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무법자의 밤 (2)
시작과 동시에 끝나 버린 결투에 공장 내부는 얼마간 고요했다.
지금 이 순간, 마피아들의 침묵은 당혹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과 무관했다. 그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나마 머리 회전이 빠른 이들은 이미 끝나 버린 결투 현장을 보면서 어떻게든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결투의 시작과 동시에 둘은 쓰러졌고, 태일이 혼자 서 있다. 쓰러진 둘은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
잠시 뒤, 그 장면의 의미를 깨달은 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왔다.
“혀, 형님!!”
“카츠미 님!!”
태일이 전력을 조절했기에 둘 모두 죽지는 않았다.
그저 몸이 마비되어 잠깐 동안 움직일 수 없을 뿐이었다.
물론 승리 선언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승자는 신태일 님입니다.”
입회자의 담담한 선언과 함께 결투가 싱겁게 끝나 버렸고, 그제야 마피아들의 얼굴에 저마다의 감정이 드러났다.
황당함과 분노, 그리고 불신.
“승자? 개소리하지 마!!”
페이진의 상태를 확인한 천중회 쪽 들창코 남자가 태일을 향해 마구 고함을 질러 댔다.
“너 이 새끼, 대체 무슨 속임수를 쓴 거야!”
철컥!
들창코가 리볼버를 꺼내 들고는 다짜고짜 태일을 겨누었다.
신성한 결투, 규칙, 명예를 아무리 읊어 봐야 결국 이들은 무법자(無法者)다. 들창코가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긴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볼버가 발사되는 순간, 들창코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암흑가의 법을 짓밟은 그를 모든 마피아들이 응징할 테니까.
다른 마피아들은 결투 현장에서 쏘아지는 총알의 무게를 잘 알고 있기에 섣불리 무기를 꺼내 들지 못했지만, 들창코가 대신 방아쇠를 당겨 주길 바라고 있었다.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카게구미의 마피아 몇몇이 검의 손잡이에 다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카츠미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카게구미의 꽁지머리 무사가 그런 움직임을 제지했다.
“검에서 손을 떼라. 카게구미는 결과에 승복한다.”
그 말을 내뱉은 꽁지머리의 눈 역시 태일에 대한 살의로 빛나고 있었지만, 카게구미 측 마피아들은 그의 말에 따라 조용히 칼에서 손을 뗐다.
“승복? 승복이라고?!”
카게구미 쪽이 순순히 물러나자, 애가 탄 들창코는 더욱더 악을 써 댔다.
“저놈이 트랩으로 장난질을 해 놓은 거야, 이 등신들아! 그렇지 않았다면 감히 저놈이 어떻게 형님을……!”
그러나 열을 올리던 들창코는 곧 모두의 시선이 자신의 손가락에 몰려 있음을 깨달았다.
“이, 이 비겁한 새끼들!!”
이 순간, 들창코는 제물이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면 모든 게 시작된다.
들창코는 암흑가의 법을 어긴 대가로 살해당하겠지만, 공장의 소유권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 젠장!”
들창코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쥔 채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태일은 들창코의 도발이나 마피아들의 비겁한 협잡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태일은 공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카츠미의 승리로 종결된 체스판 위에는 아직까지 몇 개의 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체스 게임은 폰이나 나이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끝은 킹으로 결정된다.
지금 태일이 쓰러뜨린 카츠미와 페이진은 킹이라기보다 나이트 정도에 불과했다.
소울벌룬을 둔 게임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바로 그때, 곰 가면의 거인이 꿈틀거렸다.
뿌득.
태일의 시선이 곰 가면을 쓴 거인 쪽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곰 가면은 자신의 팔을 꿰뚫고 있던 정을 뽑아냈다.
“…한심하군.”
거인이 쓴 가면 뒤로부터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거인의 목소리는 그저 중얼거림에 불과했지만, 동굴 속 메아리처럼 사방을 울렸다.
“결투? 명예? 너희는 그저 썩은 고깃덩이에 몰려드는 하이에나일 뿐이야.”
마피아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곧이어 마피아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벽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곰 가면을 쓴 거인이 똑바로 선 채 마피아들을 노려보고 있던 것이다.
구속하던 정을 뽑아냈지만, 거인의 양팔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의 양팔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져 나온다.
들창코는 슬그머니 총구를 내리면서 곰가면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싸움에 진 개가 감히…….”
하지만 들창코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퍼퍽!!
기분 나쁜 소리가 공장 전체를 울리면서 온 사방에 피가 튀었다.
