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자켄의 옷가게 (2)
옷가게 주변을 포위했다가 갑작스레 사라진 이들의 기척을 감지한 태일이 눈앞의 ‘마담’을 노려보았다.
“…보스인가?”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옷가게 주인일 뿐이랍니다.”
검은 머리를 곱게 묶은 가운데, 두껍게 화장해 나이를 숨긴 여자.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말투는 평범한 여자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카게구미’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빛에 무사 특유의 살기가 어렸다.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기까지 했다.
“적어도 마피아들과 관련이 깊다는 것만큼은 알겠군.”
“…….”
환락가에서도 노른자위와 같은 입지를 차지하고 있는, 기괴한 옷가게. 애당초 아무런 뒷배 없이 평범한 여인이 이런 가게를 운영하고 있을 리 없었다.
마담 역시 굳이 빤한 변명을 하지는 않았다.
“마담…이요? 그럴 리가…….”
물론 앨리스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마담은 빙긋 웃어 보이며 뒤쪽의 손님용 탁상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우리 독특한 손님과는 대화가 필요할 거 같군요. 그렇죠?”
태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이 가게가 50구역에 세워진 지 벌써 35년이나 흘렀어요.”
35년 전, 기존에 있던 국가가 무너지면서 50구역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역사 시대의 마지막 국가가 무너지고, 환락가가 탄생할 때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전 이 거리에서 벌어진 온갖 일들을 목격했답니다.”
마담이 고급스럽게 생긴 컵에 차를 따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일을 고르라면 단연 7년 전에 벌어진 사건이에요.”
“…….”
태일은 갑작스럽게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페노제(Penoze). 귀족인 척하지만, 사실은 가장 천박한 자들이었죠. 지금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이름이지만.”
태일 또한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페노제, 천중회, 카게구미.
20년 전, 50구역을 지배하고 있던 세 마피아 집단이다.
태일은 레지스탕스에 들어가기 전까지 페노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만약 태일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면 자연스럽게 페노제의 마피아로 성장했을 것이다.
“천박했지만 가장 강한 자들이었어요. 충성심 강한 부하들만 수백에 이를 정도였거든요. 그리고…….”
태일은 지금 마담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거대했던 조직이 하루아침에 한 여자의 손에 괴멸해 버렸죠.”
세연, 그녀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제부터 마담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바로 어제, 그에 버금가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태일, 자신의 이야기다.
“샬롯은 7년 전 페노제와 함께 끝장난 그녀의 오빠만큼이나 잔혹한 여자였죠.”
환락가는 마피아의 거리다.
그런 곳에서 ‘잔혹함’이란 미덕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50구역이 ‘삼분(三分)’되어 있다고 믿더군요. 완전히 박살 난 페노제를 샬롯, 그 아이가 고작 3년 만에 재건해 낸 거예요. 믿을 수 없는 수완이었죠.”
잠시 말을 멈추고 태일과 앨리스의 앞에 각각 찻찬을 내려놓은 마담이 빙긋 웃으며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런 조직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린 분께서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한 조직의 보스를 ‘아이’라 불렀다.
레이조차 파악하지 못한 사실, 태일이 마로트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담이 가진 능력과 정보력은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앨리스는 마담의 정체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태일은 담담한 얼굴로 여전히 독니를 감춘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담은 빙빙 돌리지 않고 핵심을 말했다. 그랬기에 태일 역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미르파우더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르겠군요.”
“소울벌룬이라면 들어 봤나?”
순간, 찻잔을 들어 올리던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 반응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담은 소울벌룬에 대해 알고 있다.
“설마 샬롯이 그 물건에 손을 댔나요? 그래서…….”
마담은 뒷말을 삼켰다.
“그래. 내가 그 빌어먹을 극단을 부쉈어.”
태일은 마담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말을 담담하게 대신했다.
마담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다시 찻잔을 들었다.
이후, 마담이 찻잔을 비울 때까지 침묵이 계속되었다.
차를 음미하는 그녀의 표정은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찻잔을 내려놓은 마담이 가만히 태일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세연 씨와 무슨 관계죠?”
새삼 놀라운 질문은 아니었다.
페노제를 부순 세연의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한 질문이었다.
“그녀를 찾고 있다고만 답해 두지.”
“…….”
마담이 다시 입을 다물자, 태일이 말을 이었다.
“미르파우더는 SB를 만드는 원료야. 그 물건이 대량으로 50구역에 유입되어 들어오고 있더군. 바로 몇 시간 전까지도.”
마담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또다시 건드려서는 안 될 물건에 손을 댔군요. 7년 전에 그 일을 겪고도…….”
7년 전, 세연이 페노제를 부순 바로 그때였다.
세연이 페노제를 부순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SB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뒤, 환락가에서 SB의 제조는 ‘금기’가 되었다.
적어도 5년 전, 세연이 사라질 때까지는 그랬다.
태일은 이미 SB에 완전히 절여져 몸이 썩어 들어간 테디를 목격했다.
SB에 의한 신체의 침식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 고작 몇 달 만에 이를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그 구름, 3년 전부터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앨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앨리스는 인형극단의 작업실에서 일한 적도 있기에 샬롯이 오래전부터 남몰래 SB를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담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샬롯이 그렇게 단기간에 조직을 재건할 수 있던 거군요.”
