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38화 (39/220)

38화 환락의 밤, 배신의 낮 (2)

‘F―2020’.

그 시리얼 넘버가 인형의 첫 번째 이름이었다. 인형은 2020번째로 만들어진 F 모델이었다.

인형은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째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태어나던 순간부터 권총이 손에 익숙한 건지 알지 못했다.

사실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인간들이 본인의 성향을 타고나듯, 인형 역시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뭐야, 남자잖아?! 이 녀석이 내 파트너라고?!”

인형의 소유자는 짧은 머리칼에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는 여형사였다.

처음 인형과 마주한 여형사는 똥 씹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 혼자 사는 단칸방에 이 녀석을 들이는 건 좀 그렇잖아!”

“딱 봐도 네 욕망의 반영 아니냐? 저 깡통, 그야말로 네 이상형이잖아. 드림 새끼들, 기술 좋은데?!”

“입 닥쳐, 요한! 내가 무슨 변태인 줄 알아?”

낄낄거리는 동료의 반응에 성을 낸 유리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곧이어 인형의 어깨를 두드리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파트너. 오늘부터 잘해 보자.”

그녀는 인형을 ‘파트너’라고 불렀다.

유리는 20구역, 48구역, 3구역에 차례로 발령받았고, 인형 역시 늘 그녀와 같은 곳으로 발령받았다.

낮에는 히트맨, 사기꾼, 레지스탕스 등 수많은 범죄자와 싸우고, 밤에는 유리의 방에서 뜬눈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메타휴먼은 몸이 부서져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부서진 부위는 언제든 수복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유리를 대신에 수십, 수백 발의 총알을 맞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인형의 ‘의무’였다.

하지만 제아무리 메타휴먼이라 해도 무적은 아니었다.

3년 전, 인형은 50구역에서 유리와 함께 SB라는 비약의 유통 경로를 쫓다가 적에게 습격당했다.

“이봐, 유리. 괜찮아?”

유리는 무사했지만, 인형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양팔 기능 정지, 오른 옆구리와 양 허벅지 인공 근육 완전 파열, 복부와 흉부 심각한 손상으로 기관 자체의 교체 필요.

인형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유리는 분명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았다.

인형은 고통 따위 느끼지 못하니까.

“…폐기하는 편이 나을 거라더군.”

“개소리하지 마.”

“이봐, 유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해.”

“…….”

“요한!! 난 절대 포기 못 해!”

요한도 그런 그녀를 더는 막지 못했다.

유리는 인형의 복구를 위해 십여 년 이상 모아 놓은 결혼 자금을 전부 털어야 했지만, 그녀에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래 봐야 인형은 고마움도, 감동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프랑.”

“뭐?”

“이 녀석의 이름이야. 그러니까 요한, 앞으로는 프랑을 깡통이라고 부르지 마.”

‘프랑’은 그녀가 태어난 땅의 역사 시대 명칭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프랑, 넌 내 파트너야.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

유리는 그렇게 신신당부한 뒤, 병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이틀 뒤, 처음 보는 여자 한 명이 인형을 찾아왔다.

“유리가 죽었어.”

인형은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이, 뇌가 완전히 정지되어 버린 것 같았다.

“SB의 유통망을 추적하기 위해 연구원의 뒤를 밟던 중… 누군가에게 당했어.”

그녀는 피로 물든 유리의 신분증과 드림코퍼레이션의 로고를 건네주었다. 유리의 죽음을 전하는 여자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프랑은 처음으로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울고 또 울었다.

아프다.

부상당한 부위가. 팔이, 옆구리가, 허벅지가, 아니… 심장이.

프랑은 인간처럼 울었다. 그게 흉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프랑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다.

그렇게 인형이 우는 모습을 보며 경찰들은 경악했고, 곧이어 수많은 언론사들이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왔다.

― 영혼을 갖게 된 메타휴먼.

― 인형, 사랑을 잃고 인간이 되다.

프랑의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 F―2020은 인간인가?

학계의 치열한 토론.

― 감정을 느끼고 이성을 가진 F―2020은 인간이다! 시민권을 부여하라!

인권 단체의 시위.

수개월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진 뒤, 센트럴 의회에서 ‘로보티안 법안’이 통과되었다.

