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제3의 세력 (3)
자켄의 옷가게.
마담은 캐리어를 들고 다짜고짜 쳐들어온 태일 일행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다가 선뜻 원하는 정보를 말해 주었다.
“어제 자로 부임한 서장이에요. 키 큰 남자는 아마 이번에 함께 부임한 팀장을 말하는 것 같군요.”
자켄은 경찰의 인사 정보를 일찌감치 손에 넣은 상태였다.
카게구미를 대표해 협상장에 나온 자켄, 아니, 히나코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금 자신의 옷가게 마담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협상이 끝난 이후에도 태일을 도왔고, 선뜻 연락책 역할을 해 주었다.
물론 그녀의 도움이 그저 단순한 호의는 아니었다.
자신의 소속인 카게구미를 위해 태일과의 친분을 다져 놓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태일은 딱히 마담의 속셈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지만, 그녀가 자발적으로 건네는 도움을 굳이 거절하지도 않았다.
“이번에 온 두 사람이 경찰 내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미제 사건을 여럿 해결했다나?”
자켄의 정보를 듣고 태일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 제인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저기 걸려 있는 드레스… 3년 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물건이군요.”
“어머, 아가씨 안목이 좋네요?”
마담은 단박에 소장품을 알아본 제인을 반색하며 바라보았다.
한편, 제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옆의 목걸이는…….”
“5년 전에 사들인 마이어의 유작이에요.”
제인 역시 그동안 환락가의 가장 좋은 목에 위치한 자켄의 옷가게를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화려한 옷과 액세서리들이 아무렇게나 진열된 가게에 들어올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약혼자가 체포된 상황에서 태일을 따라 경황없이 가게에 들어선 제인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반강제로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경매장에서 본 물건들이 곳곳에 진열되어 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요로 어릴 적부터 예술 교육을 받아 온 덕분에 지금 가게 안에 있는 물건의 상당수가 진품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더구나 경찰에 대한 정보를 미리부터 파악하고 있는 그녀의 역량은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대체 당신은…….”
“보다시피 수집을 좀 즐기는 편이랍니다. 자, 한잔 들어요.”
제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여유롭게 차를 권하는 눈앞의 마담을 바라보았다.
“여기 있는 것들이 그렇게 비싼 것들이라고요?”
지우는 제인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가게 안을 살피며 바삐 돌아다녔다.
태일은 그런 녀석을 보며 짧게 경고했다.
“주머니에 넣은 것들 전부 돌려놔.”
“네? 뭐, 뭘요?”
“너, 그러다 죽는다. 이 가게 주인이 카게구미의 간부거든.”
“에?!”
태일의 말에 놀란 이는 비단 지우뿐만이 아니었다.
카게구미와의 관련성을 대충은 알고 있던 앨리스조차도 깜짝 놀라 마담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제인은 놀란 와중에도 애써 침착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게구미의 간부가 어째서 이런 곳에서 옷가게를…….”
“나름의 사정이 있답니다. 사실 꽤 오랫동안 은퇴한 상태였거든요. 딱히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이렇게 공공연히 드러낼 얘기 역시 아니죠.”
마담이 태일을 살짝 흘겨보았지만, 이내 감정을 숨긴 채 담담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황급히 자신이 훔친 물건들을 되돌려 놓는 지우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 물건들은 그냥 가져가도 좋아. 네가 고른 물건들은 전부 가짜거든.”
과연 마담은 지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 간담이 서늘해진 지우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황급히 내려놓은 물건들의 열을 맞추었다.
“거기 아니야. 여기야, 여기.”
앨리스 역시 황급히 그런 지우를 돕는다.
태일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지금 LAPD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호오, 경찰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다니… 어엿한 ‘보스’가 되셨네요.”
심술궂은 마담의 말에 태일은 짧게 혀를 찼다.
부하 한 명 없는 태일을 ‘보스’라 칭한 것은 그녀 나름의 유치한 복수일 것이다.
미끼를 문 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말이죠? 보스?”
제인은 그저 태일이 마피아들을 중재하고 전쟁을 막았다는 사실 정도만 알 뿐, 그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듣지 못했다.
“나중에. 마담,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해 두자고. 이건 그저 의뢰 때문에 묻는 거야.”
기실 태일이 LAPD의 동정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고용주인 제인이 도움을 요청했고, 태일은 계약에 따라 방법을 찾을 뿐이었다.
마담은 그런 태일을 보고 빙긋 웃더니,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의뢰라……. 좋아요. 50구역에 부임한 경찰은 서장으로 온 ‘강필’과 팀장으로 온 ‘장량’, 이렇게 둘이에요. 두 사람 다 2구역에서 근무하다가 이번에 승진해 여기로 발령이 났죠.”
“초임이라는 뜻이군.”
“사실상 좌천이죠.”
마담이 부연했다.
“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경찰에게 있어 50구역이 썩 좋은 곳은 아니잖아요?”
“…날 당신들이랑 묶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태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마담은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막 서장 자리에 앉았으니 의욕도 있겠지만, 곧 현실을 깨닫게 될 테니까.”
“…….”
“부임하자마자 내부 기강 잡기 정도야 하겠지만,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기강 잡기.
마담은 요한과 프랑켄의 체포를 그렇게 설명할 뿐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가진 힘을 언뜻 확인한 태일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해석에 공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고작 마피아를 두려워할 이들이 아니었다. 아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연인을 걱정하는 제인 앞에서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경찰서에 가 봐야겠어요.”
“가서 아가씨가 뭘 어쩔 생각일까?”
마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난 변호사예요.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과연.”
