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88화>
188. 복수자 (3)
벌써 1년 전 일이다.
과거 권한울은 블라가 가문의 원로인 카탈리나 블라가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해서 노예로 삼는 마녀 같은 여자였다. 당시 카탈리나 블라가의 권속이었던 루인 아스파담은 권한울을 크게 질투하였고 급기에 죽이려고 했다.
결과는 권한울의 승리였다.
루인 아스파담은 역으로 권한울에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문제는 루인 아스파담의 스승이 눈앞에 있는 벽력권이라는 사실이다.
카탈리나 블라가, 그 여자가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당시 벽력권의 제자로서 주목을 한 눈에 받던 루인 아스파담을 유혹해서 빼내온 것이다.
“무례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제자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벽력권은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스승을 버리고 여자를 선택한 얼간이기는 하지만 루인은 한때 내 제자였다. 이 정도 질문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권한울은 고민했다.
벽력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기분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고민하던 중에 귀찮음을 느꼈다.
그의 입장에서 루인 아스파담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적이었다.
실력은 대단했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겨우 여자에게 눈이 멀어서 권한울을 죽이려 했다는 것도 감점 요인이었다.
“모르겠군요.”
그렇기에 권한울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
“감상을 가질 만큼 대단한 상대가 아니었던지라.”
그 말에 벽력권의 눈동자가 커졌다. 굳어버린 눈동자를 권한울에게 고정시켰다.
권한울은 살짝 긴장하며 벽력권을 바라봤다. 행여나 그가 화를 내면 곧바로 대처해야 할 테니 말이다.
“……하하핫, 그랬는가.”
그러나 벽력권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 멍청한 제자 놈은 적에게조차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는가.”
이내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자를 대신해서 사죄하도록 하겠네.”
벽력자가 고개를 숙였다. 권한울은 깜짝 놀라서 벽력자의 행동을 막았다.
“어째서 어르신께서 사죄를 하십니까.”
“제자가 저지른 일이니 스승인 내가 책임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이러시면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벽력자에게 이 일을 책임질 이유는 없다.
루인 아스파담은 파문을 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군.”
벽력권은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다.
문득, 권한울은 자신의 아공간에 잠자고 있는 물건이 떠올랐다.
권한울은 아공간을 열어서 곱게 접힌 도복과 벽력굉천권의 비급서를 내밀었다.
“루인 아스파담의 아공간에서 얻은 물건들입니다. 제가 감히 처분할 수 없는 것들이라 여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권한울이 내민 유품을 본 벽력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도복은 그가 루인 아스파담에게 하사한 것이었으니까.
“……고맙네.”
벽력권은 권한울에게 받은 물건들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권명우를 향해 말했다.
“네 손자가 너보다 낫구나. 흑천에 용이 났어.”
“이 빌어먹을 놈이 자꾸 헛소리하고 있네!”
권명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벽력권은 껄껄 웃었다.
“나는 이만 가 보마. 방해해서 미안했다.”
벽력권이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스승님, 저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줄곧 가만히 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사제를 죽였어요! 그런데 어째서 화를 내지 않으시는 거죠?”
“라이신. 조용히 하거라.”
“스승님,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어요!”
여인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분명 사제는 스승님과 저희들에게 큰 죄를 저질렀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아이였다고요! 스승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라이신!”
벽력권이 호통을 쳤다. 그제야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라이신?”
그때, 권명우가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설마 했는데. 진짜 환수의 라이신을 데려왔을 줄이야.”
권명우가 달라진 눈빛으로 여인을 훑어봤다.
“항상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라 봤는데. 실제로는 이런 얼굴이었군.”
권명우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정말 대단한 실력자라는 뜻이었다.
권한울도 여인에 대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세계랭킹 10위권에 등록시켰다는 기대의 신인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이야.”
10위권대.
앞서 싸웠던 보보와 비교했을 때, 아득히 높은 랭킹이었다.
“근데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나?”
권명우가 기세를 일으켰다. 방대한 기파가 사방으로 퍼졌다.
“건방지게 짝이 없군. 지금 누가 누구를 타박하고 있는 거지?”
라이신은 식은땀을 흘리며 권명우를 바라봤다.
아무리 10권이라 하더라도 권명우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절대자 중 한 명이었으니까.
“지금 당장 그 혓바닥을 뜯어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내 제자의 무례를 사과하겠네.”
그때, 벽력권이 나섰다. 라이신의 앞을 가로막으며 섰다.
“사과? 말로 끝낼 생각인가?”
“진정하게나. 젊은 아이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인 일일 뿐일세.”
“책임을 지는데 어찌 나이를 따질까.”
권명우는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흑천 일가라는 자부심에 가득한 그에게 라이신의 행동은 선을 넘는 짓이었다.
하지만 벽력권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흑천제일권. 정녕 이 자리에서 나와 결판을 내야겠나?”
“못할 것도 없지. 설마 두려운 건가?”
두 사람이 동시에 기세를 일으켰다. 막대한 두 힘이 허공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자네와 싸우게 될지 몰랐네.”