F―2020은 최초의 메타휴먼 출신 시민, ‘로보티안(Robotian)’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시민으로 인정받은 인형은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유리의 복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인형은 엄청난 분노 속에서 유리가 좋아하던 소설책의 제목을 기억해 냈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괴물의 창조자.

프랑은 자신의 낭만적인 이름에 한 글자를 더했다.

‘프랑켄’. 창조자에게 책임을 묻기로 맹세한 괴물의 이름이었다.

프랑켄은 그날, 마피아를 없애 버리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았다.

설사 악마일지라도.

* * *

“프랑…….”

오랜 기억의 끝자락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녀가 부르는 것은 더 이상 인형의 이름이 아니었다.

복수를 끝마치기 전까지 인형은 괴물로 남아야 했다.

아직, 유리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프랑켄…….”

유리의 목소리가 남자의 목소리로 바뀐다.

그리고… 점차 시야가 하얗게 밝아졌다.

“…일어났군.”

태일이 입에 물고 있던 빈 담배를 빼며 프랑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일의 옆에는 강필과 장량이 함께 서 있었다.

메타휴먼은 잠들지 않는다. 당연히 꿈도 꾸지 않는다.

하지만 방금 프랑켄이 본 장면들은 ‘꿈’이라는 단어 이외의 것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서장…님.”

그제야 자신의 몸뚱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양팔과 한쪽 다리가 없다. 등도 부서져 있다.

버둥거리는 프랑켄을 보며 강필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누워 있어.”

“여기는…….”

살아 있다.

마지막 순간, 마담은 프랑켄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50구역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죠.”

방 뒤편에 앉아 있던 마담이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떼며 담담히 말했다.

한편, 태일을 불러온 지우는 마담의 옆에 앉은 채 경찰 두 사람 쪽을 연신 힐끔거리고, 앨리스는 걱정 어린 얼굴로 프랑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 앞에서 냉혹한 모습을 숨긴 자켄은 그저 평범한 옷가게 마담처럼 보였다.

태일이 프랑켄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나를 찾았다고 들었는데.”

곧이어 프랑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억해 냈다.

“50구역이… 위험합니다.”

“이거, 미처 몰랐던 사실이군. 50구역이 위험하다니. 큰일이잖아. 안 그래, 장량?”

강필이 과장되게 놀란 표정으로 비꼬듯 말했지만, 프랑켄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50구역에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놈들은… 마피아와 환락가 주민 전부를 지워 버릴 생각입니다.”

“…….”

“이미 센트럴에서 비밀리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드림코퍼레이션이 행동에 나섰습니다.”

“센트럴에서… 뭘 합의했다고?”

“센트럴 의회는 대륙의 그림자를 지우기로 했습니다.”

프랑켄은 장량의 반문에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대륙의 그림자’, 그것은 50구역을 의미하는 은어였다.

부자는 빈자가 있기에 존재하며, 도시는 외곽 지역의 영양을 빨아먹으며 성장한다.

50구역 환락가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센트럴을 포함한 도시의 부유층들이지만, 이제 지배자들은 그런 환락가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장량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물론 장량 역시 지배자들의 윤리 의식이나 동정심을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일을 저질러 봤자 이득이 없어.”

환락가가, 마피아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강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센트럴까지 흘러드는 불법 정치자금, 막대한 자금을 세탁할 수 있는 암시장, 싸구려 몸값의 어설픈 킬러에 이르기까지, 환락가는 권력자와 부자에게 있어 제법 유용한 곳이었다.

한데 왜 굳이 그런 장소를 없앤단 말인가.

“방법은?”

순간, 모두의 시선이 태일에게 집중되었다.

태일은 센트럴에서 내린 결정의 이유 따위 묻지 않았다.

그 진위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다른 세계에서는 이미 꽤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 * *

프랑켄이 막 깨어났을 무렵, 환락가 사거리의 카지노 흑룡 VIP실에서는 비밀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 흑룡에 자주 놀러 오곤 했죠. 여기는 여전하군요.”

창문을 통해 흑룡 내부를 바라보는 코헨의 눈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테러 사건의 잔흔이 아직 남아 있지만, 흑룡은 여전히 많은 고객을 끌어들였다. 도박은 밤낮을 가리지 않기에 흑룡 내부는 여전히 붐볐다.

