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1)
피의 언덕 정상, 검은 탑.
선글라스를 낀 아크는 가만히 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늘 웃음을 띠던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군가가… 왔군.’
붉은 흙먼지가 불어오는 가운데 검은 탑은 늘 그렇듯 고요했지만, 아크는 탑에서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아크는 탑 앞에 서서 지난 한 달여 기간 동안 50구역에서 날아온 소식들에 대해 생각했다.
‘세 개의 마피아 세력 중 하나인 마로트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마로트는 50구역을 청소하기 위한 도구였다.
두목인 샬롯은 복수를 위해 SB를 남용할 만큼 멍청했고, 그랬기에 아크는 그녀를 지원했다.
샬롯은 과연 SB를 대량생산했고, 심지어 스스로 자신이 만든 약물에 중독되었다.
계획대로라면 SB는 환락가를, 50구역을 완전히 집어삼켰을 것이다.
나아가 센트럴 역시 엄청난 혼란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샬롯은 어느 날 갑자기 살해당했고, SB 제조가 중단되었다.
드림코퍼레이션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즈음, 검은 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철도에서 연달아 테러 사건이 터졌고, 미르파우터 유통이 가로막혔다.’
미르 파우더 유통 건 때문에 경찰청장이 50구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드림코퍼레이션은 막대한 로비 자금만 허비한 채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계획은 애당초 LAPD의 희생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부패한 경찰청장이라 해도 자신의 목이 날아갈 만한 상황을 수용할 리 없었다.
그렇게 드림코퍼레이션이 틈을 보이자, 히트맨, 용병, 레지스탕스 따위의 놈들이 드림코퍼레이션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음지에 숨어 있던 경쟁자들이 놈들의 이빨을 빌어 드림코퍼레이션의 목덜미를 노렸다.
‘마피아 간 전쟁 중 RSB 복용자들에게 카게구미 당주가 암살당했다.’
약 한 달간 드림코퍼레이션의 발이 묶인 사이, 샬롯의 유산을 노린 마피아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 RSB 복용자들이 난입하면서 일은 더 복잡해졌다.
애당초 RSB의 제조법은 샬롯에게조차 알려 주지 않은 비법이었다.
그런 비약을 복용한 테러리스트들이 환락가를 뒤흔들었고, 카게구미의 당주까지 암살해 버렸다.
결과만 보면 고작 마피아 두목의 암살 사건에 불과했지만, 사건의 파급효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사거리 한복판에서 테러가 자행되는 바람에 상류층의 자제 여럿이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RSB 사건으로 인해 드림코퍼레이션은 경찰뿐만 아니라 센트럴 고위층 정치가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의회는 통제 불가능하고 위험천만한 비약의 유통을 바라지 않았다. 자칫 50구역뿐만 아니라 센트럴의 체제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드림코퍼레이션은 SB와 관련된 모든 것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검은 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온 이후,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계속 나타났고, 나비효과처럼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번져 갔다.
하지만 아크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
찻잔 속 태풍은 찻잔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즉, 결말은 정해져 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열심히 발버둥 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지위를 위해서 변화를 거부한다.
이 사소한 발버둥들이 아크에게는 꽤나 즐거운 유희로 느껴졌다.
벌레를 밟아 죽이는 아이의 즐거움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일 것이다.
아크가 그렇게 가만히 검은 탑을 올려다보고 있던 중,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아가씨께서 방금 레미제라블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느새 도착한 양복 차림 메타휴먼이 아크의 뒤에 서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아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님도 참. 감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네요.”
카렌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후계자 경쟁’이라는 구도를 제멋대로 만들어 경쟁심을 불태우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그답지 않게 장난을 치고 싶어지곤 했다.
물론 카렌은 똑똑했다. 정석적인 경영자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변호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다.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센트럴이 무엇인지, 드림코퍼레이션이 어떤 조직인지 그녀는 모른다. 심지어 그녀의 동생인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다른 멍청이들이 그렇듯.
“의원들은?”
“방주에 모여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분 좋은 듯 웃고 있던 아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반응은 어떤가요?”
“별 의심 없이 환락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꽤 즐기는 듯합니다.”
“…어리석군요.”
50구역 의원은 단 다섯 명뿐이다.
