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명예를 잊은 자들 (3)
“…엉망이군.”
강필은 차를 멈춰 세운 채 조수석 앞의 열린 수납함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찾겠다며 태일이 열어 둔 수납함에는 성인 잡지, 먹다 만 햄버거, 땀에 찌든 경찰모 따위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 텅 빈 담뱃갑도 보였다. 태일이 그 안에 있던 담배들을 빼 간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빈 상자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엉망인 경찰차 수납함의 모습을 보고도 딱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그 지저분한 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기구한 처지가 새삼 와닿았다.
“넌 사냥개야, 이 새끼야. 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어!”
“괴물 같은 새끼, 넌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지?”
가만히 주머니 속 구슬들을 전부 꺼내 손에 쥐었다.
지금껏 간부들에게 강필은 사냥개였고, 괴물이었다.
수많은 범죄자를 잡아다 바치는 사냥개, 주제도 모르고 거침없이 개기는 괴물.
그렇게 밑바닥에서 구른 결과가 50구역 발령이었다.
센트럴 의회에서 이루어진 결의, 캐피탈 클럽에 의한 LAPD 붕괴.
50구역의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간부들이 그린 그림 속에서 강필은 그저 버리는 패였다.
‘무법자들에게 살해당하거나, 50구역과 함께 사라지거나.’
빠각!
‘결론. 50구역에서 살아 돌아오지 마라.’
손에 쥐고 있던 구슬들이 큰 소리를 내며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렇게 부서진 구슬 조각들이 천천히 허공에 떠올랐다.
소울 능력자들의 삶은 대개 평탄하지 못했다.
부자나 기업체의 경호원이 되어 비싼 연봉을 받는 게 가장 잘 풀린 경우고, 대개는 숨어 살았다. 운 나쁘게 용병들에게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불법 랩(Lab)의 실험체로 팔려 버리는 것이다.
군이나 경찰 같은 국가기관에서 능력자를 채용하는 일도 있지만, 결국 대부분은 조직 내 차별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처음의 사명감 따위 금세 잊어버린 채 어딘가의 경호원으로 채용될 기회만 노리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 배지를 반납한 뒤, 마피아나 반정부 단체에 고용되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능력자 중 서장 자리까지 오른 이는 강필이 유일했다.
‘오늘이 마지막 작전일지도 모르겠군.’
철컥!
강필은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온 첫날부터 암살당할 뻔했고,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내부에서 반란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는 최소 100여 구의 시체가 널려 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경찰로서의 커리어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아야 했다.
입맛이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강필은 경찰이다.
한편, 가게를 포위하고 있던 마피아와 용병들이 표정을 굳힌 채 차에서 내린 강필을 노려보았다.
“뭐야, 저거?”
“LAPD?”
그 와중에 확성기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삐이이익!!
[아아! 들리나?]
강필은 어느새 차에서 들고 나온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경고한다. 지금 당장 무기를 버려라.]
“…….”
모두가 황당하다는 듯 강필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헛웃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뭐야, 저 새끼는?”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투항해라.]
“투항?”
“하, 하하, 별 미친…….”
LAPD에 신고한 당사자인 지우마저 가게 안에서 그 꼴을 보고는 멍하니 중얼거릴 정도였다.
“뭐, 뭐야, 저 멍청이는.”
그 와중에 성질 급한 마피아 하나가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자켄을 겨누었다.
일단 목표물부터 해치우고 난 다음, 홀로 나타난 LAPD를 손봐 주면 될 일이다.
그렇게 그의 손가락 하나가 방아쇠에 힘을 가했다.
“어?”
하지만 총은 발사되지 않았다.
손가락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 직전, 그의 눈앞에서 시뻘건 피가 튀었다.
퍽!
“…어어어?”
총을 쥔 손목이 무언가에 꿰뚫리고, 스스로 의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 총을 떨어뜨렸다.
“뭐야?!”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버린 그의 얼굴이 뒤늦게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끄으아아아아아악!!”
그 꼴을 본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이, 이레귤러!”
그 목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손목을 부여잡은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는 녀석 이외에 나머지는 경계 어린 눈으로 경찰 쪽을 바라보았다.
‘이레귤러’라는 말을 들은 이상, 감히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레귤러 자켄의 손에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마피아와 용병들에게는 이미 소울 능력자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각인된 상태였다.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뒤쪽에 있던 천중회 간부 하나가 참다못해 목소리를 높였다.
“제, 제기랄, 다들 뭣들 하는 거야? 고, 고작 한 놈이잖아!”
자켄 ‘한 놈’에게 방금까지 수십 명의 목이 달아났다.
간부의 다그침에도 누구 하나 경찰과 자켄을 향해 무기를 겨누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당황한 그는 옷가게 반대편 건물의 위쪽을 바라보았다.
환락가의 전설인 자켄을 여기까지 몰아넣은 것은 어디까지나 굴드의 지휘 덕분이었다.
굴드는 천중회에서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 인정받는 남자였고, 그런 그가 직접 통제한다면 부하들도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위쪽에는 자켄의 일격에 의해 목이 달아난 용병대장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문제는 굴드의 부재를 눈치챈 게 간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굴드 님은?”
“뭐야? 도망이라도 친 거야?”
굴드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용병 하나가 비아냥거리자, 그에게 마피아들의 시선이 몰렸다.
“뭘 쳐다봐, 이 양아치 새끼들아!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더니, 이젠 제 한목숨 아까워서 꽁무니를 뺀 거 아니야!”
“이 새끼가……!”