털썩.
입회자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엎어진 입회자의 목에는 무언가가 관통해 지나간 듯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나 피는 단 한 방울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원래부터 생명 없는 인형인 것처럼 돌덩이로 변해 버렸을 뿐이다.
“커, 커…걱.”
사방에 튄 피는 들창코의 것이었다.
곰가면이 날린 정(釘)은 입회자의 목을 관통한 뒤, 들창코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혀 들어가 있었다.
들창코는 손에 쥐고 있던 리볼버를 떨어뜨리면서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들창코의 몸뚱어리가 잠시 동안 경련하듯 움찔거렸지만, 결국 그조차도 이내 완전히 멈추었다.
툭.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사태에 마피아들은 모두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크큭, 방아쇠를 당겼어야지…….”
곰가면이 음산하게 웃는 가운데 그의 근육들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킬러베어가 얘들을 탈출시켰어요. 저희를 탈출시키면서 동생들을 반드시 지키라고… 했어요.”
태일은 아이들이 말한 ‘킬러베어’가 바로 이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킬러베어는 이때껏 쏟아 낸 피 때문인지 살짝 비틀거렸지만, 여전히 기괴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혹시라도 방아쇠를 당길 베짱이 있었다면 살려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킬러베어가 어째서 아이들을 살렸는지 모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그는 그저 괴물일 뿐이다.
“입 닥쳐, 덩어리.”
그것도 스테로이드제에 절여진 괴물.
파츠츠츠―
곧이어 태일의 손가락 사이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크, 크으윽…….”
“으, 대체…….”
페이진과 카츠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 * *
태일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며 눈앞의 괴물, 킬러베어를 바라보았다.
킬러베어로부터 느껴지는 힘의 폭주는 이미 샬롯마저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이성까지 유지하고 있다.
SB가 유통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킬러베어와 같은 놈들이 등장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으면서 이성까지 유지한 괴물들. 놈들은 SB와 완전히 동화된 상태였다.
“신태일이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방아쇠를 당긴 건 너겠군.”
쩌저저적.
“엄청난… 힘이군. 정말이지… 취할 수밖에 없는 힘이야.”
킬러베어의 등이 꿈틀거리더니, 정체불명의 촉수들이 살갗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끔찍한 형상에 마피아들은 뒷걸음질 쳤다.
“좋군…….”
킬러베어는 꿈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자신의 몸을 뚫고 나온 촉수들을 바라보았다.
두 개… 네 개… 여섯 개…….
촉수는 계속해서 튀어나왔고, 잠깐 사이에 벽면을 다 덮을 정도가 되었다.
마피아들은 물론, 정신을 차린 페이진과 카츠미까지도 그 역겨운 모습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킬러베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가면을 벗어 젖혔다.
이어 가면 뒤로 숨겨져 있던 킬러베어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의 얼굴 피부는 완전히 뒤틀린 상태였다. 살점이 짓이겨져 코와 입술의 형태조차 사라져 버린 가운데, 볼과 턱은 녹아내린 채 망가져 있다.
샬롯과 달리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놈의 촉수는 분명히 실체를 지녔고, 역한 피 냄새에는 SB 특유의 향이 섞여 있었다.
변태(變態)를 마친 킬러베어는 마치 저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양팔을 벌리며 당당히 선언했다.
“오늘부로 50구역은 ‘정화’된다.”
피와 점액으로 덮인 촉수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공장 전체를 뒤덮었다. 마피아들은 촉수를 피해 공장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방금까지 서로를 향해 총과 칼을 겨누던 이들이 이젠 등을 마주한 채 벽면으로 뻗어 가는 촉수들을 두려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카츠미는 몸을 낮춘 채 천천히 검을 빼 들었고, 페이진 역시 떨리는 손으로 리볼버를 장전했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마피아들은 제각기 무기를 꺼내 들며 천장까지 뒤덮어 버린 촉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사이, 슬쩍 태일의 옆으로 다가온 페이진이 중얼거렸다.
“이봐, 당신. 저 괴물 새끼를 쓰러뜨릴 생각인 거 맞지?”
“…….”
“못다 한 승부는 저 괴물 놈부터 없애고 나서 결판을 보자고.”
“우린 이미 졌습니다, 페이진.”
이미 끝나 버린 결투를 스리슬쩍 뒤집으려는 페이진의 얕은 시도에 카츠미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고는 태일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의 목표물은 같다고 생각합니다만…….”
