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10화 (11/220)

10화 히트맨 (2)

“범인을 알 수 없다?”

제인의 말투는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꼬여 있었다.

분노를 애써 눌러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앞의 뻣뻣한 변호사를 가만히 노려보던 제인이 숨을 가다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럼 우린 다시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 방에서 곧 체크아웃하도록 하죠. 사측에는 배려에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요.”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됩니다.”

변호사는 단박에 제인의 말을 거절하더니, 마치 로봇 같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Z―rail의 사장님께서는 이번 테러 사태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아가씨를 비롯한 모든 피해자분들이 심리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보호…라구요?”

“금일 내로 심리 치료사가 방문할 겁니다. 또한 테러를 사주한 이들이 체포될 때까지 아가씨를 보호하려 하니, 아무쪼록 사측의 선의를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태일이 듣기에도 지금 변호사가 하는 말의 의미는 ‘감금’이 분명했다.

히트맨이 습격을 하더니, 이제는 철도 회사가 제인을 억류하려 들고 있다.

태일은 여차하면 변호사를 기절시키고 탈출을 감행할 생각으로 손을 움찔거렸다.

파직.

바로 그때, 지금껏 참고 있던 제인이 탁상을 내려치며 먼저 화를 터뜨렸다.

“집어치워, 레이! 이런 미친 짓, 당장 그만둬!”

‘레이?’

제인은 눈앞의 변호사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태일은 전류를 거둔 채 가만히 둘의 미묘한 분위기에 주목했다.

‘레이’라 불린 변호사는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으로 흥분한 제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객실에 머무시는 동안 최고의 경호 서비스를 제공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하지만 외상 후 심리 상태가 불안하다고 판단되는 만큼 외출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이!!”

“룸서비스를 통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원하시는 만큼 제공해 드릴 예정입니다. 물론 거기에 드는 비용 일체 역시 Z―rail 측에서 부담할 테니, 부담 없이 서비스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이는 그렇게 제 할 말만 하고 난 뒤, 냉정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가 이런다고 해서 나를 잡아 둘 수 있을 거 같아? 이건 불법이야. 알아?!”

태일은 그런 제인을 보며 이미 판세가 완전히 넘어갔음을 느꼈다.

Z―rail의 사장이라는 양반이 불법을 두려워했다면 애당초 이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겠지.

더구나 변호사를 자처하는 자가 직접 나타나서 친절하게 설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장 이 방에 지켜야 할 이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군요.”

방 어딘가에서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향하시던 곳이 어딘지도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에게 소중한 사람은 아마 그곳을 지키고 싶어 할 겁니다.”

마리아 수녀라는 사람이 운영하고 있다는 시설.

“…….”

레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제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더는 레이의 말에 고함을 지르지도, 화를 내지도 못했다.

태일은 이미 예견된 패배를 바라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왜 본전도 못 찾을 말을 꺼내서…….’

레이는 끝까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봐, 스토커 양반.”

태일의 목소리에 레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레이는 제인의 약혼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미 신상 조사는 전부 끝났다는 의미다.

그러자 문득 궁금해졌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나?”

자신이 극단을 부쉈다는 사실을 과연 놈들은 알고 있을까?

기차에서 히트맨을 막았다는 사실은?

“…알아야 합니까?”

그러나 레이의 눈동자에 떠오른 경계심은 제 입에서 나온 말과 전혀 다른 답변을 내놓고 있었다.

레이는 태일을 살짝 노려본 뒤, 그대로 등을 돌려 객실에서 나가 버렸다.

한편, 레이에게 완전히 패배한 제인은 혼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그때 본 히트맨은 완전 띨띨하게 생겼는데, 글쎄, 허리띠에 피스톨을 다섯 개나 끼우고 다니더라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지. 저러다가 제 엉덩이에 총알이 박히면 볼만해지지 않겠냐고.”

지우는 벌써 30분째 아이들에게 히트맨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스레 늘어놓고 있었다.

앨리스까지 넋을 놓고 이야기를 듣는 걸 보면, 지우의 언변이 꽤나 대단하긴 한 것 같았다. 어쨌든 덕분에 태일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다.

지금 태일이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그의 고용주이자 자괴감에 빠져 있는 제인만으로 충분했으니까.

“레이는 아카데미 동기예요.”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제인은 첫마디를 그렇게 시작했다.

“원채 어둡던 친구인데, 졸업하고 나서 가끔 들려오는 소문은 꽤 으스스했어요. 민간 군사 기업에 고용되었다는 소문은 그나마 양호했죠. 암흑가의 두목들에게 고용되어 일한다느니, 히트맨들을 고객으로 받았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거든요.”

두서없이 풀어놓은 제인의 이야기에는 그럭저럭 쓸모 있는 정보가 숨어 있었다.

암흑가의 손님들을 받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열차를 습격한 히트맨과 변호사 레이, 심지어 철도 회사까지 전부 한패일 것이다.

레이는 명목상 Z―rail의 변호사를 자처했고, 그가 남겨 두고 간 서류는 분명 진본이었으니까.

“…누구지?”

음지와 양지의 힘을 전부 끌어들일 수 있는 자.

테러 사건의 관련자에게 발 빠르게 보상하고 사건 자체를 묻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자금력을 가진 자.

“이런 짓을 벌인 사람이.”

권력도, 자금력도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

그리고 그 모든 힘이 50구역 환락가의 변호사를 잡는 데 동원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인만큼은 이 비정상적인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예요.”

“…과연.”

태일은 요한이 선언하듯 한 말을 떠올렸다.

“제인, 당신의 아버님께 말씀드리도록 하지.”

이런 수준의 힘이라면 ‘약혼자’의 그러한 선언에 제인이 어째서 그렇게 흔들렸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가씨’라는 표현 역시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정작 태일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당장 범죄 단체에 납치되어 죽을 뻔할 때는 나서지 않더니, 이제 와서?”

