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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3화 (4/220)

3화 인형극단 (1)

끼이익―

너무나 순순히 문이 열린다.

오랫동안 청소 따위는 하지도 않은 듯 희뿌연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낡은 마룻바닥에서 쥐가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의 뜀박질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묘한 소리들.

딸깍, 딸깍.

치이이이.

흐린 불빛 속에서 들려오는 소음들이 태일의 신경을 건드렸다.

무기라도 들고 가득 몰려 있지 않을까 했건만, 앞서 도망쳐 들어간 중년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운데, 어두침침한 복도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지직, 지지직…….

천장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전구의 불빛이 깜박거린다.

“애들 대부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뒤에서 소녀가 졸래졸래 따라 들어온다.

태일은 소녀를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밖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

“…여긴 제집인데요.”

집이라…….

잠시 복도 안쪽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먼지 속에 은은히 풍겨 오는 피 냄새.

폐가와 다를 바 없는 집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 집은 어린아이들이 머무를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여기가 없어지길 바란 게 아니었나?”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일은 슬쩍 그런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모순.

몸에 피멍이 들도록 맞는다 해도, 심지어 스스로가 거래 대상이 된다 해도 아이들은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조직이 무너지기를,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 주길 간절히 기도하지만, 정작 탈출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버림받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집 밖으로 도망쳐 나간다 한들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리고… 함께 그 상황을 견뎌 내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애들 대부분은 보통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돌아와요.”

소녀가 마치 은밀한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것처럼 속삭이듯 말했다.

돈을 벌러 나간 아이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녀석들의 행동이 정상적일 리 없다.

태일의 시계를 훔쳐 간 아이처럼 소매치기를 하거나, 취객들을 털어서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지우도 아직 안 왔을 거예요. 그러니 아저씨가 찾는 물건도…….”

“시계는 이 안에 있어.”

태일이 딱 잘라 말했다.

태일에게는 확실히 들렸다, 움직이는 초침 소리가.

태일은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복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문 옆에 붙어 있는 현판들이 태일의 눈에 들어왔다.

‘분장실’, ‘대기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현판들이었다.

예술에 대해 전혀 모르는 태일의 눈에도 건물은 공연장과 거리가 멀었으니까.

“사람들은 우리들을 인형극단, ‘마로테(Marotte)’라고 불러요.”

“…….”

“조심해야 해요. 아저씨가 아무리 강해도…….”

그때였다.

불쾌한 연기, 그리고 냄새.

갑자기 느껴지는 불길한 감각에 태일이 눈살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바로 왼쪽, ‘분장실’에서부터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아저…씨?”

태일의 시선이 분장실 문에 고정되자, 소녀가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거기는…….”

끼이익―

소녀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태일은 이미 분장실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딸깍, 딸깍, 딸깍.

매캐한 연기 속, 널찍한 공간에 배열된 수십 개의 탁상.

그 탁상마다 저울 같은 것이 놓여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십 개의 플라스크에 일정한 양의 가루들이 배분된 가운데, 관을 통해 빠져나온 액체들이 플라스크에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졌다.

액체와 뒤섞인 가루는 램프에 의해 가열되어 플라스크 안에서 뿌연 구름으로 변해 갔다.

그 와중에 열댓 명의 아이들이 두꺼운 장갑을 낀 채 탁자에 둘러서서 컨베이어 벨트처럼 기계적으로 플라스크를 옮기고 있었다.

소녀보다 한두 살가량 어려 보이는 아이들.

한창 작업 중이던 아이들은 행동을 멈추고 갑작스레 열린 문을, 태일을 바라보았다.

한편, 태일의 시선은 아이들이 옮기고 있는 플라스크로 향했다.

가열을 마친 뒤, 마개로 입구를 틀어막은 플라스크 안에는 뿌연 구름 같은 것이 둥실둥실 떠 있다.

분장실 문 틈새로 느껴지던 감각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태일이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태일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 아저씨!”

드르륵.

2미터는 가뿐히 넘어 보이는 누군가가 의자를 밀어내며 몸뚱어리를 일으킨다.

