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제3의 세력 (1)
사거리 테러 사건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비가 멎은 뒤에도 날씨는 맑아질 줄 몰랐다.
한낮임에도 볕이 내리쬐지 않았고, 붉은 흙먼지가 휘날려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영업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한산한 와중에 평소 보기 힘든 차림의 남자 둘이 환락가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동네구만.”
검은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망가진 채 방치된 공중전화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내의 몸은 코트에 가려져 있지만, 살짝 드러난 가슴과 복근에는 탄탄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선배, 이쯤 되면 영락없이 좌천 아닙니까?”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남자는 마른 체형에 키가 2미터가량 되어 보이는 꺽다리였다.
갈색 뿔테 안경을 쓴 그는 골목 한구석에서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약쟁이를 바라보며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선배라 불린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승진 발령 난 지 하루밖에 안 됐어.”
“50구역에 오신 지도 하루밖에 안 됐죠.”
“…….”
“여기 와 봐야 답이 나오겠습니까? 여긴 그냥 답 없는 땅입니다.”
“글쎄, 어떠려나.”
꺽다리는 사내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 고집을 누가 말릴까.
한번 마음먹은 이상, 사내는 결코 발걸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하아, 알겠습니다. 들어가 보시죠, 어디.”
두 남자는 천천히 환락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밤에는 황금빛 거리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환락가이지만, 태양 아래 드러낸 민낯은 공허, 그 자체였다.
거리를 걷는 내내 보이는 이들이라고는 술과 마약에 취해 널브러진 머저리들과 멍한 표정의 술집 여자들뿐이다.
“여기, 바로 지난주에 테러 사건이 터진 곳 아닙니까?”
“그래.”
“아니, 이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테러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환락가였지만, 약쟁이와 도박쟁이, 주정뱅이들은 이 거리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어디로 떠난단 말인가.
살아 있는 이상 그들은 이 환락가를 벗어날 수 없다. 이곳에서 영혼이 죽은 채 좀비처럼,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꺽다리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약쟁이의 시선을 피하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건 당최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그래. 기대 이상이군.”
듣는 둥 마는 둥하는 남자의 영혼 없는 대꾸에도 꺽다리는 애써 설득에 나섰다.
“선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진짜 아닙니다. 못 하겠다고 합시다. 잘만 말하면 물러 줄지도 몰라요.”
마피아에 의해 지배되는 땅.
이 화려한 거리는 꺽다리의 눈에 사실상 지옥이었다.
이런 땅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차라리 그냥 병가를 내고 드러누워 버리는 게…….”
턱.
말을 이어 가던 꺽다리의 가슴팍에 갑자기 선배의 큰 손이 닿았다.
“…선배?”
꺽다리는 발걸음을 멈춘 채 선배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선배의 표정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팽팽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의아함을 느낀 꺽다리가 고개를 돌려 앞쪽을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뚜벅.
웬 장발남자가 코트를 입은 채 반대쪽에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발남자는 입에 담배를 물었지만, 정작 불씨가 없다.
큰 키,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 그리고…….
‘이런, 젠장.’
소울.
꺽다리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언뜻 보기에 평범한 행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이지만, 지금 이 순간 꺽다리는 장발 남자의 이질성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레귤러(Irregular), 그것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거물급.
방금까지 흐느적거리던 꺽다리의 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괴물이군요.”
꺽다리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검은 코트 남자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장발남자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둘에게 고정된다.
꺽다리는 침을 삼키며 조용히 말했다.
“선배, 아직 업무 보고 전입니다. 아시죠?”
“…지랄.”
짧게 욕설을 내뱉은 사내는 무언가 마음이라도 먹은 듯 어느새 장발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선배!”
꺽다리가 급히 그를 뒤따라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부디 선배가 이번만큼은 사고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 * *
30여 분 전.
태일은 중앙역 지하에서 50구역 레지스탕스 소속의 남자 둘과 마주하고 있었다.
흰색 가면과 검은 망토.
둘은 정체를 감추기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한 채 태일 앞에 나타났다.
“…회담 장소로는 적격이군.”
오른편에 선 남자가 조그맣게 비아냥거린다.
