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캐피탈 클럽 (2)
태일은 와인의 부드러운 목 넘김을 느끼면서 테이블 구석에 장량이 내려놓은 작은 선인장에 시선을 두었다.
문 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식한 크기와 짙은 향의 화분들보다 훨씬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하지만 바를 차지하고 앉아 서로 도끼눈을 뜨고 있는 네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애당초 세연이 아끼던 레미제라블은 마을 주민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쉼터 같은 곳이고, 어떤 이야기든 편히 나눌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피아와 경찰 간부들이 바를 차지하고 앉아 으르렁거리는 중이었다.
특히, 카츠미의 입에서 ‘마약’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졌다.
“…취한 거냐?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냐는 뜻이야.”
“그래. 네놈이 감히 카게구미의 당주인 나에게 건방지게 굴고 있지. 똑똑히 이해하고 있다.”
“어린년이!!”
“경고는 여기까지.”
철컥.
페이진은 당장에라도 리볼버를 뽑아 들 기세로 눈을 부라렸고, 카츠미 또한 이미 도를 절반쯤 빼 들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강필이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더니, 탁, 소리가 날 정도로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당주. 당주의 협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그런 강필의 시선은 페이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페이진은 카츠미뿐만 아니라 경찰들까지도 상대해야 했다.
페이진이 카츠미와 강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침을 탁, 뱉었다. 한편, 바닥에 눌어붙은 가래침을 본 태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새끼가!’
방금 페이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태일까지도 적으로 돌렸다.
강필의 옆에 앉아 있던 장량이 흥분한 페이진을 향해 물었다.
“지금 당신이 보이는 태도가 천중회의 공식 입장이라고 보면 되겠지? 마약 퇴치는 예정대로 진행될 거요.”
“흥, 어디 해 봐! 하지만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우리에게는 우리들만의 규칙과 명예가 있어. 제아무리 LAPD라 해도 우리를 건드린다면 좋은 꼴을 보진 못할 거다.”
그것은 두말할 여지 없는 선전포고였다. 그런 중대한 이야기를 왜 굳이 손바닥만 한 바에서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페이진은 와인을 병째로 들고는 입에 쏟아부은 뒤, 완전히 비어버린 와인 병으로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삐걱거리는 테이블 다리와 함께 다시 한번 태일의 관자놀이 혈관이 솟아올랐다.
“50구역의 주인은 마피아들이야.”
경찰을 앞에 두고도 감히 그런 말을 당당히 입에 담을 수 있는 곳은 50구역 외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규칙만을 따른다.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마피아의 규칙과 명예, 그것은 중립 세력을 만들어 가면서까지 지켜 온 관습법이고, 절대적인 가치였다. 지금껏 마피아가 50구역의 암묵적 지배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였고, 이제는 LAPD와 싸워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페이진은 미친개처럼 충혈된 눈으로 카츠미를 노려보았다.
“이봐, 당주님. 잘 들어. 당신은 그 어리석은 판단 때문에 모든 걸 잃게 될 거야. 명예를 잊은 자가 이 바닥에서 조직을 이끌 수는 없으니까.”
“…….”
카츠미는 대답 대신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각오들… 해 두라고.”
페이진이 그렇게 비틀거리며 바를 나서려는 찰나.
“어이!”
태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술값 계산하고 가라.”
“…뭐?”
페이진이 별 개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태일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며 놈을 노려보았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라고 했을 텐데. 얌전히 계산하고 꺼져.”
가장 비싼 와인을 꺼내 온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주머니를 털린 페이진이 바를 떠난 직후, 비교적 조용히 술을 마시던 카츠미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만…….”
태일은 일어나다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는 카츠미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꽤 취한 모습에 언뜻 걱정이 든 태일이 미간을 좁혔다.
“토할 거면 나가서 해.”
가까이서 보니, 당주라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 강필이 카츠미를 따라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당주의 결단에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지.”
그러나 카츠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 손을 힐끗 볼 뿐, 맞잡지는 않았다.
“날… 당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 난 무사이고, 당주다.”
어째서인지 마지막 한마디는 강필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향해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카츠미의 날선 한마디를 들은 강필이 내민 손을 거두었다.
“…새겨듣지.”
바로 그때, 술집 문이 열렸다.
“당주님!”