곰… 아니, 곰 인형 탈을 뒤집어쓴 놈이 태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의 공정을 감시하고 있었던 걸까?

태일은 그 인형 탈을 노려보며 소녀를 가만히 뒤로 밀어냈다.

“너, 누구?”

잔뜩 쉰 목소리.

보푸라기가 엉망으로 일어난 인형 탈을 뒤집어쓴 사내가 중얼거리며 태일을 향해 다가왔다.

커다란 두 눈동자와 해맑게 웃고 있는 표정.

그러나 곰인형은 순수한 얼굴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멈춘다. 죽는다.”

띄엄띄엄 던져진 단어들은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움직인다. 계속.”

그건 태일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멍하니 태일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이 곰인형, 테디의 말을 듣고는 다시금 작업을 계속했다.

이어 테디의 얼굴이 태일의 뒤쪽을 향했다.

“앨리스. 데려온다. 외부인.”

곧 태일의 뒤에서 ‘앨리스’라 불린 소녀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 테디…….”

테디라 불린 곰돌이가 손에 무언가를 쥔 채 질질 끌며 태일과 엘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끼릭, 끼리리릭.

테디가 움직일 때마다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겁에 질린 앨리스가 태일의 옷자락을 꼭 붙잡는다.

이윽고 희미한 불빛 속에서 테디의 손에 들린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해머. 웬만한 사람 키만큼 긴 손잡이에 진득한 핏자국이 남아 있는 헤드가 눈에 띄었다.

해머를 쥔 곰돌이는 그 귀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이코 살인마처럼 보였다.

“적? 친구? 고객?”

태일의 바로 앞에 멈춰 선 테디가 태일을 똑바로 응시하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고객이라…….’

태일은 대답 대신 테디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 가열 중인 플라스크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들을 바라보았다.

독하지만 달콤한 향, 몽롱한 아이들의 표정.

“소울벌룬(Soul Ballon)…….”

분장실 문 앞을 지나던 순간부터 태일의 신경 체계 역시 평소에 비해 한결 무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시계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파지직.

순간, 태일의 몸 곳곳에서 미세하게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침입자. 나간다. 여기서.”

띄엄띄엄 어색하게 조합된 테디의 단어들에서 경계심이 느껴졌다.

“테디. 마마. 명령. 앨리스. 마마. 안다. 모른다. 안다. 모른…….”

영문 모를 단어의 나열.

태일은 곰 인형 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멍청한 놈.”

꼴을 보아하니 이미 깊게 중독된 놈이었다.

이 머저리 같은 놈은 모른다. 자신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테디의 목이 비딱하게 기울어졌다.

딸꾹.

바로 뒤쪽에서 앨리스가 딸꾹질을 한 직후, 입을 틀어막았다.

“앨리스. 적. 데려온다.”

테디의 팔이 다시 움직이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리리리리릭.

그 와중에 인형 탈 안에서부터 진득한 악취가 풍겨 왔다.

하수구를 연상시킬 정도로 지독하고도 구역질 나는 냄세.

이미 놈의 육체는 완전히 썩어 문드려졌을 것이다.

“마마. 화낸다. 침입자. 죽인다.”

“…….”

태일은 담담한 얼굴로 그런 놈을 바라보았다.

‘분장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방의 이름은 방에서 생산되는 물건과 제법 잘 어울렸다.

20여 년 전, 50구역에 퍼진 악마의 구름, ‘소울벌룬’. 통칭 ‘SB’.

태일은 악마의 구름에 취해 살육을 일삼던 희생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성을 잃은 채 짐승이 되어 버린 복용자들의 살점은 점차 썩어 간다.

“죽인다. 침략자. 죽인다. 침략자…….”

테디는 그중에서도 말기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테디가 곰처럼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면서 해머를 치켜든다.

앨리스가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 태일의 손에서 선명한 스파크가 형상화되었다.

지지지직―

무수한 빛의 줄기들이 손에서부터 뻗어 나가 날카로운 검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눈부신 스파크를 본 테디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태일은 여전히 싱긍벙글 웃고 있는 곰돌이 탈을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전부… 부순다.”