민호의 말투다.
‘저럴 거면 굳이 가면을 쓸 필요가 있나?’
태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인적 없는 장소도 드물지.”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중앙역에는 평소 붐비던 거지나 노숙자들이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역내로 오물 섞인 빗물이 고이면서 구역질이 나올 만큼 고약한 냄새가 풍긴 탓이었다.
웬만한 악취에 아랑곳하지 않는 거지와 노숙자들마저 견디지 못해 모조리 밖으로 나가 버릴 정도였다.
물론 덕분에 지금 태일과 레지스탕스의 두 사람은 그 끔찍한 냄새를 묵묵히 견뎌야 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토굴보다야 여기가 낫지.”
태일의 시선은 민호의 옆에 선 흰색가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민호에게 반드시 대장을 불러 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눈앞의 남자가 정말 대장일 확률은 희박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결정권을 가진 간부급이 나왔을 것이다.
“그래, 마피아 보스가 무슨 일로 날 찾은 건가?”
가면 안쪽에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지만, 말투에 묻어난 경계심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피아 보스라…….”
태일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장님, 그건…….”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피아 우두머리 자리를 넘겨받았잖나.”
민호가 태일을 변호하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간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확실히.”
태일 역시 굳이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태일은 마피아 조직 ‘마로트’의 보스, 샬롯의 자리를 공식적으로 승계했다.
제대로 된 부하 한 명 없지만, 지금 50구역에서 태일의 신분은 분명 마피아 보스였다.
세연이 이 상황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아마 깔깔거리며 날 비웃겠지.’
그녀와 다시 만났을 때, 그런 반응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낸 태일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샬롯이 운영하던 사업장, 전부 당신들이 맡아.”
찰나의 침묵.
“…뭐?!”
깜짝 놀라 반문한 이는 다름 아닌 민호였다.
민호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흥분한 듯 목울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 들은 거 같은데…….”
민호와 달리 간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과연 지하조직 생활에 잔뼈가 굵은 인간답게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간부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그만큼 태일의 말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아니. 제대로 들었어. 샬롯이 운영하던 영업장 전부 당신네들 가져.”
간부는 이해 못 할 소리를 내뱉는 태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태일이 넘기려 하는 영업장들의 총 규모는 50구역 환락가의 1/3이다. 한데 그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그냥 내주겠다는 것이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게 아닌가? 우리더러 그 업소들을 운영하라니. 우리는…….”
“그래, 레지스탕스지. 나도 알아. 난 지금 당신들더러 그 업소들을 운영하라는 게 아니야. 그냥 가지라고 말하는 거야. 전부 철거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간부가 태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겠군. 하루아침에 샬롯의 유산을 전부 손에 넣더니, 이젠 우리에게 넘긴다고?”
“그래.”
“…바라는 게 뭔가?”
간부는 엄청난 규모의 자산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온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냉정은 불신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지하에 머무르며 자신들의 이름조차도 허상인 자들.
그들에게 불신은 최선의 생존 전략이었다.
물론 태일 역시 선의로 모든 것을 넘길 정도로 무른 인간은 아니었다. 태일은 그저 레지스탕스에 원하는 게 있을 뿐이다.
“레미제라블.”
세연의 보물.
“…그 허름한 술집을 달라고? 그게 샬롯의 유산을 넘겨받는 대가라는 건가?”
간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그는 레미제라블을 두고 ‘허름한 술집’이라 했지만, 세연이 만든 바는 많은 주민들이 찾는 장소였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세연이 사라진 이후로 레미제라블은 레지스탕스의 귀가 되었다.
사방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두었고, 온갖 정보들을 얻었다.
그만큼 레지스탕스에는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그리고 태일은 그 장소를 포기하는 대가로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제시했다.
“그래. 세연이가 사라지기 전의 모습으로 복구해서 넘겨.”
“…….”
세연이 사라지기 전의 레미제라블. 거기에는 무기로 가득 찬 창고도, 창고와 이어진 비밀 통로도, 손님들의 말을 엿듣는 도청 장치도 없었다.
주민들의 안식처이자 달콤한 주향(酒香)이 맴도는 장소.
