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자켄의 옷가게 (1)
‘함부로 날뛰지 마라’.
레지스탕스가 남긴 경고의 메시지.
그들은 태일을 적이라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었다.
드림 코퍼레이션 측 암살자를 제거했지만, 그렇다고 태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제인은 분명 세연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이쪽 세계의 레지스탕스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아마 그들을 만난다면 세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연이 이미 이쪽 세계로 넘어와 레지스탕스에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째각째각.
회중시계의 태엽 소리를 들은 태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앨리스가 태일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저씨, 저기!”
앨리스가 환락가 쪽을 가리켰다.
웬 남자들이 이쪽으로 줄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회색 양복에 회색 중절모를 눌러쓴 그들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낸 클론처럼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은 지붕에서 떨어져 내린 시신에 대한 관심을 접은 채 회색의 남자들을 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천중회예요.”
앨리스의 설명에 태일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로트’는 생소했지만, ‘천중회’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 태일이 살던 50구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3개 세력 중 하나였으니까.
소울벌룬을 가장 적극적으로 유통시킨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천중회는 돈이 된다는 이유로 조직 외부의 민간인들에게까지 SB를 닥치는 대로 팔아넘겼다.
저격당한 시신 앞으로 다가온 회색 남자들은 저희끼리 뭐라 중얼거렸다.
“아저씨, 여긴 위험해요.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할 거 같아요.”
앨리스가 걱정스레 태일의 옷소매를 당겼다.
그러나 그때, 회색 남자들 중 하나가 태일을 향해 손짓했다.
“어이, 거기! 너!”
경박하게 높은 목소리와 빠른 말투.
천중회 마피아들의 특성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피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태일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죄다 달아나거나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나 말인가?”
“그래, 인마. 너!”
말투만 들으면 무게감이 워낙 없어 마치 어설픈 깡패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가벼운 말투만큼이나 사람을 살해하는 것조차 가볍게 여기는 놈들이 바로 천중회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냐?”
“당신은 환락가를 찾는 손님들에 대해 전부 다 알고 있나?”
“하, 나, 이 새끼 봐라?”
히죽 웃은 남자가 건들거리며 태일을 향해 다가왔다.
뒤쪽의 회색 남자들 역시 살짝 비웃음 섞인 얼굴로 몰려왔다.
앨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태일은 도리어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거리에는 이미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천중회를 보자 꼬리를 말고 달아난 것이다.
“우리 구역에서 살인 사건이 터졌어. 그런데 웬 뻣뻣한 놈이 우리 앞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있네?”
그 말과 함께 회색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가 뒤로 손을 내뻗자 뒤쪽에 있던 똘마니가 소총을 건넸다.
“일단 ‘손님’께 겸손부터 가르치고 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할까.”
철컥!
태일은 놈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리자 곧바로 앨리스를 당기며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탕!
태일의 뒤쪽에 있던 공중전화 박스의 유리가 박살 난다.
“오~ 피했어?”
철컥!
거리 한가운데에서 다짜고짜 총을 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소총을 빙글 돌리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재장전되었다.
놈이 자신의 스핀 코킹(Spin Cocking)에 만족한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크흐흐흐, 이 맛에 내가 이 총을 못 버려.”
약 150년도 전에 나온 레버액션을 마치 애인 대하듯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
완전히 맛이 간 것처럼 들리는 남자의 말에 뒤쪽 남자들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며 낄낄거렸다.
시가지에서 벌써 두 발째 총이 발사되었건만, 여전히 LAPD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을 굳힌 태일이 넋이 반쯤 나간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뒤로 빠져 있어.”
태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실컷 웃고 있던 회색남자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눈매가 맘에 안 들어. 손님,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거 같은데…….”
다시금 태일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러나 곧이어 방아쇠를 당기려던 놈이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분명 자신이 겨누고 있던 태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파직.
그저 약한 스파크의 흔적만을 남기고.
아직 약 기운이 남은 걸까?
“혀, 형님!!”
뒤쪽에서 경망스러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파츠츠츠츠츠―
“이 자식!”
좌측에서 튀어 오르는 푸른 불꽃에 남자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차가운 손이 남자의 얼굴을 감싸 쥐며 그의 시야를 푸른 불빛이 가득 메웠다.
온몸이 바싹 구워지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남자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의 애장품이던 레버액션이 힘없이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이 새끼가!!”
쓰러진 남자를 본 일행이 제각기 가진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남자들의 손에 쥐어진 리볼버의 총구가 일제히 태일을 겨누었다.
채 1분이 지나기도 전에 태일에게 총을 겨눈 이들은 모조리 의식을 잃은 채 움찔거렸다.
오로지 단 한 명, 가장 나이 어린 똘마니만이 겁에 질린 채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청년.
묵직한 총을 대신 들고 다니는 짐꾼 정도에 불과한 녀석이건만, 나름 헐렁한 회색 정장과 중절모를 갖춰 입고 있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리볼버 같은 화기가 아니라 자그마한 주머니칼이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
갱스터들은 자신들의 상징과도 같은 복장을 아무에게나 입히지 않는다.
청년 역시 ‘신고식’을 치렀다. 이미 손에 타인의 피를 묻혔고, 익숙하지는 않을지언정 살인의 경험이 있었다.
태일이 천천히 푸른 전류로 휩싸인 손을 들어 올렸다.
“칼 내려.”
“…….”
청년은 주변에 쓰러진 ‘형님들’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당해 버린 그들에 비하면 훨씬 나약한 그가 고작 주머니칼 하나만 달랑 든 채 눈앞의 괴물을 이길 수는 없다.
모두가 의식을 잃은 가운데 거리에는 아무도 없다.
