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74화>
174. 시간 (4)
시술실 안으로 발을 내밀려던 그때였다.
“멈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지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오딘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오딘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아봤다. 시술실로 내려오는 계단 앞에 권미가 벽을 짚은 채 서 있었다.
“이상하네.”
그런 권미를 빤히 쳐다보며 오딘이 말했다.
“그렇게 많은 저주를 퍼부었으니…… 지금쯤 죽어야 정상인데. 오히려 정신을 차려?”
“그 앞은…… 너 같이 더러운 놈이 들어가도 괜찮은 곳이 아니야.”
권미는 음절 하나하나를 힘겹게 내뱉었다. 누가 봐도 무리를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와, 끝까지 재수 없게 구네. 역시 너희 흑천은 죄다 엿 같은 새끼들이야.”
오딘은 질색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야야, 너 자꾸 그렇게 재수 없게 굴면 내 손으로 직접 찢어서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알아?”
오딘은 마구 삿대질을 했다. 이미 권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권미를 괴롭히고 있는 저주는 보통 저주가 아니다.
흑천이 지닌 흑룡혈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온과 자신이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저주다.
<혈통을 죽이는 뱀>이라고 명명된 저 저주 앞에서는 바벨의 가주조차 일반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알았으면 닥치고 있어. 네년의 목숨에는 관심이 없…….”
권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 순간. 강맹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번졌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오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너 이게 뭔…….”
오딘조차 할 말을 잊을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저주에 당한 권미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혈통을 죽이는 뱀>은 말이 저주지 실제로는 생명체에 가까웠다. 그걸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오딘의 머릿속에 어떤 가설이 떠올랐다.
“힘이 남아 있는 동안 날 죽이겠다는 거냐?”
저주는 실시간으로 권미의 힘을 갉아먹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모든 힘을 빼앗아간 것은 아니다.
권미는 그 남은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서 폭주시킨 것이다.
이론상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오딘은 그런 짓이 실제로 가능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저주에 의해서 힘을 뺏기는 과정은 무척 괴롭다. 마력을 사용하면 그 과정이 가속화되며 더욱 괴로워진다.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서 영혼적인 고통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결코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괴물 같은 년이……?”
오딘은 경악을 하며 저주의 덩어리를 일으켰다. 엄청난 양의 저주의 덩어리가 오딘의 몸을 감쌌다.
앞서 보여 줬던 여유와 웃음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만큼 권미는 위험한 상대였다.
저주가 아니었다면 오딘은 권미에게 감히 덤벼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아앗!”
권미는 비명을 지르듯이 공격을 했다. 용투기가 담긴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오딘은 저주의 장벽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저주의 장벽은 권미가 휘두르는 주먹에 너무나도 쉽게 망가졌다.
“하!”
오딘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트렸다.
<혈통을 죽이는 뱀> 이외에도 수많은 저주가 그녀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저만한 파괴력이라니.
“이래서 흑천의 혈족이 싫은 거야!”
오딘은 고함을 지르며 저주를 일으켰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충돌했다.
그러나 싸움의 결판은 생각보다 쉽게 났다.
공방이 거듭될수록 권미의 기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혈통을 죽이는 뱀>이 점점 더 빠르게 가속화된 탓이었다.
“왜 그러지? 아까는 기세 좋게 덤벼들더만!”
오딘은 경박하게 웃으며 권미를 몰아세웠다.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헌터를 이렇게 몰아세우고 있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냐! 어째서 이렇게까지 목숨을 거는 거야? 그 빌어먹을 흑천의 긍지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개인적인 자존심?”
권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아까웠다.
“그게 아니면 권한울 때문이냐?”
권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오딘은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하핫! 놀랄 일이로군! 당신이 그렇게 권한울을 아꼈다니!”
권미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오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서 몸을 채찍질했다.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권한울은 네 아들의 경쟁자야! 저놈이 있으면 댁의 아들이 흑천의 왕좌를 차지할 확률이 더욱 낮아져! 그런데도 권한울을 감싸겠다고?”
이대로는 이길 수 없다.
권미는 남은 용투기를 모조리 한 점에 응축시켰다. 그것을 한 곳에 때려 박으려고 했다.
“그렇게 죽은 오빠가 그리웠나?”