마담이 재미있다는 듯 제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일은 그런 제인의 태도에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제인은 ‘변호사’라는 자신의 직업에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50구역에서 법은 힘보다, 권력보다 무력하다.
“내가 따라갔어야 했어요.”
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함께 가지.”
태일 역시 서두르는 제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인의 대책 없는 자부심과 순진함이 또 어떤 사고를 터뜨릴지 모를 일이기에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지우와 앨리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경찰서에 간다고요? 지금요?”
태일은 대답 대신 마담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두 꼬맹이 좀 잠시 맡아 줬으면 좋겠는데.”
마담은 빙긋 웃으면서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어, 어어?! 형?”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지우와 앨리스가 화들짝 놀라 바라보았지만, 태일은 짧게 당부하고는 먼저 가게를 나선 제인의 뒤를 급히 따라 나갔다.
그렇게 가게에 두 아이만 남겨진 가운데, 마담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저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뭘 하고 있으면 좋을까?”
지우의 등 뒤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 * *
가게를 나와 환락가를 벗어날 때까지 제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태일 역시 말없이 그녀의 옆을 따라 걸었다.
그러나 환락가를 빠져나온 직후, 경찰서에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취객의 싸움이 난 정도라 생각했지만, 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퍽! 퍽!
탕!
둔탁한 타격음과 공포탄 소리.
“으악!!”
“잡아!”
비명과 고함 소리.
철컥!
쇠붙이 소리.
그 와중에 공중에는 드론이 바삐 날아다니고 있다.
곧이어 제인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거리는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어이, 거기! 어딜 도망가? 이리 안 와?!”
수많은 경찰들이 거리 곳곳에 흩어져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이, 이봐, 이거 놔! 당신들 어? 뭐야? 내가 누군지… 쿨럭!”
“…투약자군. 체포해.”
“경찰입니다. 당신을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어, 어라? 이거 안 놔? 에에이!!”
“저기 도망간다! 잡아!”
혀 꼬인 몇몇 약쟁이들이 난동을 피웠지만, 경찰들은 그런 이들을 기어코 제압해 수갑을 채웠다.
사냥감마냥 수갑이 채워진 채 포획된 수십 명의 중독자들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경찰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눈이 벌게진 경찰들은 마치 수집이라도 하듯 거리 곳곳에 숨은 중독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이고 있었다.
태일은 그 꼴을 보며 마담의 말을 떠올렸다.
“부임하자마자 내부 기강 잡기 정도야 할 수 있지만,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없죠.”
마담이 틀렸다.
서장은 부임한 바로 다음 날부터 대대적인 작전에 들어갔다.
“서둘러야겠군.”
태일의 말에 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서는 그야말로 한산했다.
붉은 먼지가 쌓인 채 정차하고 있던 경찰차들은 전부 출동했는지 주차장이 텅 비어 있고, 흡연소나 자판기 앞에서 농땡이 치는 경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제인은 긴장된 얼굴로 앞장서서 LAPD 마크가 새겨진 문을 열었다.
짤랑!
문이 열림과 동시에 민원대에 서 있던 경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십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
상대가 태일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태일 역시 군기가 바짝 선 채 응대하는 경찰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일전 화물열차 사건 당시 태일의 조사를 맡은 막내 경찰이었다.
당시 비뚜름하게 달려 있던 명찰이 지금은 똑바로 달려 있었다.
경장 이순철.
“진짜 뭔 일이 나긴 난 모양이군.”
태일은 당시 녀석이 한 말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울 벌룬은 또 뭔데? 쉽게 설명하라고, 쉽게.”
“너, 이 새끼. 잠시 기다리고 있어. 잡범 주제에 날 무시해?”
신참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던 녀석.
그런 녀석이 이제야 비로소 신참 티를 내면서 민원대를 지키고 있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는 애써 태일을 무시한 채 제인을 바라보았다.
마약과의 전쟁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과거 마약 유통에 대해 고발한 태일의 경찰서 방문은 차라리 악몽과도 같았다.
“요한 경위와 프랑켄 경사의 변호를 맡은 제인이라고 해요. 의뢰인을 만나고 싶은데, 현재 조사 중인가요?”
제인의 말을 들은 신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곧 보고를…….”
바로 그때, 뒤에서 꺽다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가슴팍에는 50구역 LAPD 로고와 함께 ‘팀장 장량’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들어오시라 그래. 그 친구들 변호권은 지켜 줘야지. 그래도 너랑 ‘한 식구’잖아?”
꺽다리 팀장이 태일과 제인을 보더니 예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뒷말에는 명백히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 그건…….”
놀란 신참은 벌게진 얼굴로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팀장은 그런 녀석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인 앞으로 다가왔다.
“들어오시죠, 변호사 님. 마침 여쭐 것도 있고.”
팀장의 시선이 제인의 옆에 서 있는 태일에게 향했다.
“제 일을 돕는 사무장님이에요. 아!”
대충 둘러대던 제인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경황 중에 태일이 이미 신임 팀장과 안면이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그러나 팀장은 빤한 거짓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술집 주인에 이어서 이번에는 사무장님이라… 직업이 다양하시군요.”
“내가 좀 능력이 있어서.”
태일은 대충 대꾸하면서 텅 빈 사무실 내부를 살폈다.
사무실에서는 이전과 달리 음식 잔반 냄새나 담배 냄새가 풍기지 않았다. 대신 희미하게 화약 냄새가 남아 있었다.
마피아와 결탁한 경찰은 더 이상 없다.
전쟁을 준비하는 경찰이 있을 뿐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