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소울 웨폰 (1)
꿈을 꾸는 듯한 무아지경.
그 속에서 부드럽게 그려 낸 단 하나의 선.
카츠미는 그 순간에 도취되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시간이 정지하고, 공간이 멈춰 버린 그 순간은 마치 영원과도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카츠미는 바람 속에 섞여 있는 비릿한 혈향에 가만히 눈을 떴다.
자신의 몸은 어째서인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고, 심지어 검마저 놓친 상태였다.
누군가에게 던져진 듯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통증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쿨럭쿨럭!”
눈을 뜬 카츠미는 고양감과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극검(剋劍).
모든 무사가 꿈꾸는 그 경지에 잠깐이지만 발을 디딘 것이다.
먼지 속에서 연신 기침을 쏟아 낸 카츠미는 습관처럼 가신을 찾았다.
“코우, 내가 드디어…….”
하지만 카츠미는 자신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피에 젖은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었다.
손에 쥐어진 검과 찢어진 옷자락.
낯이 익다.
“코…우?”
조금 전까지 차오르던 희열과 흥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면서 공포가 밀려왔다.
“아니야, 그럴 리가…….”
카츠미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시신 앞으로 기어갔다.
꿈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꿈.
“그래, 내가 극검을 펼쳤을 리 없잖아. 코우, 네가… 네가 죽었을 리가…….”
무수한 총탄이 몸을 꿰뚫어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지만, 그 처참한 시신이 코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즈카, 셴, 모리, 준이치, 무카이… 그리고 코우.
그리고 그제야 현실을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곁을 지키던 무사들이 모두 죽었다.
극검을 휘두른 기억도, 그 직전에 부하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까지도 전부 현실이었다.
“아, 아아…….”
이젠 검을 들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다.
주변의 어떤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코우의 시신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끝났고, 그녀를 당주라 불러 줄 이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카츠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총알이 날아들까? 도끼가 날아들까?
다가올 죽음 앞에서 카츠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가만히 눈을 감는다.
그때, 너무나도 차분하고 익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요.”
차갑고도 엄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검을 드세요, 당주.”
하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부드러움과 온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고 시선을 들어 올린다.
“자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은 대장들 중 남은 하나, 자켄이 눈앞에 있었다.
사방에서 요란한 사격음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켄이 지원군을 데려온 것만큼은 확실했다.
“당주, 잘 버텼습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자켄은 가만히 무릎을 굽힌 뒤, 카츠미와 시선을 맞추었다.
자켄의 얼굴에는 안도감과 더불어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자켄, 나는…….”
카츠미 역시 자켄이 검귀라 불릴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카츠미의 곁에는 그녀 외에 아군이 없었다. 대장들이 모두 등을 돌렸고, 끝까지 곁을 지킨 호위 무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아무리 자켄이라 해도 그녀가 데리고 있는 병력이 많지 않다는 것은 카츠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켄 혼자서 지금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자켄을 보는 순간, 카츠미는 한 가지 대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실패했어요.”
애써 의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카츠미의 말을 들은 자켄이 놀란 듯 미간을 좁혔다.
“당주, 대체 지금 무슨…….”
쾅!!
자켄의 등 뒤에서 눈부신 빛과 함께 영문 모를 굉음이 들려온다. 그 때문에 자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변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다급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자켄, 부탁이 있어요.”
“…….”
자켄은 뒤쪽의 소요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카츠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 이건 당주로서의 명령이에요, 자켄.”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할아버님이 지켜 온 카게구미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당주의 자리를 자켄에게 넘기는 방법이었다.
“카게구미를 책임져 줘요.”
“대체 지금 무슨……!”
그녀라면, 그녀의 명성이라면 다시 카게구미의 부하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
카츠미는 배신한 대장들 중에도 자켄을 따르는 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카츠미를 무시하던 대장들도 자켄의 앞이라면 기꺼이 고개를 숙일 것이다.
애당초 살아 있는 전설인 자켄이야말로 당주에 더욱 적합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켄이 카게구미를 온전히 계승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자켄, 내 목을 베세요.”
카츠미가 죽어야 한다.
당주로 인정받지 못한 카츠미가 살아 있는 한, 대장들은 카게구미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켄이 카츠미의 목을 손수 벤다면, 정당하게 카게구미의 권한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배신한 대장들에게 돌아올 명분도 줄 수 있다.
“…….”
자켄은 카츠미의 명령을 듣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켄, 부탁해요. 난… 이제 지쳤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뒤, 자켄이 가만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카츠미는 자켄이 자신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무기를 빼 든 것이라 생각했다.
단검일까? 아니면 권총?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자켄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본 카츠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켄?”
자켄의 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여우 가면이었다.
* * *
절름발이 무사의 희생으로 인해 조금 지연되기 했지만, 수부티는 분명 임무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카츠미의 숨통을 끊어 놓기만 하면, 의뢰는 늘 그랬듯 성공으로 끝날 터였다.
의뢰 과정에서 부하 하나를 잃었지만, 수임료를 생각하면 그리 큰 손실은 아니었다.
어차피 용병이란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다.
그저 용병단장으로서 그의 복수를 해 주면 그뿐.
그렇게 수부티가 의뢰와 복수를 한꺼번에 완수하려는 순간, 굉음과 함께 푸른빛이 시야를 덮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귓가에 묘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정체 모를 쇳조각들이 날아들었다.
“뭐, 뭐야!!”
“으아아악!!”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시야가 차단된 가운데, 수부티는 가만히 감각을 집중했다.
황야에서도 흙먼지로 인해 시야가 제한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부티를 비롯한 용병 다섯은 날아드는 쇳조각을 침착하게 쳐 냈다.