그나마도 하원 의석에 불과하기 때문에 센트럴에서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사실상 명분 때문에 만들어진 명예직이지만, 나름 50구역의 대표자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바로 그 대표자들은 관할인 환락가가 무너지는 꼴을 지켜보며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속에서부터 혐오감이 치민다.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해요.”
“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크는 짧게 혀를 찼다.
의회 의원이나 관료는 아크가 가장 싫어하는 종류의 인간들이었다.
역사 시대가 끝난 뒤, 국민국가에 기생하여 살아가던 놈들 상당수는 기어코 살아남았다.
눈치가 빠르고, 처세에 능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손은 선대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제 부모처럼 센트럴에 기생했다.
센트럴이라는 고목은 어느새 그런 벌레들로 인해 안에서부터 곪아 가고 있었다.
이전에 사라진 역사 시대의 국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보다, 오늘 50구역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다 끝났나요?”
“예, 도련님. 페르낭 가문 한 명, 자히드 가문 두 명, 코크 가문 한 명입니다. 그 외에는…….”
“아, 나머지는 필요 없어요.”
아크가 손을 들어 말을 끊자 메타휴먼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 외’로 분류된 이들 역시 꽤나 쟁쟁한 집안의 자제들일 것이다.
무법 지대인 환락가에서 불장난을 즐기려면 최소 B급 이레귤러 이상을 대동해야 했다. 그 정도 수준의 경호원을 고용하려면 50개 구역의 상위 0.01% 이내에 속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크의 관심은 오로지 최상류층의 목줄을 쥔 소수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다.
“의회 쪽 하나에 캐피탈 쪽 셋이군요. 총 네 명이라…….”
센트럴을 구성하는 두개의 축은 센트럴 의회와 캐피탈 클럽이었다.
메타휴먼 역시 아크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특별히 네 사람이 속한 가문의 이름만을 언급했다.
“그 넷과 약속을 잡아 줘요. 아니, 차라리 한 시간 뒤에 동해에서 선상 파티를 열죠. 최대한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방식이 좋겠어요.”
50구역의 바다에는 최상류층이 파티를 벌일 수 있을 정도의 크루즈가 없었다.
애당초 50구역은 그럴 만한 장소가 아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크는 명령을 내렸고…….
“네, 준비하겠습니다.”
정확히 한 시간 뒤에 50구역 동쪽 바다에는 최상급의 크루즈가 준비될 것이다.
아울러 수많은 미녀들과 최고의 쉐프가 함께 준비될 것이다.
메타휴먼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크 님, 코헨 로날드라는 남자가 도련님께 접견을 청해 왔습니다.”
“…누구죠?”
“동부 지부 연구원입니다. 아크 님의 명령에 따라 천중회와 LAPD에…….”
“아아, 기억났어요. 그 사람이군요.”
아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명을 파견했고, 그중 한 명이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저격당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아마 코헨이라는 남자는 살아남은 나머지 한 사람일 것이다.
“꽤나 기특하지만…….”
이렇게 멍청해서야 썩 쓸모는 없을 것이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아요.”
코헨이라는 남자가 만약 자신의 ‘공적’을 떠들고 다닌다면, 자칫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드림코퍼레이션은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의 경계를 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드림코퍼레이션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었다.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메타휴먼은 그 이상의 질문 없이 순순히 명령을 이해했다.
메타휴먼 정도의 상황 판단력만 있었어도 코헨이라는 남자는 목숨을 부지했을 것이다.
아크는 피식 웃으며 다시금 탑을 올려다보았다.
* * *
“제기랄, 어쩌지? 어쩌면 좋지?”
손님 한 명 없는 레미제라블의 바. 바텐더의 복장을 갖춰 입은 이지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신이 놓인 상황을 열심히 부정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저 대학 학비를 벌고 싶어서 아르바이트에 지원했을 뿐이다.
지은은 다른 구역에서 개나 소나 갖고 있는 메타휴먼을 소유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배당금을 받을 수 없었다.
센트럴에서 배당금을 받지 못하는 실업자들을 위해 약간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지만, 학비를 부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메타휴먼이 거의 모든 노동을 대체한 시대에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았고, 지은이 택한 것은 50구역의 아르바이트였다.
그 얘기를 들은 바텐더 도영의 첫 반응은 이랬다.
“너, 또라이구나?”
50구역은 아직까지 메타휴먼을 갖지 못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고용률이 가장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50구역은 전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땅이고, 환락가는 50구역 안에서도 특히 위험한 장소였다.