천중회의 수장, 웨이창은 흥미롭게 창문 밖을 구경하는 코헨을 보며 점잖게 대꾸했다.

“이거참, 영광이오. 대륙 유수의 기업에서 이렇게 초라한 노인네를 기억해 주시다니.”

“50구역 최강의 조직을 이끄는 분께서 겸손이 과하십니다.”

코헨의 말에 웨이창의 얼굴에 짐짓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최강의 조직’… 그것은 실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건방지게 날뛰던 인형극단 패거리는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고, 검을 들고 설치던 카게구미는 당주의 죽음 이후 어린 계집에게 떠맡겨지면서 빠른 속도로 붕괴하고 있었다.

LAPD의 신임 서장이 주제도 모른 채 일을 벌이고 있지만, 곧 놈들도 알게 될 터였다. 진짜 50구역의 주인이 누구인지.

웨이창이 코헨의 뒤에 선 경호원들과 이순철 경장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이순철 경장은 주변을 둘러싼 마피아들을 보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코헨 쪽으로 시선을 돌린 웨이창이 가만히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50구역에 들어오자마자 험한 일을 당하셨다지?”

“후후, 사장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호오?”

“우리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이른 죽음을 맞이할 거라 경고하셨죠.”

“…과연.”

웨이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드림코퍼레이션의 경영진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다. 열두 명의 사장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조차도 성경의 구절에서 비롯된 소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드림코퍼레이션의 행보는 상식적인 범주를 뛰어넘고 있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평범한 전력 회사이던 드림코퍼레이션은 의문의 사모펀드에게 인수된 뒤, 터무니없는 기술력으로 급성장했다. 하나같이 세상을 바꿀 혁신적 기술이고, 도리어 사회의 제도가 그들의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드림코퍼레이션 경영진을 신의 사도쯤이라 여기는 이들이 생겨났고, 회사 측은 루머를 인정이라도 하듯 광신도들을 고용했다. 코헨 역시 그렇게 일자리를 얻은 녀석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바깥세상에서 잘나간다 해도 이곳은 50구역 환락가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사장님의 제안을 전하러 왔습니다.”

“제안이라…….”

“50구역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웨이창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물끄러미 코헨을 바라보던 웨이창이 별안간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큭큭… 이거, 재미난 말씀을 하시는군. 그러니까… 드림코퍼레이션에서 이 사람에게 50구역을 넘겨주겠다?”

코헨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도발하는 것 같은 코헨의 태도에 웨이창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웨이창의 팔이 뒤쪽으로 향한다. 그러자 줄곧 뒤에 서 있던 페이진이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웨이창의 손에 도끼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코헨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가셨다.

쾅!

웨이창은 코헨의 앞에 도끼를 던지듯 내려놓았고, 그 바람에 찻잔들이 엎어지면서 뜨거운 찻물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허어…….”

“왜? 당신의 잘난 사장님께서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하시던가?”

“이거, 아무래도 오해가…….”

“뭘 모르나 본데, 이미 50구역은 내 것이야. 당신의 그 잘난 사장이 나설 기회 따위는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말인데…….”

웨이창이 도끼를 집어 들고는 코헨의 목을 겨누며 살기등등하게 물었다.

“같은 제안을 몇 사람에게 했지?”

웨이창은 수십 년간 환락가에서 군림해 온 남자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웨이창이 관철해 온 상식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누구도 나, 웨이창의 고삐는 쥘 수 없다.’

웨이창은 결코 그 누구에게도 꼬리를 흔들지 않는다.

코헨이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아까부터 오해가 있는 거 같습니다. 사장님의 제안은 처음부터 오직 한 사람에게만 유효했죠.”

웨이창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제안은 당신에게 한 게 아니란 뜻입니다.”

“지금 무슨 수작을…….”

바로 그때였다.

철컥.

별안간 웨이창의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와닿았다.

웨이창의 눈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탕!!

웨이창의 머리가 박살 나며 온 사방에 피가 튀었다.

그러나 보스의 머리가 터지는 그 순간에조차 주변을 지키는 천중회 마피아들은 애초부터 그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던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음을 굳히셨습니까?”

“대답으로 부족했나?”

페이진이 자신의 얼굴에 튄 웨이창의 피를 닦으며 코헨을 노려보았다.

코헨은 히죽 웃어 보이며 짧게 답했다.

“천만에요.”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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