하지만 오딘의 말이 들려온 순간, 평정심을 잃었다. 그 바람에 용투기를 제어하지 못했다.
용투기가 풀려 나온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오딘은 저주의 덩어리를 창으로 만들어서 권미의 가슴을 꿰뚫었다.
“쿨럭.”
권미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오딘은 비웃음을 지으며 권미를 내려다봤다.
“멍청한 년.”
* * *
오딘은 저주의 덩어리를 모조리 회수했다.
그리고 이번에야 말로 진짜 시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자 앳된 외모의 여인이 오딘에게 허리를 숙였다.
무척이나 공손한 태도에 오딘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예의가 뭔지 아는 친구네. 그래, 네가 타카미네 료코 맞지?”
“판데모니엄의 대의원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타카미네 료코는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타카미네 료코는 공포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 태도에 오딘은 적잖은 흥미를 느꼈다.
“넌 내가 무섭지 않니?”
“무섭습니다.”
“근데 왜 이렇게 평온해? 기분 나쁠 정도인데.”
“두렵다고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 최선을 다해서 오딘 님을 맞이하는 게 더 생존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호?”
오딘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넌 사람을 보는 재주가 있구나.”
가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다. 타인의 성향을 귀신같이 파악해 내는 재능 말이다.
“예쁜 짓을 했으니 상을 줘야지. 너는 사지 멀쩡하게 걸어 나가게 해 주마.”
오딘은 슬쩍 옆으로 비켰다. 빨리 떠나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오딘 님께 한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언?”
“예, 허락을 하신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허락이라…… 좋아. 말해 봐.”
타카미네 료코는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유리창을 가리켰다.
유리창 너머에는 권한울이 누워 있는 석관이 놓여져 있었다.
“오딘 님의 목적은 권한울 님이죠. 하지만 지금 권한울 님께서는 석관을 내오면 목숨을 잃게 됩니다.”
타카미네 료코는 숨을 한 번 고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무슨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권한울 님께서 시술을 받기 전에 섭취한 약품이 뭔지 들으신다면…….”
“상관없는데.”
타카미네 료코의 말이 멈췄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예?”
“상관없다고. 권한울이 죽든 말든.”
오딘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권한울이 아니라. 걔 몸속에 있는 무언가야. 오히려 죽어 주는 게 나한테는 편하지. 몸속에 있는 물건만 들고 가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흑천 일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오딘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짜증이 올라왔으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건 너 따위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죄송합니다.”
“말조심해. 자꾸 그러면 확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 산채로 몸이 부패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거 아니야?”
타카미네 료코는 황급히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 비굴한 태도에 오딘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만 가 봐. 이제부터 일어날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오딘은 다시금 짜증을 느꼈다. 꺼지라는데 왜 자꾸 남아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안에는 여러 가지 전자 기기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함부로 손을 대셨다가는 합선이 일어나서 폭발이 일어날 수도…….”
오딘은 말없이 타카미네 료코를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뒤편에 있는 모니터에 눈길이 갔다.
타카미네 료코의 몸에 의해서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기에 몸을 옆으로 빼고 나서야 모니터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남은 시간…… 50분?”
오딘은 반사적으로 타카미네 료코의 목을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앙큼한 계집년이 감히 이딴 개수작을 부려?”
“큭!”
“너 설마 시술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끌 생각이었어? 와, 이런 정신 나간 것을 봤나.”
오딘은 타카미네 료코를 집어던졌다. 타카미네 료코는 어깨부터 땅에 부딪히며 떨어졌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환자를…… 버리고…… 도망치는 의사는…… 없죠.”
타카미네 료코는 콜록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넌 곱게 죽을 생각하지 마라. 내가 데려온 놈 중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변태 놈한테 던져 주마.”
오딘은 타카미네 료코를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타카미네 료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멈추세요!”
오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림자에서 저주 하나가 튀어나와서 타카미네 료코에게 날아갔다.
저주에 닿자마자 타카미네 료코의 몸이 무너졌다. 피부가 검게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타카미네 료코는 오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안타까움만 가득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석관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문 앞에서 오딘은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릇을 잃어버렸을 때, 얼마나 절망했던가.