태일은 카츠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킬러베어의 몸에 소울벌룬이 완전히 녹아든 이상, 구식 무기로 무장한 마피아들은 놈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마피아들은 눈앞 괴물의 재물이 될 것이고, 어쩌면 마피아 조직 자체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과거, 다른 세계에서 50구역에서 그랬듯이.
태일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중재’라는 것을 하기 위해 여기에 왔으니까.
손에 가만히 푸른 전류를 휘감는다.
파츠츠츠―
선명하게 구현된 전류를 본 페이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레귤러(Irregular)였구만.”
그리고 바로 그때, 카츠미의 옆에서 호위하듯 서 있던 꽁지머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옵니다!”
그와 동시에 촉수들이 사방에서 덮쳐 왔고, 공장 정중앙에 놓인 탁자와 체스판이 산산조각 나 버렸다.
마피아들은 꽤나 수다스러웠다. 아무래도 그건 이름에 집착하며 생긴 특성일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사람은 자연스레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니까.
사방에서 날아오는 촉수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도 마피아들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을 내뱉었다.
물러서지 마라, 저리 비켜라, 막아라, 공격해라, 총을 쏴라, 총으로는 안 된다…….
아마 개중에는 페이진과 카츠미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탕! 탕!
서걱!
마피아들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촉수를 닥치는 대로 공격했다. 촉수들은 의외로 느리고, 손쉽게 잘렸으며, 총알 한 방에 터져 나갔다.
의외로 잘 먹히는 공격에 마피아들은 처음 한순간 안도했고, 심지어 자신감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태일은 그조차도 킬러베어가 의도한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잘리거나 구멍 뚫린 촉수는 순식간에 재생해 복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세 갈래로 분열했다.
베어 내고, 구멍을 낼 때마다 촉수는 분열을 거듭했고, 점차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끝이 없는 전투와 분열.
싸움이 거듭되면서 마피아들은 자신들의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점차 마피아들의 목소리가 줄어들었고,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저 기계적으로 촉수를 자르고, 또 자를 뿐이었다.
그 와중에 눈치가 빠른 녀석들은 슬슬 난전 속에서 살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껏 표적 역할을 하던 촉수들이 도망자들을 향해 공격다운 공격을 시작했다.
“우, 우와아아악!!”
출입구를 향해 내빼던 마피아들이 촉수에 붙잡힌 채 공중으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다. 그렇게 내팽개쳐진 마피아들은 머리가 꺾이고 뼈가 으스러졌다.
한편, 전투 내내 킬러베어의 시선은 오로지 태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츠팟! 츠츳!
태일이 고압 전류를 뭉쳐 세 개의 촉수를 잘라 내자 공중에 매달린 마피아들이 풀려났다. 하지만 잘려진 촉수는 금세 재생되었다.
“젠장…….”
태일 역시 촉수를 잘라 내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태일은 몇 차례나 단독으로 킬러베어의 심장을 노렸지만, 전류를 쏘아 보낼 때마다 여분의 촉수들이 본체 앞을 단단히 가로막았다.
놈의 가슴팍에 손을 갖다 대 직접 심장을 부숴 버리거나, 공장 전체를 구워 버리지 않으면 놈을 쓰러뜨릴 수 없다.
그러나 공장 안에는 너무 많은 마피아들이 붐비고 있었다. 지금 태일에게 있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아무 곳에나 총을 난사해 대는 마피아들은 촉수를 늘리는 방해물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체되며 싸움은 지지부진하게 늘어졌다.
“끄아아아악!! 사, 살려 줘!”
서걱!
“우와아아!! 고, 고맙…….”
“저리 꺼져!”
태일은 공중에 매달려 있던 마피아를 벌써 스무 명째 구해 내고 있었다.
촉수로 공격을 막아 내던 킬러베어는 태일이 가까워질수록 산 사람을 낚아채 앞으로 들이밀었다.
사방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놈의 촉수와 곳곳에 흩어진 마피아들의 존재는 제법 효과적으로 태일을 전진을 막고 있었다.
태일은 그런 방해 속에서 내심 초조함을 느꼈다.
‘마피아고 뭐고 그냥 전부 지져 버려야 하나…….’
빠각!
태일의 발에 플라스틱 조각 하나가 밟힌다.
체스 말. 공교롭게도 태일이 밟은 것은 킹(king)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태일의 머리를 스쳤다.
‘체스 게임의 끝은 킹으로부터 결정된다. 즉, 킹이 잡히면 게임은 끝난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