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환락가의 변호사 (1)
“…고집부리지 말고 당장 이곳을 떠나요.”
“당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는 없어요!”
“아직 심각성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하마터면 당신의 심장이 인체 시장에 전시될 뻔했단 말이오!”
“이 동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죠!”
태일은 시끄러운 다툼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가운데, 벽장 가득 꽂혀 있는 두꺼운 책들이 보인다.
태일이 눈을 뜬 곳은 처음 보는 방 안이었다.
푹 꺼진 소파와 안락한 분위기에 잠시 당황하는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방문에 달라붙어 바깥에서 한창 벌어지는 언쟁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앨리스와 지우가 깨어난 태일을 보고는 살금살금 걸어왔다.
그제야 주변을 살펴보니, 바닥에 커다란 이불이 깔린 채 구출된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잠들어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앨리스는 살짝 눈물을 보이며 우물쭈물했고, 지우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태일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태일은 둘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인형극단, 마로트의 사건들이 현실이었음을 인지했다.
하긴 태일에게 있어서도 그만큼 기괴한 공간과 환술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째깍째깍.
태일은 상체 안주머니에서 심장박동마냥 뛰고 있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 다섯 시간가량 지나 있었다.
세연의 회중시계. 무너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닳아빠진 탁상 위에 놓여 있던 것을 간신히 발견해 회수했다.
그 행동 때문에 약간의 시간이 더 지체되었고, 하마터면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반대로 태일의 목숨을 살린 것 또한 세연의 회중시계였다.
회중시계의 존재가 감지된 덕분에 환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대체 그 회중시계가 뭐길래…….”
지우가 눈을 빛내며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태일의 차가운 눈초리에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그렇게 보지 마요. 악의는 없었다구요. 전 그냥 시켜서…….”
지우가 볼을 긁으며 우물거리는 사이, 앨리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 이젠 괜찮은 거죠?”
“…그래.”
태일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시간가량 수면을 취했건만, 여전히 약간의 두통이 남아 있었다.
건물이 폭파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한 태일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앨리스와 아이들, 그리고 금발머리 여자를 본 뒤 곧 의식을 잃었다.
딱히 부상이랄 것은 없지만, 쌓인 피로가 워낙 큰 탓이었다.
“밖의 저 소리 때문에 깬 거죠?”
지우가 팔짱을 끼며 짧게 혀를 차더니, 문 쪽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겁내던 주제에 이제는 놀라울 정도의 붙임성으로 천연덕스레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한편, 지우의 말처럼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제인, 경찰이 놈들을 건드리지 못하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그러시겠죠. 어떻게든 시간만 때우다 다른 구역에 발령받으면 그만이니까! 그런 썩어 빠진 정신 때문에 50구역은 지옥이 되었죠.”
“제인!!”
끼익.
그 순간, 한창 논쟁을 벌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방문을 열고 나오는 태일에게 집중되었다.
태일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자 한창 논쟁을 벌이던 여자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일어났어요?”
…누구였더라?
뒤로 질끈 동여맨 머리와 단정한 정장 차림 때문에 잠깐 알아보지 못했지만, 금발에 푸른 눈을 보자 곧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3층에서 구출한 여자.
당시 상황이 워낙 급했기에 그녀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 다섯 시간 만에 살벌하게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다행히 큰일을 당하기 전에 구출해 낸 듯했다.
그녀는 살짝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때문에 깬 건가요? 미안하게 됐어요.”
태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해서 나왔는데…….”
“아, 잠깐 기다려요.”
여자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구석진 곳에 있는 소형 냉장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태일이 방을 나온 순간부터 줄곧 태일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 역시 소파에서 일어났다.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일어나면서 허리춤에 착용된 권총 손잡이가 유난히 부각되어 보였다.
“제인에게 얘기를 들으니, 그쪽 역시 간밤에 험한 꼴을 당할 뻔했다지?”
…대충 그렇게 둘러댄 건가.
