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8화 (9/220)

8화 환락가의 변호사 (3)

“세연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다시 자리에 앉은 태일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제인을 바라보았다.

“…중요한가요?”

어느새 제인은 우위에 서 있었고, 제인 역시 자신이 쥔 패가 꽤나 값어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뜸을 들였다.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태일의 대답과 동시에 제인은 빠른 말투로 설명했다.

“세연 씨는 음지에서 50구역의 주민들을 보호했어요. 당시 첫 사건을 수임한 나를 도와주기도 했죠.”

“…….”

“당신처럼 그녀 역시 7년 전쯤 갑자기 나타나서 혼자 조직 하나를 하루아침에 박살 냈어요. 당신이 쓰러뜨린 샬롯은 세연 씨가 부순 조직의 잔당들이었죠.”

“갑자기 나타났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세연 씨가 어디서 왔는지, 출신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레지스탕스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레지스탕스 역시 그에 대해서 딱히 입장을 내놓은 적은 없죠.”

“…그랬군.”

갑자기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머리가 멍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5년 전 갑자기 나타난 세연 역시 그랬으니까.

누구와도 인연이 없고, 출신조차 알 수 없는 여자.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그녀를 첩자로 의심했고, 태일 역시 그녀를 경계했다.

제인은 생각에 잠긴 태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사실 그녀의 과거나 소속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그녀가 있을 당시 많은 이들을 보호해 주었고, 마피아들은 지금처럼 제멋대로 날뛰지 못했으니까요.”

제인의 설명에 지우가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마, 마피아들이 그 세연이라는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구요?!”

“그래. 대외적으로 레지스탕스의 소행으로 알려졌지만, 마피아 보스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거든. 조직 하나를 하루아침에 궤멸시켜 버린 사람을 적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던 거지.”

앨리스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마마가 습관처럼 말하던 그 ‘악마 같은 여자’가…….”

“샬롯은 세연 씨가 괴멸시킨 조직 보스의 여동생이었어. 그러니 당연히 세연 씨에 대한 원한이 남달랐겠지.”

“그러다 5년 전에 갑자기 사라졌다는 건가?”

제인은 태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라지기 전날,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요. 우린… 꽤 친했거든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세연은 분명 제인을 찾아올 것이다.

세연은 자신이 한 약속을 강박적으로 지키는 여자였으니까.

입에서 나온 그 어떤 약속도 그녀에게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태일의 경험상 세연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의 수는 단 하나뿐이었다.

‘약속을 한 상대가 목숨을 잃는 경우’.

마음을 굳힌 태일은 제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을 돕지.”

순간, 제인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의심하며 멍하니 태일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요?”

“싫으면 말고.”

제인은 환호성을 지를 듯 얼굴을 붉혔다가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태일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 잘 부탁해요! 그… 이름이?”

“아, 그러고 보니…….”

앨리스와 지우 역시 기대에 찬 얼굴로 태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태일은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을 그 누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까.

“신태일.”

태일은 짧게 대답하며 제인과 악수했다.

악수를 마친 제인이 환하게 웃더니, 급하게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럼 계약 조건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죠.”

그런 제인의 모습을 바라보는 지우와 앨리스의 표정은 다소 불안해 보였다.

잠시 뒤.

“…호구네, 호구야.”

태일이 계약서에 잠자코 서명하자, 지우는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지우야, 그만해.”

앨리스는 옆구리를 찔러 그런 지우를 말렸지만, 그녀 역시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태일이 서명한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일은 숙소와 식사, 그리고 약간의 월급을 제공받는 대신 제인의 신변 보호 및 사무장 역할을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어린 두 사람의 눈으로 봐도 부당 계약이었다.

태일이 서명을 마친 뒤 팬을 내려놓자, 지우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제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요, 누나! 태일이 형은 혼자 조직 하나를 박살 낸 최고의 실력자예요. 그런데 월급이 이게 뭐예요? 내 일주일 수입 수준이잖아!”

소매치기가 훔쳐서 번 것도 ‘수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태일은 제멋대로 자신의 대변인인 양 구는 지우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왜 네 형이냐?”

“형은 가만히 있어요. 내가 이런 건 전문이야!”

지우는 자신에게 불리한 말을 내뱉으려 하는 태일의 입을 막은 뒤,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꼈다.

한편, 제인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 역시 태일이 그렇게 순순히 서명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리…한 계약서인 거 알고 있어요. 만약 사건을 받아서 수임료를 받게 되면 인센티브를 제공해 줄 수도 있고…….”

“그저 그런 사설 경호 업체의 하루 비용도 형이 받는 월급보다 많을 거라구요!”

지우는 아예 제인의 말까지 끊어 가며 열을 올렸다.

제인은 그런 지우를 정말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하고 있었다.

“그, 그래. 나도 알지.”

“알면 이러면 안 되는 거…….”

“그만.”

보다 못한 태일이 나지막이 말하자, 제멋대로 떠들던 지우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네, 형.”

지우의 재빠른 태도 변화에 태일은 물론, 제인까지도 벙찌고 말았다.

만약 지우가 단 한마디만 더 했으면 틀림없이 대화에서 배제되었을 것이다. 지우는 그 사실을 재빨리 파악했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영악한 녀석…….’