싸움을 포기한 그가 주머니칼을 떨어뜨리고는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
태일은 팔을 내리고는 굴복한 청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서 네 보스에게 전해.”
“네, 네!”
“열차 습격 건에 대해서 듣고 싶거든 오늘 자정에 전화박스 앞으로 나올 것.”
“네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청년은 허겁지겁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메시지를 전한 태일이 가만히 등을 돌려 앨리스를 불렀다.
“가자.”
“아, 잠시만요.”
앨리스는 쓰러진 남자들에게 빼앗은 물건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뒤 태일의 뒤를 따랐고, 청년은 그런 태일의 뒷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 *
환락가 안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한창 호객 행위를 하는 여자와 술병을 들고 흐느적거리는 남자, 화려한 인공 꽃잎과 화려한 깃털의 구관조, 기묘한 향수 냄새까지.
마로트를 날려 버린 날 밤과 지금의 환락가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태일은 거리 전체에 깔린 긴장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보란 듯이 칼을 찬 이들과 주변을 서성이는 회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살피는 행인들까지.
“확실히 경계가 철저해졌군.”
“…네.”
앨리스 역시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듯 걱정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까요? 곧 아저씨에 대한 소문이 날 텐데…….”
이미 소문은 퍼졌다. 앨리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장 태일의 주변에 미행이 몇이나 붙어 있었다.
“그러라고 벌인 일이야.”
중재를 위해서든, 소울벌룬의 유통을 막기 위해서든 결국 마피아 보스들과의 대면은 불가피했다. 무리들 속에 몸을 숨긴 보스를 수면 위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차하면 전부 쓸어버릴 수도 있으니, 너무 겁먹을 필요 없어.”
오만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태일의 말에 앨리스가 살짝 움찔거렸다.
태일은 이미 몇 번의 충돌을 통해 확실히 마피아와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무력의 격차를 확인했다. 그러면서 확신했다.
자신이 마음을 먹는다면 혼자서 50구역의 마피아 집단 전원을 지워 버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걸.
카우보이가 거드름 피우고 다니던 시절의 무기를 들고 다니는 이들 따위는 애당초 50구역 관리자의 목을 날린 태일의 상대가 아니었다.
“저, 전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앨리스가 태일을 올려다보며 작지만 반항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앨리스 역시 환락가에서 자란 아이다. 이 거리에서 겁에 질린 아이는, 약해 보이는 애송이는 가장 먼저 죽는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다행이고.”
평화로운 해결을 원한 제인의 의뢰는 차치하더라도 태일 역시 학살을 벌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마피아들에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얼마간 태일을 올려다보고 있던 앨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아저씨 옷, 너무 눈에 띄어요.”
하긴 앨리스의 말처럼 태일의 차림새는 환락가에 어울리지 않았다.
태일은 지금껏 낡은 군복을 입고 있던 것이다.
잠시 뒤, 태일과 앨리스를 미행하던 회색 옷차림의 소년들은 두 사람이 ‘자켄의 옷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재빨리 정문과 후문으로 흩어졌다.
“독특한 가게군.”
애당초 술집과 아편굴 따위가 몰려 있는 거리에 옷가게가 있다는 것부터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지만, 그나마 있는 옷가게조차도 기괴했다.
울긋불긋한 전통 복장과 핼러윈 데이 가면, 과도하게 화려한 파티 드레스에서부터 낯 뜨거운 속옷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옷들이 아무런 규칙성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가게 안에 손님은 단 한 명도 없다.
“독특한 손님이군요.”
안쪽 방에서 웬 여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며 태일의 말을 그대로 받았다.
“…….”
큰 키에 우아한 차림새의 여자는 언뜻 보아도 꽤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눈동자만큼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태일을 지나쳐 앨리스에게로 향했다.
“호오, 낯익은 얼굴도 있네?”
“안녕하세요, 마담.”
앨리스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자, 마담은 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흐음, 아직 이 거리에 남아 있는 줄은 몰랐는데?”
“소식 들으셨어요?”
“극단이 끝장났다는 소문이라면야 옛적에 다 퍼졌지.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니?”
“이 아저씨 옷을 좀 사려구요. 너무…….”
“눈에 띄겠구나.”
마담이 앨리스를 대신하여 말을 끝맺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이내 마담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원하는 옷이 있나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면 돼.”
딱딱한 대답에 지그시 태일을 위아래로 살피던 마담이 가게 안에 진열된 옷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편, 태일은 느긋하게 옷을 고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마로트에서 샬롯이 펼쳐 보인 환상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대체 무슨…….”
정작 앨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담과 태일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옷을 뒤지던 마담은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긴 프록코트를 꺼내 와 태일의 앞에 내밀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요.”
빙긋 웃는 마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버릇없는 꼬맹이들이 가게를 둘러싼 게 아무래도 그쪽 때문인 것 같아서 말이에요.”
마담의 말을 들은 앨리스가 깜짝 놀란 얼굴로 가게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미행이 붙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태일은 아무렇지 않게 군복 상의를 벗은 뒤, 마담이 건넨 코트를 받아 걸쳤다.
“어머, 잘 어울리는데? 코트에 어울리는 양복도 한 벌 내주죠.”
“‘카게구미’인가?”
마담은 물론, 앨리스까지도 그 자리에 굳어 버리자, 오히려 놀란 쪽은 태일이었다.
“…맞나 보군.”
50구역 환락가의 세 마피아 조직 중 하나, ‘카게구미’.
태일이 기억하는 이름 그대로였다.
태일이 카게구미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즈음.
“커, 커허억!”
옷가게 문 주변을 둘러싸듯 포위하고 있던 소년들은 골목 안으로 끌려 들어가 온몸을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조직에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은 애송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금기를 어겼다.
‘자켄의 옷가게 반경 10미터에서는 무기 소지를 금한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