꽁지머리 무사가 다리를 절룩이며 태일의 부축을 받은 카츠미 쪽으로 다가왔다.
페이진이 바에서 홀로 나온 것을 보고 걱정된 마음에 들어온 것일 터였다. 카츠미가 고개를 돌려 부하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코우.”
“예, 당주님.”
“당주님이라… 그래, 내가 당주지.”
‘코우’라 불린 꽁지머리가 태일을 밀어낸 뒤, 카츠미를 부축했다. 그러나 카츠미는 코우를 밀쳐 내더니,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혼자 걸을 수 있다. 저리 비켜.”
고집을 부린 카츠미의 걸음걸이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코우는 결코 그녀를 돕지 않았다. 당주의 명령은 그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홀로 걷는 당주, 카츠미는 마지막까지 위태롭게 보였다. 다행히 그녀가 바 안에서 토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카츠미까지 떠난 이후, 바에 남은 이는 강필과 장량뿐이었다.
어느새 다시 자리에 앉은 강필은 어깨를 으쓱하며 태일에게 자리를 권했다.
“몇 잔 더 할까 하는데, 어울려 주겠나?”
이제까지의 술값은 웬 호구가 치러 준 덕분에 그의 지갑은 아직 두둑했다.
“그 어떤 일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 지킬 건가?”
강필이 가장 싸구려 스카치를 주문한 뒤, 다짜고짜 태일에게 꺼낸 한마디였다.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혼자 조직 하나를 괴멸시킨 남자, 히트맨들의 표적이 되었지만 살아남은 남자, SB의 유통을 막고 3대 조직 중 한 곳의 보스 자리에 앉은 남자.”
강필은 이미 태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친 뒤였다.
“그렇게 들으니 나도 꽤나… 설쳤군.”
태일은 허탈하게 웃으며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애당초 이쪽 세계에 그토록 깊이 개입한 건 그의 의지와 무관했다.
장량이 태일을 보며 한숨 섞인 말투로 물었다.
“그런 일들에 엮였으면서 과연 이런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장량이 보기에 그것은 태일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문제였다. 세상일은 결코 개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까.
태일은 이미 50구역뿐만 아니라 전 대륙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바깥의 화분들을 보건대, 센트럴의 상원의원, 캐피탈의 자본가들까지 태일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런 위치의 남자라면,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온갖 사건에 얽힐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태일 본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오늘따라 다들 재미없이 말을 빙빙 돌리는군.”
“…….”
셋은 말없이 술을 한 잔씩 들이켰다.
잠시 뒤, 장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말을 돌리는 대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대체 당신의 목적이 뭡니까?”
“여자 한 사람을 찾고 있어.”
그건 꽤 쉬운 질문이었다. 아니, 기다리던 질문인지도 몰랐다.
* * *
“이봐요!”
“…….”
“신태일 씨!”
“으음…….”
머리가 지끈거린다.
꽤나 오랜만에 연거푸 마신 독주로 인해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정신을 차린 태일이 머리를 쓸어 넘기자, 눈앞에 빈 병 십수 개가 보였다.
어느새 찾아온 제인이 그런 태일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경찰 두 사람과 셋이서 대략 일곱 병 정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났지만, 그다음부터는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괜찮아요?”
“괜찮으실 리가 없죠.”
바텐더 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병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 독한 술을 대체 얼마나…….”
“그 인간들, 계산은 다 하고 갔냐?”
“네. 정확히 삼분의 일씩요.”
“…….”
남은 1/3은 태일의 몫일 터였다.
그들이 두고 간 선인장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누가 공무원 아니랄까 봐.”
제인은 투덜대는 태일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밤새 이러고 있었으면 바깥소식은 못 들었겠군요. 게다가 서장, 팀장까지 전부 여기에 있었다면…….”
“왜? 무슨 일 있나?”
“지난 새벽에 LAPD가 습격당했어요.”
“…뭐?”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에도 깜짝 놀란 태일이 제인을 바라보았다.
쨍그랑!
옆에서 함께 놀란 바텐더가 술병을 떨어뜨려 깨 먹었지만, 태일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물었다.
“설마 천중회가 벌써 행동에 나선 건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천중회 입장에서도 서장과 팀장이 없는 LAPD를 습격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테니까.