태일은 그런 레미제라블을 넘겨받고자 했다.
세연이 이쪽 세계의 환락가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가장 먼저 그녀의 발걸음이 닿을 장소는 아마도 ‘레미제라블’일 터였다.
레지스탕스 간부는 그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려는 듯 태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그는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난 자네가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네. 한세연의 연인이 마피아의 유산을 넘겨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남자가 두 손을 올려 흰색 가면의 양 끝을 붙잡는다.
“하지만… 이제 보니 사실이었나 보군.”
그 순간, 담배를 꺼내던 태일의 손이 멈추었다.
남자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흰색 가면을 벗은 것이다.
“대, 대장님?!”
민호가 깜짝 놀라 외쳤다.
주름진 얼굴에 또렷이 빛나는 눈, 뺨에 길게 난 칼자국, 각진 턱.
태일은 모처럼 집어 든 담배를 놓치고 말았다.
맨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민호가 데려온 남자, 그는 틀림없이 레지스탕스의 대장이다.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겠지.”
변조되지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대원들을 대신해서 자네의 결단에 감사를 표하지.”
대장이 진중한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안하네. 그녀가 남긴 공간을 우리 멋대로 훼손시켰어.”
태일은 조용히 다른 담배를 꺼내 들었다.
“…3일 주지. 그사이 전부 원래대로 돌려놔.”
“약속하지.”
대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은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고, 그것은 약속의 보증과도 같다.
더불어 그에게는 다른 한 가지 의도가 있었다.
“자네, 우리와 함께하는 게 어떤가?”
대장이 욕심을 숨기지 않은 채 제안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조직에 대한 사명감, 신념을 관철하고 싶은 절실함이 깃들어 있었다.
“자네의 연인도 우리에게 힘을 빌려줬네. 사업장을 넘겨줄 게 아니라 그냥 자네가 우리와 함께하면 될 일이 아닌가.”
“거절하지.”
옛날의 태일이라면 선뜻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제안이다. 열정에 기대서, 희망에 의지해서 자유를 위해 싸우려 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함께했다. 자유를 위해 싸웠고, 잠깐은 그 자유를 쟁취했다는 착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이젠 지긋지긋해서 말이야.”
그러나 태일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보았다.
되풀이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었다.
태일은 실패했고, 이쪽 세계 역시 그 결말이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해야 할 일도 있고.”
태일은 태엽이 돌아가고 있는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가만히 움켜쥐었다.
세연, 그녀는 분명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쉽군.”
대장은 다시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한동안 태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 * *
중앙역을 벗어난 태일은 생각에 잠긴 채 환락가를 걸었다.
그와 동시에 줄곧 레지스탕스 대장이 맨얼굴을 드러낸 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가면을 벗었을 당시, 태일은 그 어느 때보다 놀랐다.
다른 세계, 다른 시대, 그러나 비슷한 조직, 비슷한… 사람.
‘그저 착각이야…….’
대장의 얼굴은 너무나도 닮았다.
15년 전, 갈 곳 없던 태일을 거두어 준 남자, 당시 레지스탕스의 전 대장과.
그는 레지스탕스답게 수십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뛰어난 활약으로 인해 ‘하얀 늑대’라고 불렸다.
가면을 벗은 대장의 얼굴을 본 순간, 태일은 잠시 하얀 늑대가 이쪽 세계에 넘어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장은 이미 죽었어.’
결박된 하얀 늑대의 몸에 수십 발의 총알이 박혀 들던 순간을 태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공개 처형 현장에 흐르던 피와 집행 군인들의 총구에서 풍겨 오던 화약 냄새는 여전히 잊히지 않았다.
하얀 늑대의 시신을 자신이 직접 화장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답답해진 태일은 담배를 문 채 코트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는 세연의 생존을 알리듯 바삐 움직이고 있다.
‘만약 시계와 연결된 세연이…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니라면…….’
한동안 말없이 시계를 바라보던 태일은 마음을 정리하며 시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세연이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다고 믿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둔 채 그녀를 찾을 것이다.
그렇게 각오를 다질 즈음, 태일은 어느새 환락가 입구까지 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태일은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두 남자를 보았다.
태일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