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33화 (34/220)

33화 캐피탈 클럽 (3)

아침 바람이 아직까지 꽤 쌀쌀했다.

붉은 흙먼지가 날려 오는 가운데 시야는 늘 그렇듯 뿌옇다.

태일은 홀로 인적 드문 환락가 뒷골목을 걷고 있었다.

[모르는 일이야.]

태일의 귀에는 중앙역에서 민호에게 건네받은 통신기가 끼워져 있었다.

레지스탕스 대장은 태일과 조직 간에 연락책을 두고 싶어 했고, 태일은 민호가 그 일을 담당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민호는 태일의 의도를 알고 있기에 못내 불편해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자신과 언제든 연결이 가능한 통신기를 넘겨주었다.

[우리가 벌인 일이 아니다.]

기기를 통해 들려오는 민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태일이 민호를 연락책으로 원한 이유는 당연히 레지스탕스 조직과의 연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우리’라는 게 레지스탕스를 말하는 거냐?”

[…….]

태일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 민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호는 현재 이번 경찰서 습격 사건을 일으킨 배후로 가장 의심스러운 조직, ‘셸터(Shelter)’에 속한 녀석이었다.

셸터는 마피아뿐만 아니라 레지스탕스에까지 조직원을 숨겨 두었다. 지하조직을 자처하는 레지스탕스조차도 그런 셸터와 비교하면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놈들은 50구역 마피아들을 모조리 없애려 한 극단주의자들이니, 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를 습격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나?]

“설마.”

태일이 피식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지난 2주간 천중회와 카게구미의 마피아들은 셸터를 찾는다는 명목하에 50구역 전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이제껏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은신하고 있는 조직원 하나를 운 좋게 알아 두었는데, 괜히 다시 음지로 숨어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경고하는 거야. 너희가 정확히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지금 LAPD를 건드리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거든.”

짐작컨대 셸터의 목표는 50구역의 종말을 막는 것이었다. 방식이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태일은 굳이 셸터와 각을 세울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 셸터의 행태는 태일이 지휘하던 혁명군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했으니까.

[그쪽이야말로 조심하는 게 좋아. 캐피탈 클럽이 너를 주목하고 있다.]

“캐피탈 클럽?”

뜬금없는 조직이 언급되자 태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캐피탈 클럽’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놈들은 셸터와 달리 이전 세계에도 있었으니까. 캐피탈 클럽은 이른바 자본가[Capitalist]들의 모임이었다.

[놈들이 당신의 뒤를 캐고 있어.]

“그래 봐야 나올 게 없을 텐데?”

[…….]

세연을 찾아낸다면 모를까, 이쪽 세계에서 태일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보다 레지스탕스 대장을 좀 만났으면 하는데.”

[…대장을?]

“그래, 그때 만난 그 양반. 가능한 빨리.”

[잠시 기다려.]

민호는 대장을 만나고 싶다는 태일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전혀 곤란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짧은 침묵 뒤, 곧바로 답변이 돌아왔다.

[시장의 ‘덕곡상회’라는 곳으로 와라.]

“뭐가 이렇게 빨라?”

즉각적인 대답에 놀라는 찰나, 민호가 담담하게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당신이 우리들의 물주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

레지스탕스는 태일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환락가의 사업장 1/3을 손에 넣었다.

지난 일주일 사이 레지스탕스는 사업장들의 문을 닫는 대신 일부 종업원을 교체했고,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갔다.

이제 각 사업장에는 레지스탕스의 비밀 무기고나 통신소, 임시 거처 따위가 만들어질 터였다.

그러나 중립 조직에 의해 작성된 서류상 사업장 소유주는 여전히 ‘신태일’로 되어 있었다. 마피아가 아닌 자들은 환락가 사업장의 관리 권한을 넘겨받을 수 없기에 태일은 바지사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즉, 태일은 레지스탕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투자자였다.

[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다.]

“지금 바로 가지.”

태일의 대답을 끝으로 통신이 끊어졌다.