“고상한 척하기는. 자네도 나도 결국 본질은 싸움꾼에 지나지 않아.”
권명우의 말에 벽력권이 한쪽 입꼬리를 쓱 올렸다.
“못하는 말이 없군. 흑천의 얼간이가.”
“닥치고 덤벼라. 이 노망이 들다만 머저리야.”
권명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벽력권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둘이 충돌하려던 그 찰나였다.
“저기요.”
둘의 사이로 권한울이 쓱 들어왔다.
권명우도, 벽력권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기세가 가장 격하게 충돌하는 지점에 권한울이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든 것이다.
“싸우기 전에 주변을 한번 살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권한울이 말하고 나서야 두 절대자들은 주위를 둘러봤다.
두 사람이 내뿜은 기파 때문에 건물들의 창문이 모조리 깨져 버린 것은 물론이고 도로에는 운전자들이 자동차를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기세를 내뿜은 것만으로 이 정도인데. 실제로 싸웠으면 더 큰 피해가 생겼으리라.
“큼.”
“크흠.”
두 사람은 멋쩍은 얼굴로 기침을 했다. 흥분한 탓에 사고를 칠 뻔한 것이다.
“라이신.”
권한울은 여인을 돌아봤다. 여인은 여전히 권한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루인 아스파담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래!”
“제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일이군요. 먼저 위협을 받은 것도, 공격을 받은 것도 제 쪽입니다.”
할 말이 궁했는지. 라이신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두 눈에 떠오른 적개심은 여전했다.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복수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 것.
이성적으로는 루인 아스파담의 잘못이 맞았으나 가슴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말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으니…… 기회를 드리죠.”
“기회라고?”
“어디 한번 붙어 봅시다.”
그 말에 라이신이 기가 막힌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녀는 10위권의 더블넘버링 랭커다. 반면 권한울은 이제 막 천공투기장을 끝마친 루키.
물론 그 실력은 트리플넘버링을 뛰어넘어서 더블넘버링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10위권인 라이신에 비할 수는 없다.
“……미쳤어?”
“할지 말지 그것부터 결정하시죠.”
라이신은 고민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수락하고 싶지만 권한울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야, 이놈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당황스럽기는 권명우도 마찬가지였다. 권명우는 권한울에게 속삭였다.
“제가 시작한 일이니 제가 매듭을 지어야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권명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권한울은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사실 권한울이 라이신과 싸우려는 것은 루인 아스파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라이신은 온전한 벽력굉천권을 익히고 있겠지.’
권한울은 여러 가지 혈통을 보유하고 있다.
각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능을 조합한 결과, 권하울은 처음 보는 스킬의 원리를 파악하고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과거 권한울은 이 능력을 이용해서 루인 아스파담이 남긴 벽력굉천권을 재해석해서 이동 스킬을 창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인 아스파담이 지니고 있던 벽력굉천권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라이신과 싸우면 천공비로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는 더 단순했다.
‘궁금하다.’
라이신은 세계랭킹 20위권대의 강자다. 전 세계에 이만한 실력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 순수한 실력은 어디까지 통할 것인가.’
권한울은 자신의 실력을 두 단계로 나눠놓았다.
순수하게 흑룡혈만을 사용할 때의 자신과 여러 가지 혈통을 같이 사용할 때의 자신.
다른 혈통을 동시에 사용하면 라이신은 권한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실력으로 싸웠을 때, 라이신과 어느 정도로 맞수를 이룰 수 있을지는 권한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좋아.”
권한울이 고민하던 그때, 라이신이 입을 열었다.
“붙어보자.”
라이신은 허락을 구하듯 벽력권을 쳐다봤다. 벽력권은 긴 한숨을 내쉰 뒤 허락했다.
“마음대로 하거라.”
스승의 허락을 구한 라이신이 권한울을 향해 턱짓을 했다.
“따라와. 여기서 싸울 수는 없잖아.”
* * *
“여기라면 괜찮겠지.”
라이신이 권한울을 데려온 곳은 도시 밖의 한적한 평야였다.
주변에는 권한울의 일행과 벽력권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네가 이런 기회를 줄 거라고는 생각치 못했어.”
라이신은 몸을 풀면서 말했다.
“감사하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게.”
“그거 참 감사한 일이군요.”
권한울이 관심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차피 라이신은 권한울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흑천 일가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될 테니까.
애초에 명분조차 없는 복수다. 어느 누구도 호응해 주지 않으리라.
“대신 바닥을 기면서 빌 정도로 짓 밟아줄께.”
라이신을 중심으로 전류가 치솟아 올랐다. 빛이 폭사되며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환수 라이신. 흑천 일가 권한울에게 결투를 청하겠다.”
권한울도 자세를 잡았다. 용마기를 일으켰다.
검은 오러가 불길처럼 번졌다.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마치 검은 벽이 솟아난 듯한 압도적인 광경에 라이신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흑천의 권한울. 그 청을 받아들이겠다.”
라이신이 입술을 깨물며 땅을 박찼다.
황금색 번개가 들판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