굴드의 측근 하나가 참지 못하고 그 용병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어딜 감히!”
용병 몇의 총구가 다시금 측근의 머리를 겨눴다.
곧이어 자켄을 향해 있던 총구들의 방향이 어지럽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용병은 마피아를, 마피아는 용병을 겨누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 따위 처음부터 없었기에 총구가 돌아가는 속도 역시 빠르고 과감했다.
“대, 대체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작전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벌어진 내분에 당황한 간부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누구도 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피를 본 뒤의 흥분, 이레귤러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공격성.
그 모든 감정이 뒤엉킨 가운데 무법자들은 이성을 상실했고, 이를 통제할 우두머리는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다.
“이, 이런… 이런 젠장!”
그나마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간부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망을 쳐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자켄을 없애야 하나?’
강필은 확성기를 내려놓은 채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전의를 상실한 간부는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간부의 시선에 한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가게에서 뛰쳐나와 포위망을 뚫은 소녀, 앨리스였다.
아직 어리고 마른 소녀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간부는 똑똑히 보았다.
파츠츠츠―
자켄의 손을 붙잡은 앨리스의 손끝에서 푸른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을.
자켄의 칼이, 자켄의 몸뚱어리가 다시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무법자들은 전부… 자켄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저, 저거…….”
충격에 빠진 간부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강필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그러나 간부는 이미 늦었음을 알았다.
자켄의 칼이 부드럽게 호를 그린다.
칼이 공중에 그린 궤적을 따라 무형의 칼날이 사방에 펼쳐진다.
다음 순간, 간부는 자신의 시야가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것을 느꼈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몸뚱어리가 보인다.
의식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마치 낙엽처럼 한꺼번에 굴러 떨어지는 머리들이 보였다.
* * *
자켄은 피바다가 된 주변을 둘러본 뒤, 천천히 여우 가면을 벗었다.
“마, 마담…….”
겁에 질린 표정의 앨리스가 자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나는… 나는…….”
앨리스는 그저 자켄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오로지 그 한 가지 이유로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자켄의 손을 붙잡은 그 순간, 터무니없을 정도의 소울이 솟아났다.
앨리스는 순간적으로 그 엄청난 힘에 몰입했고, 지금껏 다뤄 본 적 없는 수준의 소울에 완전히 취해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무법자들은 모조리 목이 달아나 있었다.
앨리스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아니,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켄은 그런 앨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고맙구나.”
사실 자켄 역시 지금 자신의 몸에서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검’을 사용하고도 여전히 소울이 넘쳐흘렀다.
몸의 모든 감각이 평소의 몇 배는 확장되어 있고, 수천 보 밖의 발걸음까지 느껴질 정도로 민감해진 상태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켄에게는 손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누구 하나라도 방아쇠를 당기기만 했다면, 자켄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자켄 자신조차 죽음을 각오했다.
하지만 지금 자켄의 몸은, 소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다시 싸울 수 있다는 사실 한 가지뿐이었다.
당주를 구하러 갈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정면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기 버려.”
무수히 많은 구슬 조각들이 자켄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강필은 시체가 즐비한 길거리를 지나와 자켄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으렴.”
자켄은 부드럽게 앨리스를 밀어낸 뒤,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자켄의 입에서 조금 전과 달리 차갑기 그지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온다.
“비켜서.”
당주를 구하러 가야 하는 자켄도, 살인범을 붙잡아 상황을 끝내야 하는 강필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먼저 움직인 쪽은 자켄이었다.
그녀는 강필을 향해 달려들었고, 강필 역시 팔을 치켜올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자켄을 막아섰다.
쏴아아아아―
셀 수 없이 많은 구슬 조각들이 마치 벌 떼처럼 자켄을 향해 새까맣게 몰려든다.
강필이 조종하는 쇳조각들은 자켄을 사방에서 둘러싼 채 공격해 왔다. 그러나 그 많은 수의 조각들도 자켄의 사정거리 안쪽까지 파고들지 못했다.
검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가운데, 검의 간격을 경계로 마치 무형의 막이 쳐진 듯했다.
하지만 강필의 공격에 가로막힌 자켄의 발걸음 역시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베고 또 벤다.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간다.
“괴물들…….”
앨리스를 지키기 위해 가게 밖으로 나온 지우는 발걸음을 멈춘 채 터무니없는 전투 현장을 지켜보았다.
그 와중에 지우의 손에 들려 있던 권총의 끝부분도 마모되어 흩날렸다.
스스스스스스…….
강필은 사방에 널려 있는 총알 조각, 부서진 칼날 파편들까지 모조리 끌어들였다.
막고 또 막는다.
근방의 쇳조각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자켄의 발을 붙잡았다.
사실상 점령전과 같은 형세를 띠게 되면서 둘의 싸움은 지극히 단순해졌다.
어느 쪽도 물러날 수 없는 가운데, 기약 없는 줄다리기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 계속되던 중이었다.
콰콰쾅!!
거대한 전뢰가 자켄과 강필의 한가운데에서 피어올랐다.
눈부신 푸른빛과 함께 연기가 뿌옇게 솟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긴 코트를 걸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쯤 해 두지? 승부는 무승부로 하고.”
불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남자.
남자의 한 손에는 기절한 채 축 늘어진 굴드가 붙잡혀 있었다.
“아, 아저씨!!”
태일의 모습을 본 앨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 급한 와중에도 강필은 태일의 입에 물린 담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일은 기어코 경찰차 안에 굴러다니던 담배를 찾아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