쓴웃음을 지어 보인 태일은 다시금 제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계약 내용에 별 불만은 없어. 계약대로 당분간 당신을 지근거리에서 지키도록 하지.”

태일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것은 설사 이 지역 마피아 전체가 몰려온다 해도 제인에게 해를 끼치게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제인은 그런 태일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대신 세연이에 대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할거야.”

세연에 대해 듣거나 만나게 되는 순간, 곧바로 태일에게 알려 주겠다는 약속.

태일은 오로지 그 한 가지 조건만을 요구했다.

“물론이에요.”

바로 그때 즈음, 잠들어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나 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대화는 잠시 멈추었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잠시 부산해진 탓이었다.

한 시간 뒤, 간신히 아이들의 끼니를 해결해 준 제인은 책상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책상 위에는 온갖 요금 고지서들이 쌓여 있었다.

배를 채운 아이들은 방 안으로 몰려 들어가 저희들끼리 왁자지껄 떠들고 있지만, 지우와 앨리스는 제인의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수북이 쌓인 고지서들과 제인의 어두운 표정이 뜻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태일과 앨리스 역시 올 게 왔다는 얼굴로 제인을 바라보았다. 아마 둘 역시 그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알고 있기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터였다.

“…딱 봐도 아이들을 모두 감당할 능력이 되어 보이진 않는데.”

“아픈 곳을 찌르네요.”

제인의 좁은 집에서는 구조한 아이들을 전부 수용할 수 없었다. 당장 어찌어찌 버틴다 하더라도 지금 구조한 아이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마로트가 붕괴하면서 그곳에 속해 있던 아이들은 돌아갈 집을 잃은 채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터였다. 만약 이곳에 대한 소문이 퍼진다면, 아이들이 전부 제인의 사무실로 몰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제인은 태일에게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간신히 제안할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좋지 못했고, 돈 많은 독지가처럼 아이들을 모두 거둘 수는 없었다.

태일은 부쩍 지쳐 보이는 제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LAPD의…….”

“안 돼요!”

태일이 LAPD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펄쩍 뛰며 말을 끊은 사람은 다름 아닌 지우였다.

“만약 우리들을 LAPD에 넘기려 한다면, 내가 전부 데리고 나갈 거예요. 우리끼리도 잘 살아남을 수 있다구요.”

선언하듯 말하는 지우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앨리스 역시 이번만큼은 지우를 제지하지 않았다.

부모 없는 아이들이 국가기관에 의해 거둬지면, 가게 될 곳은 빤하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고아원.

태일은 지우의 말에 별달리 대답하지 않은 채 원래 하려던 말을 이었다.

“…요한 형사가 말한 그 마리아라는 수녀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 거 같은데.”

제인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말했다.

“연락해 봐야죠. 수녀님도 사정이 썩 좋지는 않겠지만, 요한의 부탁이 있다면 거절하실 분은 아니세요.”

요한 형사와 그렇게 다투고도 그에 대해 언급하는 제인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한편, 최악의 결론을 피했건만, 앨리스와 지우는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모두가 어려운 시대에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죄가 된다. 더구나 또래들에 비해 성숙한 앨리스와 지우는 그저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짐이라 여기고 있었다.

제인은 그런 기색을 눈치챈 듯 지우와 앨리스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그건 너희의 잘못이 아니야. 너희를 지키지 못하는 어른들의 책임이지.”

그 말을 들은 앨리스는 슬쩍 태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일 역시 마로트에 쳐들어가기 직전, 비슷한 말을 한 것이다.

“너희 같은 꼬마들에겐 죄가 없어. 죄는… 어른들에게 있는 거야.”

* * *

다음 날 아침, 제인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마리아 수녀가 요청을 수락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밝은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마리아 수녀에게 인도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힘겨운 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당장 수녀가 운영하는 시설까지 두 시간 반 이상 기차를 타고 가야 했는데, 흥분한 수십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을 나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자, 얘들아. 언니 말 잘 들어. 절대로 흩어지면 안 돼. 세 명씩 짝지어 줬지? 손 꼭 잡고!”

제인이 진땀을 흘리면서 벌써 스물세 번째로 당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난생처음 멀리 떠난다는 사실에 흥분한 듯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개판이군.’

태일은 한숨을 쉬며 그 난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맛난 식사, 강제로 일을 시키지 않는 어른들, 푹신한 잠자리까지… 아이들은 제각기 각자의 경험담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얘들아, 주목! 떠들지 말고 언니 말 들어야지.”

“야, 거기 너! 그래, 지찬이. 너 인마, 동생 꼬집지 마!”

앨리스와 지우는 아이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단 애를 쓰고 있지만, 아이들은 마구 떠들고 울며 영문 모를 괴성까지 질러 댔다.

결국 보다 못한 태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들 조용.”

그리고… 태일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열렬한 눈빛으로 태일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제인의 입이 쩍 벌어졌고, 지우 역시 감탄 어린 시선으로 태일을 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한 거예요?”

물론 태일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

그러나 앨리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태일이 번개를 이용해 악당 곰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어두운 와중에 그 장면을 똑똑히 본 건 플라스크를 바닥에 떨어뜨린 꼬마를 비롯해 한두 명뿐이지만, 아이들에게 소문이 전달되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지금 아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다름 아닌 그들의 ‘히어로’ 태일이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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