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28화 (29/220)

28화 제3의 세력 (2)

일주일 전, 태일은 SB의 유통을 막고, 마피아 조직 사이를 중재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마피아들의 자멸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뒤로 변한 것은 없었다.

마피아들은 이전처럼 환락가에 군림했으며, 마약쟁이와 주정뱅이는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았다.

환락가 바깥의 50구역 공장들 역시 평소처럼 가동되고 있을 것이다.

지옥이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50구역은 여전히 시궁창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떻게든 환락가를, 50구역을, 그리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계속 시도할 것이다.

나쁜 방향이든 좋은 방향이든 말이다.

태일의 코앞까지 다가온 검은 외투의 남자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말 좀 물읍시다.”

그의 옆에 선 꺽다리 남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태일은 환락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의 몸에서 느껴지는 소울은 지금껏 만난 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샬롯은 물론, RSB에 취한 셸터의 테러리스트들을 상회하는 수준이다.

리볼버나 도검으로 무장한 마피아들 따위는 결코 두 사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이런 괴물이 갑자기 50구역에, 그것도 환락가에 나타난 걸까?

술 한잔 걸치기 위해서?

도박을 즐기기 위해?

“우리가 여긴 처음이라서 그러는데…….”

아니. 두 사람은 어떤 ‘변화’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왔을 것이다.

말을 걸어온 남자가 끼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더니 부리부리한 눈으로 태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괴물은 괴물을 알아본다.

“당신, 이곳 사람이오?”

“…아니.”

태일 역시 그의 까만 눈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불편한 정적이 이어진다.

견디다 못한 꺽다리 남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하하하, 그… 우린 그저 괜찮은 술집 있나 물어보려고 했죠. 근데 뭐, 여기 분이 아니라고 하시니…….”

“있어.”

“…예?”

어설프게 둘러댄 말에 태일이 선뜻 대답하자, 꺽다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있다고, 괜찮은 술집. 아니, 정확히는 생길 예정이지.”

“…….”

“레미제라블이라고, 골목 안쪽에 있는 바인데, 내가 인수할 예정이거든.”

꺽다리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술집 주인이라는 말이지… 당신이?”

검은 코트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곧.”

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제라블’이라… 기억해 두지.”

“그럼 난 갈 길이 바빠서 이만.”

태일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둘의 옆을 지나쳐 갔다.

태일 역시 둘의 존재에 호기심을 느꼈지만, 애써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애당초 세연을 찾을 생각뿐이었건만, 의도치 않게 이쪽 세계에 지나치게 깊이 개입해 버리고 말았다. 필요 이상으로 얽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빌어먹을.”

하지만 또다시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태일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난… 이쪽 사람이 아니야.’

거듭 되뇐다.

레미제라블에 대해 괜히 말해준 건 아닐까 후회하면서.

멀어지는 태일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꺽다리가 조용히 물었다.

“뭘까요, 저 인간?”

술집 주인?

마피아라 해도 믿기지 않을 판에 그의 입에서 나온 직업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곧 알게 되겠지.”

담담히 대답하며 다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살짝 표정을 구겼다.

“근데 저 자식, 몇 살인데 계속 반말이야?”

삐리리리리―

바로 그때, 남자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 * *

요란한 소음과 매캐한 연기 속에서 열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로 입을 가렸다.

하이퍼루프(Hyperloop)까진 아니더라도 증기기관차는 너무하지 않은가. 다른 세계라고는 하지만, 기술 격차만큼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메타휴먼(Meta―Human). 몸에 피가 흐르지도, 심장이 뛰지도 않지만, 영혼[Soul]을 가진 존재.

“아, 선배. 형수님 저기 오십니다.”

표정 변화 없이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가만히 주변을 살피던 프랑켄이 플랫폼 저편을 가리켰다.

“진짜? 어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요한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뭐야? 왜 저 꼬맹이들을 달고 오는 거지?”

과연 이쪽으로 다가오는 제인의 옆에는 두 꼬마, 앨리스와 지우가 있었다.

주변을 서성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요한의 모습에 짜증이 나 있던 태일은 말없이 제인 일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어이! 기다려!”

그 모습을 본 요한이 황급히 태일의 뒤를 따랐다.

자신을 배웅 나온 태일과 요한, 프랑켄의 모습을 본 제인이 빙긋 웃어 보인다.

“아저씨!”

“형!”

앨리스와 지우 역시 반색하며 태일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굳이 나올 필요는 없는데…….”

입에서 나온 말과 달리 제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천방지축 아이들을 시설로 데려다주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우와 앨리스가 따라 돌아온 걸 보면, 돌아오는 과정 역시도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태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담담히 말했다.

“당신을 경호하기로 계약했으니까.”

뒤쪽에 있던 요한이 그런 태일의 어깨를 밀어 내며 다짜고짜 제인에게 다가섰다.

“제, 제인!”

“…….”

제인이 얼굴을 구기며 요한을 노려보았다.

당장 제인을 끌어안으려던 요한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주춤하며 물러서고 말았다.

Z―rail을 위시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제인은 한사코 요한을 만나 주지 않았다.

자신의 행보를 아버지에게 알리면서 하마터면 태일을 비롯한 일행이 히트맨에 의해 살해당할 뻔했고, 심지어 제인 자신마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제인은 아무리 자신을 걱정해 벌인 선택이었다 해도 그런 사태를 야기한 자신의 약혼자를 용서하지 못했다.

제인은 요한을 완벽히 무시한 채 애꿎은 태일을 노려보았다.