SB의 힘은 실로 파괴적이었다.
샬롯이 가진 비정상적인 환상 능력도, 테디가 보여 준 괴력도 전부 SB에 의한 폭주였다.
그러나 테디의 인형 탈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썩은 냄새를 감출 수는 없었다.
샬롯 본인의 얼굴이 썩어 가는 것만큼은 강력한 환상으로도 가릴 수 없었다.
그런 부작용을 알고 있음에도 단기간에 강한 힘을 얻기 위해 SB를 사용한 것이다.
마담이 가만히 신음 소리를 내며 한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 힘을 목격한 다른 조직들도 손을 댔겠군요.”
50구역 마피아들은 이미 SB의 확보를 위한 경쟁에 들어갔다.
태일이 50구역에서 겪은 역사는 이미 이쪽 세계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7년 전, 세연이 가까스로 한 번은 멈춰 세웠지만, 결국 완전히 역사를 바꾸지는 못한 것이다.
마담이 태일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한마디를 말했다.
“당신을 돕죠.”
* * *
마담이 선물한 양복에 코트까지 갖춰 입고 옷가게를 나선 태일의 차림은 이제 환락가와 제법 잘 어울렸다.
앨리스 역시 검은 원피스를 선물 받았는데, 그렇게 입고 나니 제법 제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그전까지는 영락없이 소매치기 소년처럼 보였던 것이다.
여하튼 이제 적어도 경계 어린 눈으로 태일과 앨리스를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게다가 줄곧 따라붙던 미행도 옷가게를 기점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마담은 태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자정에 전화박스 앞에서 보자는 거죠? 알겠어요. 전달하죠.”
마담은 자신이 카게구미의 보스가 아니라고 했지만, 보스에게 직접 연락할 ‘자격’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제 말을 무조건 들어준다고 자신할 수는 없어요.”
생각보다 이야기가 잘 풀리긴 했지만, 마담의 그 한마디는 찜찜함으로 남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설득하도록 하죠.”
그저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한 한마디를 믿어 볼 뿐이었다.
마담과의 대화와 관련된 생각에 잠겨 거리를 걷던 중, 앨리스가 무언가 말할 게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기요…….”
“응?”
“기태, 만나러 안 갈 거예요?”
…잊고 있었다.
뜨끔하는 태일의 표정을 본 앨리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잊어버린 거예요?”
“…아니. 만나러 가려고 했다.”
“…어디로요?”
“…….”
…어디였더라?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태일을 살짝 노려보던 앨리스가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영락없이 토라진 앨리스의 모습에 태일은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미안.”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던 태일은 결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 * *
50구역 중앙역.
기태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꽤 오래전에 버려진 지하철역 앞이었다.
한때 교통이 발달한 요지이자 수천만 인구의 대도시를 여럿 갖고 있던 50구역은 오랜 전쟁 속에서 철저하게 파괴되고, 지하철 역시 군데군데 끊겨 버린 상태로 폐쇄되었다.
폐쇄된 지하도는 환락가에서조차 밀려난 이들이 최후로 내몰린 장소였다.
밤이 되면 수많은 노숙인들이 몰려들어 아무 데나 몸을 뉘었고, 때때로 레지스탕스 대원이 숨어들기도 했다.
말쑥한 차림의 태일과 앨리스가 지하도로 내려서자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이들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기껏 환락가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갖추었더니, 다시금 어울리지 않는 장소로 와 버린 꼴이었다.
“아저씨, 이쪽이에요.”
앨리스는 이미 몇 번이나 와 본 듯 어두침침한 역사 안쪽을 잘도 찾아 들어갔다.
언제부터 갖고 있었는지 랜턴을 꺼내 앞을 비춘 앨리스는 기능이 멈춰 버린 개찰구를 뛰어넘어 더욱 깊숙이 들어갔고, 태일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내려가 철도 레일에 도달했다.
오래전 버려진 산업 시대의 유물. 대륙 열차와 하늘을 나는 UAM이 발달한 태일의 세계에서도 지하 철도에 대한 취급은 고작 그 정도였다.
덕분에 태일에게는 이 공간이 매우 익숙했다. 레지스탕스로 생활할 당시부터 철로를 이용해 50구역 곳곳을 누비곤 했다.
때때로 토벌대가 대대적인 순찰을 벌이긴 했지만, 아예 철로가 집과도 같던 태일에게 그들을 따돌리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한창 추억에 잠겨 있던 중 동굴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짹, 짹, 짹…….”
‘찍찍’이 아니라… ‘짹짹’?
태일이 황당함에 눈살을 찌푸리던 찰나, 앨리스가 입을 동그랗게 말더니 웬 동물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꿀, 꿀, 꿀!”
새소리에 이어 이번에는 돼지 울음소리다.
장소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의 농담 같은 암구호에 태일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곧이어 지하에서 새소리를 낸 꼬마, 지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걱정했잖아!”
“미안.”
앨리스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태일을 살짝 노려보았다.
그 기세에 태일은 헛기침을 하면서 멋쩍게 한마디 했다.
“그… 암구호는 역시 바꾸는 게 좋겠다.”
그리고 잠시 뒤, 지우의 뒤쪽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나타났다.
앨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반색했다.
“얘들아, 무사했구나!!”
한편, 떼로 몰려오는 아이들을 보는 태일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