그렇게 통신을 끝마치고 보니, 태일은 어느새 환락가의 끝자락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그때, 뒤쪽에서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태일이 형?!”

그냥 무시해 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형, 어디 가요?”

지우가 쪼르르 달려와 태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런 녀석을 본 태일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반갑네.”

* * *

“형, 어떻게 우리들을 그 마귀할멈한테 맡기고 그렇게 가 버릴 수가 있어요?”

일주일 전, 자켄의 옷가게에 남겨진 지우와 앨리스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왜? 마담은 너희 둘이 꽤 맘에 든 거 같던데. 난 네가 그렇게 얌전한 줄 미처 몰랐고 말이야.”

마담은 아이들이 마음에 든다며 둘을 계속 보호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아이들이 너무 ‘얌전’해서 마음에 든다는 그녀의 말은 그야말로 백미였다.

아마 얌전한 게 아니라 겁에 질려 바짝 얼어 버린 것일 테지만, 어찌 되었든 마담은 둘을 데리고 있으려 했다. 아이들을 거둘 여유가 없는 태일과 제인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저희들 좀 거기서 빼내 주면 안 돼요? 진짜 숨 막힌단 말이에요!”

“…그냥 거기 있어.”

안 그래도 제인이 원래 있던 사무실을 정리하고 레미제라블 옆 건물로 이사 오는 바람에 골치가 아픈 참이었다. 제인의 이사 사실을 알게 된 요한 역시 서장에게 찍혀 경황없는 와중에도 근방의 방을 알아보고 있었다. 거기에 두 꼬맹이까지 감당하고 싶진 않았다.

“앨리스는?”

“마담이랑 있어요. 요새 아주 그냥 마담이랑 죽고 못 살…….”

“잘 지내면 됐어.”

마담이 처음 두 꼬맹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분명 태일과의 인연을 이어 가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앨리스의 자질을 알아본 마담은 크게 반색했다.

자연계 소울을 지닌 소녀. 잘만 키운다면 규격 외의 병기가 될 테니, 마담의 입장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떨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강해지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던 앨리스는 마담의 기대 이상으로 배움에 열의를 보였고, 고작 일주일 사이에 애제자가 되어 있었다.

“앨리스도 형을 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올 수가 있어요?”

“바빠서.”

“마귀할멈도 형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고…….”

그 뒤로도 지우는 태일의 옆을 따라 걸으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마담의 눈치를 보느라 떠들지 못해 쌓인 답답함을 전부 풀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제가 그 한정판 피규어를 꼬맹이들이 보육원까지 몰래 가져간 걸 알고…….”

결국 태일은 지우의 끝없는 수다를 듣다못해 말을 끊고 말았다.

“지우, 너. 대체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

“예? 저 지금 형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태일의 물음에 지우는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건데?”

“시장이요. 마귀할멈이 심부름을 시켜서…….”

보란 듯이 장바구니를 들어 보이는 지우의 모습에 태일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형은 어디 가는대요?”

“…….”

그렇게 시장까지 가는 십여 분 동안 태일은 끝나지 않는 녀석의 수다를 듣고 있어야 했다.

마담의 끔찍한 요리 실력에 대한 이야기가 막 끝날 무렵, 둘은 시장에 도착했다.

그사이, 낡아 빠진 역전과 오래된 공장 지역을 지나쳤지만, 사실 50구역에서 가장 오래된 장소는 다름 아닌 시장이었다.

“여긴 진짜 그대로네요.”

“꼬마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지우의 말처럼 시장은 최소 백여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있었다.

국가가 무너지고 구역이 편성되는 부침 속에서도 이 낡아 빠진 시장은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왔다. 심지어 눈앞의 시장은 태일이 살던 세계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근데 형은 시장에 무슨 일로 온 거예요?”

“그냥 볼일이 있어서.”

태일은 짧게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

“…예?”

파짓.

지우가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방금까지 태일이 있던 자리에는 미세한 스파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치사하게!”