더구나 지난주 환락가 밖에서 체포된 마약쟁이들은 이미 타 구역 교도소로 이감된 상태였고, 설사 그들이 아직 경찰서에 남아 있다 한들 고작 그런 조무래기들을 구출하기 위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천중회는 아니에요. 경찰서를 습격했다고는 하지만, 경찰 중 다친 사람은 없기도 하고.”
“그럼 경찰서를 습격한 놈들은 대체 뭘 노린 거지?”
“프랑켄.”
“뭐?”
“프랑켄이 사라졌어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태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요한과 함께 제인의 정보를 찾기 위해 서버를 뒤졌다가 체포된 메타휴먼. 뜬금없이 그가 언급된 것이다.
“…잠시만.”
파츠츠―
태일은 잠시 눈을 감은 채 몸 구석구석으로 전류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혈관과 몸 기관 구석구석을 자극하자, 혈류의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지면서 몸 내부의 해독 작용 역시 가속화되었다.
강제적으로 몸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은 휴식 중인 몸을 각성시키는 것이기에 자주 사용할 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일은 술기운을 강제로 몰아내는 행위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애당초 그럴 거면 술을 마실 필요가 없으니까.
어쨌든 지금 이 순간, 태일은 그런 취향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몇 초가 흐른 뒤, 어느새 술기운을 완전히 털어 낸 태일이 다시 제인을 바라보았다.
“좀 더 자세히. 누군가 경찰서를 습격해서 프랑켄을 데려갔다는 건가?”
갑자기 멀쩡해진 태일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제인이 자리에 마주 앉으며 간밤에 벌어진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경찰서 벽을 폭파시키고 침입한 모양이에요. 프랑켄이 갇혀 있던 장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그 부분만 폭파시켰다고 해요.”
내부자의 소행으로 의심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요한은 아니에요.”
제인이 태일의 다음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급히 말했다.
“…지난밤 내내 저와 함께 있었어요.”
“그래서 어제도 그렇게 금방 가 버린 거군.”
“뭐,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제인은 불편한 표정으로 문밖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화분들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를 비롯해 이름난 사업가들이 앞다투어 보내온 화분들. 제인에게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었다.
“어쨌든… LAPD 측에서 과연 제 알리바이를 믿어 줄지 모르겠어요.”
“요한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태일이 파악한 요한은 애당초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꽤 충동적인 성격이지만, 경찰서를 습격할 정도로 간 큰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강필 역시 필요한 절차는 거치겠지만, 요한을 의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정도 판단력은 있는 사람이었다.
“의심되는 조직은?”
“없어요.”
“요한은 일단 경찰서로 간 건가?”
“프랑켄을 걱정하면서 갔어요. 탈옥이 아니라 강제로 끌려간 것일지도 모른다면서…….”
태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메타휴먼을 납치할 이유가 있나?”
“메타휴먼은 과학자들에게 인기 있는 연구 대상이에요. 법으로 메타휴먼의 해부나 훼손을 금지하고 있지만, 추적 불가능한 메타휴먼이 가끔 암시장에 나온다고 들었어요.”
“…추적이라고?”
“메타휴먼이 발매될 때, 신체에 위치추적 장치가 장착되어 있어요..”
“…….”
사람과 다르지 않은 메타휴먼의 몸에 추적기를 숨겨 놓는다는 사실이 꽤 소름이 끼쳤지만, 메타휴먼을 소유물로 여기고 있는 상황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심 놀라운 사실은 ‘추적 장치’의 존재였다.
아직 리볼버와 증기기관이 사용되는 산업 시대에 좌표를 설정하고 위치를 추적하는 기술은 오버테크놀로지다.
생명 기술의 정점인 소울 벌룬, 로봇 기술의 정점인 메타휴먼, 위치추적… 그런 오버테크놀로지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드림코퍼레이션이라는 놈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프랑켄도…….”
“네. 연결이 끊어졌다고 해요. 드림코퍼레이션 쪽에서 이 일을 확인하기 위해 전문 인력을 파견한 모양이에요.”
“드림코퍼레이션이라…….”
태일이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찰서에 가려고요? 그럼 저도 같이…….”
“아니. 바람 좀 쐬러. 술도 깰 겸.”
제인은 그런 태일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태일은 이미 예전부터 술에서 완전히 깬 모습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