고작 단검 수준이던 전류의 검이 잠깐 사이에 거대한 대검이 되고, 곧이어 천장에 닿을 만큼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었다.

어느새 방 안의 아이들은 일을 멈춘 채 멍하니 눈부신 빛의 기둥을 보고 있다.

잠시 멈칫한 테디는 마음을 굳힌 듯 들어 올린 해머를 그대로 태일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마마. 죽…….”

콰직!

죽인다? 죽는다? 죽어라? 죽었다?

테디의 다음 단어가 무엇이든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놈이 휘두른 해머 역시 태일의 머리에 닿지 못했다.

태일의 팔이 그대로 땅에 떨어지며 몸과 인형 탈이 통째로 양단된 것이다.

쾅!

묵직한 해머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면서 묵직한 굉음을 냈다.

테디의 피가 사방에 뿌려졌다.

“거어어억…….”

인형 탈 안, 완전히 썩어 버린 놈의 몸뚱어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분장실 바닥으로 번져 갔다.

쨍그랑!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아이 하나가 플라스크를 떨어뜨렸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구름이 사방으로 퍼졌다.

태일은 곧바로 분장실을 비추고 있는 전구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퍼퍽! 퍼퍼퍽!!

태일이 쏘아 낸 전류로 의해 어두침침하게나마 분장실을 비추고 있던 전구들이 연달아 폭발했다.

그렇게 내부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가운데, 테디의 시신 역시 어둠에 잠겼다.

비릿한 피의 냄새와 SB의 향이 뒤섞여 코를 찌른다.

태일은 뒤쪽의 앨리스를 향해 중얼거렸다.

“…전부 데리고 나가.”

앨리스는 태일의 말에 흠칫 놀라더니, 곧 정신을 차리고는 분장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얘들아, 모두 이쪽으로 와. 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여기 문 앞으로.”

“앨리스 누나!”

“얼른!”

아이들은 금세 앨리스가 있는 쪽으로, 복도의 불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앨리스는 그렇게 다가온 아이들을 줄지어 분장실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다들 서로 손잡고, 떨어지면 안 돼. 알았지?”

앨리스의 목소리에도, 아이들의 행동에도 그 나이 대 아이들이 보일 법한 두려움은 없었다.

비명도, 울음도 없다.

테디의 갑작스럽고 참혹한 죽음에 놀랐을지언정 공포를 느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이들은… ‘죽음’에 익숙했다.

무법자들과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태일은 방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발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계의 초침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

앨리스가 뭔가 말하려 했지만, 태일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태일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스파크가 튀고 있던 것이다.

곧이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앨리스는 마지막 남은 아이의 손을 잡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파지지지직―

아이들이 전부 빠져나간 바로 그 순간, 태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전류가 방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쨍그랑!

플라스크들이 부서지고, 자동으로 움직이던 저울들이 산산조각 났다.

플라스크에서 해방된 SB로 인해 방 안이 자욱해진 가운데, 나무로 된 바닥과 벽면에 균열이 일었다.

전류가 지배하는 공간이 점차 넓어진다.

그렇게 확장된 전류가 촘촘한 그물처럼 형상화되면서 공기 중에 퍼진 SB를 한곳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지직!!

그러는 사이, 탁상과 플라스크, 저울 따위의 비품들이 고압 전류의 열기를 이기지 못해 산산이 부서졌고, 방구석 어딘가에 튄 스파크로부터 불길이 일었다.

불길은 마룻바닥과 탁상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태일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SB를 전류의 그물에 가두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바다에 퍼진 기름을 흡착포로 걷어내듯, SB의 입자들을 전류의 그물에 흡착시켜 소멸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점에 SB가 있었어.’

태일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단 한 줌이라도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SB를 만드는 이 방은 물론, 아이들로 하여금 SB를 만들게 한 인간까지 전부 끝장 낼 것이다.

태일의 이마에서 슬슬 식은땀이 베어 나오며, 매캐한 유독가스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일의 눈매는 매섭게 빛났다.

혁명가, 세상을 박살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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