊어진 주민들은 가게 문을 닫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카게구미 무사들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선에는 증오가 담겼다.
그 시선에 눈이 뒤집힌 카게구미 무사들은 카츠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가감 없이 분노를 표출했다.
카츠미 앞에 무릎을 꿇은 천중회 단원들은 언제 반란을 일으켜도 이상할 게 없는 녀석들이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이래도 우리에게 잘된 일인가요?”
“…….”
그즈음, 지은이 새 잔에 칵테일 ‘블랙러시안’을 담아 조심스럽게 자켄의 앞에 내놓았다.
이름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칵테일에 담긴 의미는 ‘저항’이었다.
“50구역은 이제 최후를 준비해야 할지도 몰라요.”
자켄의 마지막 말에 잔을 내려놓는 지은의 손이 살짝 떨린다.
그러나 강필은 놀라는 기색 없이 술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버림받은 것은 LAPD 역시 마찬가지였다. LAPD 경찰서는 2주째 불이 꺼져 있었다.
내부 반란으로 희생자까지 나왔건만, 센트럴 경찰청에서는 그 어떤 인사 발령이나 제제 조치도 하달되지 않았다.
보고를 보내도 후속 조치에 관한 응답은 없었다.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재 50구역의 치안을 담당할 경찰 병력은 공식적으로 강필과 장량, 단둘뿐이었다. 반란에 실패한 경찰들은 아직 공식적으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지만, 동시에 이미 형벌을 받는 중이었다. 그들은 ‘50구역’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자켄과 강필은 한동안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칵테일만 들이켰다.
한편, 지은은 긴장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특히 자켄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는 순간, 지은의 머릿속은 아예 하얗게 질려 버렸다.
‘내가 어째서 이런 대화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하지만 막상 자켄과 강필이 모두 입을 다물자 긴장감은 도리어 더 커졌다.
등 뒤로 진땀이 흐른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잠시 후, 침묵이 깨졌다.
철컥!
문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레미제라블로 들어온다.
“사, 사장님!!”
잔뜩 긴장한 나머지 숨소리조차 죽인 채 그림자처럼 서 있던 지은이 반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맞춰 자켄과 강필 역시 고개를 돌렸다.
“왔나?”
“…얼굴 보기 정말 어렵네요.”
한편, 바에 앉아 있는 두 진상을 본 태일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레미제라블은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 어떤 비밀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사연에 맞춰 칵테일을 제조해 주는 공간.
세연은 애당초 그런 의도로 레미제라블을 만들었다.
하지만 태일의 레미제라블은 환락가 주민들에게 도무지 인기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 좀 오지?”
“그게 단골한테 할 소리인가요?”
50구역 최강의 마피아.
“그러게 말이야. 지난 2주간 우리가 올린 매상이 얼만지 아나? 서비스는 내놓지 못할망정…….”
50구역 LAPD 서장.
이런 인간들이 들르는 술집에 누가 오고 싶을까.
자켄과 강필은 뻔뻔한 얼굴로 도리어 태일에게 핀잔을 주었다.
“우리 아니면 누구한테 매상을 올리겠어. 안 그래? 우리 없으면 손님도 없으면서 말이야.”
레미제라블에 그나마 찾아오는 이들은 자켄과 카츠미, 강필, 장량 정도였다.
사실상 레미제라블의 매출은 전부 마피아와 LAPD가 올려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신들 때문에 손님이 없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드나?”
“어머, 지금 이렇게 돈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50구역에 몇 없다고요?”
“…….”
하긴 지금의 50구역은 그야말로 유령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불이 꺼질 날 없던 환락가의 중심부마저 황량하게 변할 정도였으니, 50구역의 경제는 완전히 멈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의원들의 죽음과 마비된 LAPD로 인해 손님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졌고, 2주가 지난 현재까지도 길거리의 피 냄새는 여전히 짙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변호사를 찾아다니나?”
“…….”
태일은 여전히 요한의 사망 소식을 제인에게 알려 주지 못했다.
제인은 무수한 피가 흐른 그날 이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