지은은 그런 곳에 ‘아르바이트’를 구하겠답시고 들어온 것이다.
정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나름 지은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소울 능력자로군.”
사장님은 놀랍게도 지은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짧게 통보했다.
“합격.”
“예? 사장님, 뭐라구요?”
도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사장님을 바라보았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지은은 그렇게 쉽게 취직에 성공했다.
일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손님도 별로 없고, 칵테일의 제조도 꽤 재미있었다.
바텐더 도영과 사장님 역시 조금 독특한 성격이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았다.
50구역에 이처럼 순박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몇 시간 전, 지은은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지은은 칵테일 재료를 정리하기 위해 바 뒤쪽, 새로 지은 창고로 가던 참이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여전히 없니?”
창고 안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도둑인가 싶었지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화장실을 간다며 사라진 도영의 것이었다.
“미안, 형. 난 그만 빠지고 싶어. 그냥 이곳에 바텐더로 남을 생각이야.”
남자는 도영에게 더 이상 복귀를 권유하지 않았고, 그저 무겁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정말 미안해. 동지들이 나에게 손가락질한다 해도 할 말은 없어. 린치를 하겠다면… 받아들일게.”
‘린치’라는 단어를 들은 지은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마피아나 히트맨이라면 몰라도 평범한 민간인이 쓸 법한 단어는 결코 아니었다.
그제야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은은 급히 뒷걸음질 치며 창고에서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대화는 다시금 지은의 발을 붙잡았다.
“오늘 의원들이 모일 거야.”
“…뭐?”
도영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의원들이라면 설마…….”
바텐더로 남고 싶다고 말한 아까와 달리 도영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그래. 그 매국노들이 모인다는 첩보를 입수했어.”
“…….”
침묵은 길었다.
도영이 다시금 대답했다.
“나도 낄게.”
“바텐더로 남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 복수를 위해 레지스탕스에 들어갔어.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놈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봤지. 사실… 포기하려고 했어.”
몰래 엿듣던 지은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레지스탕스’, 역사 시대로의 회귀를 노리는 복고주의자.
도영과 남자는 지금 그 테러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자식이 나타났다면… 나 혼자라도 갈 거야. 반드시.”
도영은 마음을 굳힌 듯 대꾸했다.
“놈들은 어디로 모이지?”
“…‘방주’.”
거기까지 들은 지은은 반쯤 넋이 나간 채 황급히 바로 돌아왔다.
몇 분 뒤, 바로 돌아온 도영은 급한 일이 생겼다며 가게를 나갔고, 지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지만, 그 얼굴에는 비장함과 분노가 새겨져 있던 것이다.
잠시 뒤, 도영이 가게를 나간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엄청난 폭발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깥의 소음은 곧 잦아들었다.
그러나 지은은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마피아 역시 불법 행위를 일삼지만, 암묵적으로 LAPD와 유착 관계였고, 공식적으로는 사업가였다.
그러나 레지스탕스는 달랐다. 그들은 정체를 숨긴 지하 세력이자, 하나같이 높은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들이었다. 연좌제마저 적용되었기 때문에 조직원이 붙잡히면 그 일가친척은 물론, 친구들까지 몰살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지금껏 지은은 그렇게 위험천만한 남자와 함께 있던 것이다.
“아, 아으으으…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더니만!”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지은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쩌지? 사장님에게 얘기해야 하나?’
과연 사장이 몰랐을까?
지은이 이레귤러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본 남자였다.
사장이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지은은 여전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사장까지 레지스탕스의 일원일지도 몰랐다.
‘도망칠까?’
지은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채 머리를 쥐어짜고 있던 찰나, 갑자기 바의 문이 열렸다.
“어, 어서 오세요!”
지은은 고민에 빠져 있던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인사하며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손님의 모습을 본 지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여기가 레미제라블 맞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는데…….”
레지스탕스에 대한 고민 따위, 이미 지은의 머릿속에 없었다.
그저 눈앞의 존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5위, 세계 여성 리더 100인 중 1위, 올해 가장 인기 있는 여성 5회 연속 선정, 함께 일해 보고 싶은 리더 1위…….
그녀를 칭하는 수식어는 셀 수 없이 많다.
“카, 카카카카… 카렌… 님?!”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러 버린 지은의 다리가 위태롭게 후들거렸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