그러나 천중회 마피아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채 허둥댈 뿐이었다.
“사, 살려 줘!!”
“제, 젠장! 으아아악!”
눈먼 총알 몇 발이 발사되었고, 피 냄새가 점차 짙어졌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난 뒤, 비로소 주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사이, 전장에는 세 사람이 난입해 있었다.
푸른 전류를 온몸에 두른 장발의 남자.
공중에 살짝 뜬 채 쇳조각들을 염동력으로 다루는 검은 코트의 남자.
카츠미를 향해 다가가 고개를 숙인 붉은 옷차림의 여검사.
수부티의 뒤쪽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끄으으윽…….”
“다, 다리가!”
카츠미를 없애기 위해 모인 천중회 마피아 대부분은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상황을 진정시켜야 할 페이진은 넋이 나간 채 창백해진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부티의 부하들이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내지 않았더라면, 페이진 역시 순식간에 당해 버렸을 것이다.
‘…한심한 자식.’
페이진의 한심한 꼬락서니를 본 수부티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애당초 기대가 없기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수부티가 환락가에 들어와서 만난 마피아란 놈들은 근본적으로 약해 빠진 버러지들이었다.
양복을 빼 입고 잘난 척 거들먹거리지만, ‘진짜 전투’ 앞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놈들이었다.
하긴 지금 이 순간, 환락가의 마피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은 정말 기묘한 날이군.”
손에 쥔 머스킷을 고쳐 잡았다.
“너는 누구지?”
푸른 전류를 휘감은 남자.
수부티는 놈을 본 순간,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어째서 너 정도 되는 남자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수부티의 온몸은 긴장감으로 인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이런 환락가에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던 감정이다.
한편, 태일 역시 선두에 선 수부티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수부티가 손에 쥔 머스킷을 바라보고 있었다.
틀림없다.
알렉세이 딘의 머스킷, 모델명 ‘AL―13’.
단 열세 정뿐인 모델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전투에 난입하기 직전, 태일은 전투에서 보랏빛과 함께 사방에 날아드는 총탄들을 똑똑히 보았다.
그런 능력을 가진 무기가 AL―13 외에 달리 있을 리 없었다.
“그 머스킷, 어디서 얻었지?”
경찰 신분증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이던 강필이 태일의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그러나 태일은 막무가내였다.
“말해. 그 머스킷, 어디서 얻었어?”
차분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당혹감과 조바심이 섞여 있었다.
그런 태일의 반응을 지켜보던 수부티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군. 이 무기가 탐이라도 나는 건가?”
“알렉세이 딘… 그 새끼가 만든 거냐?”
갑자기 수부티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거짓말처럼 지워지면서 차갑게 굳었다.
수부티가 다시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태일의 입장에서는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정신 나간 무기 장인이자 태일과 더불어 이전 세계에서 1급 수배자였던 남자, ‘알렉세이 딘’.
심지어 그는 무기 제작자 주제에 혁명가 대장인 태일보다도 높은 현상금을 자랑했다.
이쪽 세계에 그가 있다.
세연 외에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의 흔적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파츠츠츠츠츠―
순간, 태일의 온몸에서 엄청난 양의 전류가 실체화되어 푸른빛을 내뿜었다.
수부티 역시 가만히 머스킷을 치켜올렸다. 그와 동시에 머스킷을 든 수부티의 온몸에서 붉은 핏빛의 안개가 떠올랐다.
“알렉세이를 아는 놈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결코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는 태도였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딘은 이쪽 세계에서도 온갖 놈들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태일은 살기를 풀풀 뿜어 대는 수부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딘, 이번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AL―13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물리적인 총알도, 장전도 필요치 않았다.
머스킷의 탄은 사용자의 소울이고, 철저하게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조종 가능했다.
소울 강도가 높을수록 머스킷에 투입되는 소울의 색은 점점 더 붉게 변한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수부티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격돌이 시작되려는 찰나,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강필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태일, 난 여기 싸움을 부추기러 온 게 아니라 막으러 온 거다.”
태일은 그런 강필을 황당하다는 듯 돌아보았다.
“싸움을 부추긴 게 과연 누구지?”
강필은 쇳조각들로 마피아의 팔다리를 못쓰게 만들어 강제로 ‘무장해제’시켰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싸움을 막으러 왔다고 지껄이는 강필 역시 제정신인 인간은 아니었다.
당장 수부티의 뒤에 선 용병들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강필을 노려보고 있다.
“어쨌든 더 이상 무의미한 싸움은 안 돼.”
바로 그때, 수부티가 뒤쪽에 선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난 저 번개 놈을 상대한다. 너희들은 가서 임무를 완수해.”
한편, 수비티의 뒤쪽에서 페이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래! 카츠미, 저년부터 없애! 저년을 없애는 게 가장 중요해!”
다섯 명의 용병은 이미 카츠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마다 무기를 꺼내 들고는 카츠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감히!”
어느새 여우 가면을 쓴 자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몰려드는 용병을 향해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지금 카츠미를 향해 달려드는 용병들은 마피아나 B급 용병들과 수준이 달랐다.
‘전부 능력자군.’
자켄 혼자서는 어려울 것이다.
“…젠장.”
결국 이 싸움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강필은 기껏 찾아낸 경찰 신분증을 던져 버린 뒤, 카츠미를 지키기 위해 내달렸다.
“신태일, 지지 마라!”
그 와중에 그답지 않은 응원 한마디를 남겼다.
“너무 날뛰지 말고! 시말서 쓰는 것도 일이야!”
기어코 사족을 남기는 강필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