하긴 그러는 편이 설명하기 훨씬 쉬웠을 것이다.
당장 태일의 입장에서도 그렇게 사건을 덮는 편이 더 편했다.
괜히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어 봐야 좋을 건 없으니까.
그때, 태일을 뒤따라 나온 지우가 다짜고짜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배를 쭉 내밀고는 남자를 째려보았다.
“이봐요, 아저씨! 당신 말이야, 이 형님이 얼마나 대단한… 읍!”
한창 뭐라 떠들어 대려 했지만, 뒤따라 나온 앨리스가 황급히 지우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고는 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앨리스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봐 가면서 나서, 이 멍청아.”
그러나 정작 남자는 지우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줄곧 태일만을 탐색하듯 뜯어보았다.
태일은 자신을 위아래로 살피는 그의 시선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제인의 거짓말을 간파한 걸까?
“내 ‘약혼녀’가 탈출 당시 자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던데…….”
약혼녀라는 단어에 유난히 강세를 둔 말투.
태일은 저도 모르게 살짝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원인 모를 경계심은 그쪽이었나.
생각보다 시시한 이유에 살짝 김이 새려는 찰나, ‘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냉장고 문을 닫은 제인이 남자를 향해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요한! 내 손님이에요. 무례하게 굴지 말아요.”
그러나 남자는 딱히 멈출 생각이 없는 듯 주머니를 뒤적여 명함을 꺼내 태일에게 건넸다.
“요한 파머(Johann Farmer)라고 하네. 자네는…….”
문득 명함에 그려진 ‘독수리’가 보였다.
태일은 깜짝 놀란 나머지 요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건네는 명함을 빼앗다시피 받아 들었다.
명함에 신분이나 연락처 따위가 적혀 있었지만, 태일의 관심을 끈 것은 오로지 독수리 문양뿐이었다.
“…경찰?!”
20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이지만, 틀림없었다.
명함에 새겨진 독수리 마크. 그것은 틀림없이 LAPD(Local Area Police Department, 지역 경찰)의 문양이었다.
“그래, 보다시피.”
‘LAPD가 존재하는 50구역이라…….’
태일이 살던 50구역에서 LAPD가 해체된 것은 18년 전이었다.
SB의 유통 전부터 LAPD는 이미 치안 능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다 SB가 유통되며 전 세계의 시선이 몰리자, 50구역 LAPD가 보인 모습은 그야말로 한 편의 코미디 같았다.
중앙정부에서 보급한 무기가 매수된 간부에 의해 마피아에 넘어가는가 하면, 개혁을 위해 파견된 서장이 부임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암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비난 여론에 휘둘린 중앙정부는 50구역의 경찰 조직을 전면 해체시켰고, 버림받은 경찰들은 혁명군의 전신(前身)인 레지스탕스에 들어가거나, 마피아의 조직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SB로 인해 50구역은 완전히 통제 불능의 상황에 처해졌다.
“이봐, 괜찮나? 표정이 안 좋은데.”
요한이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태일의 얼굴을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태일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켜요, 요한. 이분은 아직 휴식이 필요하다구요.”
제인이 태일의 앞에 버티고 선 요한을 밀쳐 내며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물 컵이 들려 있었다.
걱정 섞인 얼굴로 태일을 챙기는 제인의 태도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요한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러나 태일은 요한의 시시한 오해 따위 관심 밖이었다.
“지금이 몇 년도지?”
LAPD가 남아 있는 50구역.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잠들어 있던 지난 다섯 시간 사이에 태일이 다른 구역으로 옮겨진 게 아니라면… 과거로 날아왔다는 뜻일 테니까.
요한과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일을 바라보았지만, 앨리스에게 타박을 듣고 토라져 있던 지우가 곧바로 대답했다.
“2022년이에요!”
“날짜는 4월 30일이에요. 지난밤에 있던 일 기억해요?”
제인이 차분하게 날짜까지 알려 주었다.