지우는 매정하게 사라져 버린 태일을 원망하며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찼지만, 결국 마담의 심부름을 수행하기 위해 투덜대면서 주머니 속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산업 시대부터 지금껏 자리를 지켜 온 시장에는 수많은 상인들이 나름의 자존심을 내세우며 버티고 있었다.

시장은 재개발을 노리는 지역 자본가들에게 눈엣가시였고, 환락가의 마피아들에게는 탐나는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토박이 영세 상인들에게는 그나마 마음 둘 수 있는 생활 터전이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변해 가는 와중에 시장 상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경단을 만들어 운영했고, 변하지 않기 위해 저항했다. 시장 상인들이 만든 자경단은 그 자체로 어엿한 무장 단체였고, 그만한 무력을 지닌 자경단이 레지스탕스와 한 몸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쌀가게 주인이라…….”

“왜? 놀랐나?”

덕곡상회 앞 노상에 느긋하게 앉아 있던 레지스탕스 대장은 부드럽게 웃으며 태일을 맞아 주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레지스탕스 대장이 쌀가게 주인으로 위장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영락없이 태일이 기억하는 ‘하얀 늑대’였다.

“…조금.”

“오히려 놀란 건 내 쪽이네.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지?”

태일은 입을 열기에 앞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창 흥정을 벌이는 사람들과 물건을 실어 온 사람들로 인해 새벽 시장은 제법 시끄러웠다.

환락가의 상인부터 공장에 도시락을 납품하는 업체 담당자에 이르기까지 새벽 시장을 찾는 이들은 많았다.

대장은 주변을 살피는 태일을 보며 빙긋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서의 만남은 상대적으로 주의를 덜 끄는 법이지.”

“…….”

하얀 늑대도 같은 말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하얀 늑대는 바로 덕곡상회 앞에서,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군에 체포되었다.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

태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LAPD를 습격한 놈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갑작스런 태일의 존댓말에 대장이 놀란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태일은 저도 모르게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한때 따르던 대장, 하얀 늑대와 꼭 닮은 남자 앞에서 태일은 나름의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찾아서 어쩔 생각인가?”

“저지른 자들의 의도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대장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뒤에 말했다.

“유감이지만, 우리와는 무관한 일이네. LAPD가 한창 수색 중이니, 그쪽에 알아보는 게 어떤가? 서장과는 벌써 꽤 친해진 거 같던데 말이야.”

“정말 무관한 게 맞습니까?”

“뭐?”

“그렇게 믿는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일은 그런 대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서장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더니, 곧이어 누군가가 경찰 소속 메타휴먼에 손을 댔습니다. 덕분에 드림코퍼레이션이 개입하게 되었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대장이 조용히 물었다.

“센트럴(Central)의 시선이 자꾸 50구역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경찰청에 이어 캐피탈 클럽까지. 이건 그쪽 입장에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닐 텐데요?”

50개 구역을 총괄하는 수도(首都)를 ‘센트럴’이라 부른다. 전례 없는 힘으로 역사 시대를 강제로 끝내 버린 센트럴의 통치자들은 50개 구역을 수십 년 동안 통치해 왔다.

“LAPD와 마피아 사이의 전쟁에 우리를 끼워 넣으려 하지 말게. 둘 모두 우리에게는 똑같이 적일 뿐이야.”

소울벌룬이 유포되어 마피아들 간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하얀 늑대 역시 그와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 대가로 그는 자신이 지키려던 50구역이 피로 물들어 가는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결국 하얀 늑대는 그 사태를 빌미로 집권한 센트럴의 쿠데타 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

태일은 하얀 늑대와 닮은 눈앞의 사내가 그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가 50구역을 불태워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애당초 마피아와 LAPD만의 얘기가 아니에요. 50구역의 생존에 관한 문제입니다.”

대장은 의도를 읽으려는 것처럼 태일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잠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네. 이번 LAPD 습격 사건을 저지른 놈들이 누구인지 추적해 보도록 하지.”

태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려던 찰나, 뒤쪽에서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 또 만났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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