마로트에서 제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목숨을 잃고 온몸의 장기가 팔려 나갈 정도로 최악의 위기 상황.

딸을 확보하기 위해 이 정도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남자가 정작 딸의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는 나서지 않은 것이다.

“내놓은 자식이니까요.”

태일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제인이 천천히 설명했다.

“그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내가 죽어 간다 한들 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오히려 그걸 바랄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가 당신의 명예에 조금이나마 흠집을 낼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지독하군.”

“제가 마피아들과 접촉하려 한다는 건, 제 행동이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걸 의미해요.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된 것과는 다르다는 뜻이죠.”

“지금 그 말은 당신의 아버지가 이런 짓을 벌인 게…….”

“그래요. 제 행동이 정적(政敵)에게 명분을 줄까 염려한 거죠.”

때때로 최상류층의 상식은 일반적인 범주를 철저하게 벗어난다.

대표적으로 가족관이 그랬다.

지나치게 많은 권력과 재력을 지닌 이에게 가족은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거래 품목이자 관리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전쟁을 평화롭게 중재하려는 행동도 허물이 되는 건가?”

그건 분명 숭고한 일이다.

이상적이고, 불가능할지언정 의도 자체가 비난받을 수는 없다.

“중앙의회 의원들에게는 마피아와 얽힌다는 것 자체가 가십거리예요. ‘중재’는 얼마든지 ‘유착’으로 매도될 수 있죠.”

“…….”

웃긴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50구역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우릴 풀어주지 않을 거예요. 완전히 발을 묶어 둘 속셈이라구요.”

“덕분에 안전하긴 하겠지.”

태일의 냉정한 대답에 제인의 표정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요한이 바란 게 아마 이런 결론이겠지. 물론 잘못해서 당신이 죽을 뻔했지만.”

히트맨은 납치 의뢰를 받지 않는다.

총탄의 각도가 조금만 달라졌다면, 타이밍이 조금만 틀어졌다면, 트랩에서 발사된 총알이 제인의 미간을 꿰뚫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히트맨은 목격자를 남기지 않는다.

정체를 들킨 뒤, 히트맨이 태일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면, 제인 역시 죽을 수 있었다.

제인의 아버지라는 인간은 딸이 마피아와 관련되어 자신의 약점이 되느니, 테러의 희생자로 남길 바란 것이다.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어요.”

“그냥 가만히 호텔방에 머무르는 걸 추천하지.”

“이봐요!”

제인의 아버지라는 양반에 대해서는 구역질이 났지만, 결과만 두고 봤을 때 지금의 상황은 나쁠 게 없었다.

마피아들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는 것보다 아버지라는 양반의 돈을 탕진하며 호텔에 머무르는 편이 더 안전할 테니까. 그렇게라도 제인이 살아남아야 세연을 만날 확률이 더 높아질 테니까.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 있어요.”

“그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적어도 시도는 해 봐야죠.”

“무의미한 시도야.”

“세연 씨라도 그렇게 말했을까요?”

“…….”

제인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치사한 방식이었다.

* * *

“룸서비스입니다.”

산처럼 쌓인 과자 박스와 장난감들.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아이들이 한동안 수다를 멈출 정도였다.

“앨리스.”

“…응?”

“나 좀 꼬집어 봐.”

“…이렇게?”

“아, 아파. 아프다. 현실이야. 그치?”

지우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마치 다이빙하듯 선물 더미에 달려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박스를 열어 내용물을 살핀 지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 세상에!”

실제 사이즈인 히어로 모형이었다.

사람 크기라고는 하지만 딸려 오는 부품이 있다 보니 피규어를 포장한 상자의 크기는 상당했다.

태일은 거의 넋이 나간 지우를 향해 외쳤다.

“상자 조심해서 뜯어. 훼손하면 안 돼.”

“아… 안다구요. 그냥 CP 시리즈 피규어를 부탁했는데 ‘CP―101’이라니! 세상에, 이건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소 10만 크레딧에 거래되는 한정판이라구요!”

한편, 룸서비스 명목으로 선물 상자들을 잔뜩 옮겨 놓은 이들은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제인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고생했어요.”

“손님의 기쁨이 곧 저희의 기쁨입니다. 요청하실 서비스가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보면 볼수록 인간과 다른 면이 거의 없는 이들이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아니라면, 그들과 일반인을 구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태일은 서비스 제공 후 방을 나가는 이들을 보며 제인에게 조용히 물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저들은 뭐지?”

“철학적인 차원에서 묻는 건가요, 아니면 기술적인 차원?”

“…….”

인간과 닮긴 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들.

완벽하게 인간을 모방했지만, 붉은 눈동자를 지닌 그들은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몸에 피가 흐르는지, 뼈와 장기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떠나서, 그들의 태도는 여러모로 부자연스러웠다.

당장 테러 당시 승무원은 자신의 팔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놀라는 기색 없이 로봇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놈들에게는 분명 인간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어느 쪽이든 전 답변해 줄 수 없어요. 모르니까.”

태일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제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빈말이 아니에요. 5년 전에 갑자기 중앙정부의 인증을 받고 보급된 이후 수많은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메타휴먼(Meta―human)’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규명해 내는 데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거든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리볼버를 들고 다니며 자율 주행조차 완성되지 않은 기술 수준에서 저런 존재가 등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인은 ‘메타휴먼’이라 불리는 존재에 대해 더 언급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전환했다. 하긴 당장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태일 씨, 이 방법, 괜찮은 거 확실해요?”

태일은 피규어가 담겨 들어온 상자를 바라보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세연이라면 이렇게 했겠지.”

제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태일을 흘겨보다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퍽도.”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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