어쩌면 태일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일은 다른 이유로 충격에 빠져 있었다.
“…….”
과거 회귀가 아니다.
배신자들과 혈전을 치른 건 2022년 4월 30일, 자정을 막 넘어선 시각이었으니까.
태일은 제인이 건네 준 냉수를 들이켜며 차분하게 머리를 식혔다.
‘그래. 놀랄 일도 아니야.’
태일은 피의 언덕 근방에서 나고 자랐기에 50구역이 변해 오는 과정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러나 50구역에 ‘마로트’ 같은 조직은 없었다. 환락가 역시 태일이 보아 온 모습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2022년에도 버젓이 사용되는 리볼버, 한낱 폐건물 따위에서 제조되는 소울벌룬과 LAPD 형사.
이곳은 같은 50구역이지만, 전혀 다른 세계였다.
“아저…씨?”
한편, 제인과 요한은 물론, 지우와 앨리스까지도 생각에 잠긴 태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래서 당신도 이 일을 벌인 자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이군?”
요한의 질문에 태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제인이 살뜰히 챙겨 주는 행동에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는 듯했지만, 어느새 형사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되찾았다.
덕분에 다소 격앙된 처음과 달리 사무실 분위기는 꽤나 차분해진 상태였다.
“너희들도?”
“…네.”
앨리스 역시 제인처럼 모르쇠를 하며 나름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 와중에 지우는 입이 근질거리는 듯 태일을 힐끔거렸지만, 경고 섞인 앨리스의 눈빛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럴수록 답답해지는 쪽은 요한이었다.
“최소 30명 이상이 죽고, 조직의 보스까지 불에 타 죽었는데 아무런 증거가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 일을 벌인 사람들을 찾으면 어쩔 생각이죠?”
“‘사람들’이라……. 제인, 약에 취해 있어서 누가 당신을 구했는지 제대로 확인 못 했다고 했지? 하지만 난 이 일을 누군가가 단독으로 벌였다고 생각해.”
생각보다 날카로운 추리에 태일은 속으로 감탄하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뭐? 당신도 내 말이 헛소리 같아?”
…지금은 그저 태일의 모든 행동이 나쁘게 해석되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아니, 별로.”
태일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만 접어도 제인과 앨리스, 지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으련만.
요한은 태일을 기분 나쁘게 노려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폭탄에 대량 살상 무기까지 사용한 것 같은데, 주변에서는 그 정도의 인력 이동 자체가 목격되지 않았단 말이야. 다수가 어디론가 사라진 흔적도 없고 말이야.”
“요한, 말이 안 된다는 거 알죠?”
제인이 다소 어색한 말투로 반론을 제기하자, 요한은 그제야 어깨를 으쓱하며 태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그래, 알아. 프로 히트맨 중에서도 홀로 그 정도 퍼포먼스를 보여 줄 수 있는 놈은 몇 없지. 여하튼 제인, 50구역이 더 위험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그러니…….”
“떠나라는 말을 하려거든 당장 나가요.”
순간, 제인의 말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이런…….’
태일은 둘 사이에 또다시 논쟁이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요한은 훨씬 누그러진 말투로, 아니, 사정하는 말투로 제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제인, 제발… 내 말을 들어야 해. 50구역을 삼분(三分)하던 세력 중 한 곳의 보스가 하루아침에 살해당했어. 수많은 이권 사업들이 남겨진 상태에서 말이야. 이제 남은 두 하이에나가 마귀할멈의 유산을 두고 서로 물어뜯을 거라구.”
“도리어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내 역할이 있을 거예요.”
요한의 애걸에도 불구하고 제인의 말투는 오히려 단호해졌다.
한편, 마피아들 사이의 전쟁에서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말에 태일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인을 바라보았다.
“난 변호사예요. 갈등의 중재야말로 변호사의 역할이죠.”
그녀의 말을 듣는 이 순간만큼은 태일과 요한의 표정이 완벽히 일치했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