“이 사람한테 내 일정을 알려 줬나요?”

“아니. 난 당신이 알려 준 줄 알았는데.”

세 시간 전쯤, 요한이 웬일인지 먼저 태일에게 연락해서는 함께 제인의 마중을 가자고 권유했다. 당시 요한은 이미 제인의 기차 도착 시간을 알고 있었다.

요한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제인, 미안해. 나는…….”

“제 열차표를 조회했군요.”

“…….”

제인의 날 선 목소리에 요한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LAPD의 권한으로 Z―rail의 열차 예매 내역을 조회하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한은 지난 일주일 사이 50구역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이들을 일일이 조회했고, 간신히 제인의 예매 기록을 찾아냈던 것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우와 앨리스는 입을 다문 채 제인의 눈치를 살폈다.

요한은 변명을 포기했고,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빠아아아아앙!!

철컹, 철컹!

열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요한을 노려보던 제인이 실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 대체 얼마나…….”

태일은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풀려난 직후, 제인은 태일과 연락이 닿자마자 요한의 안부부터 물었다.

50구역에서 벌어진 그 어떤 일들보다도 연인에 대한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아무리 용서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 해도 제인은 여전히 요한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차피 칼로 물 베기와 같은 사랑싸움일 뿐이다.

“일단 진정하는 게 좋겠는데.”

하지만 한번 폭발한 제인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

제인의 성난 목소리 때문인지 사람들이 몰려든다. 태일은 뒤쪽의 인기척을 느끼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인은 요한에게 역정을 내고 있었다.

“요한, 당신. 대체 얼마나 나를 실망시켜야……!”

“잠깐. 대화 중에 미안하네만…….”

뒤쪽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결국 제인이 말을 멈춘다.

“뭐죠?”

제인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선글라스를 낀 검은 코트의 남자가 서 있었다.

“공무가 있어서 말이오. 실례하지.”

그의 뒤에는 한 무리의 경찰들이 집결해 있었다.

몰려든 경찰들의 모습을 본 앨리스와 지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태일 역시 차갑게 굳은 얼굴로 경찰들의 면면을 살폈다.

‘경찰이었나…….’

태일은 씁쓸함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환락가 거리에서 만난 선글라스 남자와 꺽다리.

두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어라? 당신…….”

꺽다리가 태일을 알아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검은 코트 남자 역시 태일을 보며 아는 척을 해 왔다.

“아까 그 친구로구만. 술집 주인…이라고 했던가?”

“여긴 무슨 일이지?”

태일의 말투는 딱딱했다.

LAPD는 테러가 터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 하루가 꼬박 지난 뒤에야 몇몇 경관들이 나타나 마피아들에게 뒷돈을 받아 챙겼을 뿐이다.

그때까지도 사거리에는 시체가 여럿 널브러져 있었지만, 경찰들은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주변을 정리하고 수습하라’는 형식상의 지시만 내렸다.

현장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마피아에게 현장 정리를 맡기는 경찰.

그 광경에 태일은 LAPD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버렸다. 50구역 LAPD는 완벽히 제 기능을 상실한 허수아비들이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경멸 섞인 태일의 반응을 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서게. 자네를 찾아온 건 아니니까. 거기 꼬맹이들, 너희한테도 볼일 없으니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다.”

과연 지우는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달아날 구석을 찾고 있고, 앨리스는 완전히 얼어붙은 채 태일의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경찰의 등장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 아닌 요한과 프랑켄이었다.

둘은 도열해 서 있는 동료 경찰들을 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이들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게다가 신임 서장과 팀장까지.

그렇게 얼마간 얼떨떨한 표정이던 둘은 곧 자세를 바로 하고 신임 서장을 향해 경례했다.

“서, 서장님!”

“그래, 볼일은 자네들에게 있지.”

서장이라 불린 검은 코트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어 그의 옆에 있던 꺽다리가 나지막이 명령을 내렸다.

“체포해.”

도열해 있던 경찰들이 둘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깜짝 놀란 제인이 급히 앞으로 나섰지만, 이어진 꺽다리의 목소리는 그런 제인의 발걸음을 붙잡을 만큼 차가웠다.

“요한 파머, F―2020. 너희 두 사람을 통신법 위반, 국가정보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다. 너희들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다. 너희의 모든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곧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요한과 프랑켄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졌다.

그 꼴을 본 제인이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죠? 영장을 보여 봐요!”

과연 변호사답게 제인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영장을 언급했다.

그러나 꺽다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근무시간 중 제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해 역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받고 도주의 우려가 있다 판단했습니다. 부득이하게 긴급체포를 결정했죠.”

“괜찮아, 제인. 아무 일 없을 거야.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아.”

요한이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상기된 얼굴의 제인을 달래지는 못했다.

한편, 태일은 줄곧 경찰 무리를 이끄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다.

무수한 희생이 발생한 테러 현장에서조차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던 경찰이 갑자기 제 동료를 체포하고 있다. 서장을 따르는 경찰들의 굳은 표정을 보건대, 테러 현장을 방문한 며칠 전과 달리 지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아마 이 모든 변화를 야기한 이들은 바로 눈앞의 두 사람일 터였다.

일을 마친 서장 역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태일을 바라보았다.

“의도치 않게 험한 꼴을 보였군.”

“험한 꼴은 무슨. 그저 일일 뿐인데.”

태일의 말에 서장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이게 내 일이지. 자네 술집, ‘레미제라블’이라고 했던가? 꼭 찾아가지.”

“…언제든지.”

지우와 앨리스는 경찰서장과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태일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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