세상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고, 다시 잃어버렸을 때의 상실감은 감히 어떤 것에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그릇이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오딘은 양손을 문을 잡고 힘껏 열었다. 너무 힘을 준 탓에 문이 뜯겨져 나갔다. 뜯어진 문을 대충 집어 던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 음?”
그리고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닫혀 있었던 석관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옆으로 권한울이 등을 내보인 채 우뚝 서 있었다.
* * *
이다해는 흑천의 헌터들에게 붙잡힌 채 취조실로 끌려갔다.
바닥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핏자국.
용도를 알 수 없는 괴상한 장비들.
이다해가 두려움에 가득한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덜컥,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권혁이었다.
이다해는 놀란 얼굴로 권혁을 쳐다봤다. 당신이 여기 왜 있냐는 얼굴이었다.
-이번 반역 행위의 조사관 자리에 자원을 했지.
그 의문을 눈치챘는지. 권혁이 먼저 말을 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요? 권천 님께서 반역을 저지르시다뇨?
-3일 전, 회장님께서 외국에 출장을 나가셨다. 그리고 회장님이 묶고 계시던 호텔을 테러리스트들이 공격을 했지.
이다해의 미간이 좁아졌다. 설마? 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회장님께서는 무사하시다. 테러리스트 놈들은 회장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모조리 붙잡혔지. 그들 중 한 놈이 말했다. 이 일을 주동한 사람이 권천이라고.
-거짓말이에요!
이다해는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권천 님은 그럴 분이 아니세요! 그분께서 회장님을 얼마나 존경하시는데요!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이다해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권혁을 향해 간곡히 말했다.
-제발 다시 조사해 주세요! 그 테러리스트들이 거짓말을 한 거예요!
-알아.
권혁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다해는 말문이 막혔다.
-……예?
-천이에게는 죄가 없지. 그 사실은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럼 대체 왜 절…….
-글쎄 내가 널 왜 잡아왔을 것 같아?
권혁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느새 그의 얼굴이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이번 일로 회장님께서 얼마나 노발대발하고 계신지 몰라. 누구라도 그렇겠지. 아끼던 애완동물한테 물리면 화가 잔뜩 나는 법이잖아?
무언가 이상하다.
이다해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그렇게 화가 나면 망설임 없이 천이를 죽이실 줄 알았는데…… 내 생각과 달리 망설이고 계시더군.
권혁의 말과 행동이, 이 분위기가, 모든 것이 이상했다.
-나한테는 썩 달갑지 않은 일이지. 다행인 것은 혹시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대비를 해 놨다는 거야.
-권혁 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넌 천이의 애인이지.
이다해는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숨겼던 그 사실이 권혁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너 같이 출신도 알 수 없는 천한 년을 왜 만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나한테는 잘 된 일이지.
권혁이 이다해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남자라면 자기 여자가 위험해지면 눈깔이 뒤집히는 법이지. 천이의 성격을 생각하면 더 그럴 것이고.
이다해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반역 혐의를 받고 있는 지금, 천이가 널 구하기 위해서 난동을 피우면 어떻게 될까?
이다해는 권천을 노려봤다. 그 시선을 받으며 권혁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회장님이 아무리 냉정하셔도 이것만큼은 참기 힘드실 걸.
이다해는 굳은 얼굴로 권천을 쳐다봤다.
-대체 왜…… 어째서…….
-굳이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군. 넌 그냥 잠자코 여기 앉아 있으면 돼.
그때였다.
다시 취조실의 문이 열리더니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이다해는 몸을 들썩였다. 격한 공포심이 그녀를 지배했다.
-다해야!
이온의 마법사.
이다해에게 그릇을 심고, 이상한 실험을 하려고 했던 그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드디어 널 찾아냈구나!
마법사는 이다해에게 달려가서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남자와 달리 이다해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다, 당신이 왜 여기에…….
-내가 왜 여기에 있겠어. 너 때문이지.
마법사는 싱글벙글 웃었다.
-도저히 이온의 힘으로는 널 데려올 수가 없었어. 그래서 저분과 손을 잡기로 했지.
그렇게 말하며 마법사는 권혁을 돌아봤다. 권혁은 관심 없다는 듯 하품을 하고 있었다.
-이온은 권혁 님을 돕고, 권혁님께서는 널 우리에게 되돌려주기로 약속하셨단다!
* * *
어둠 속에서 권천은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무쇠로 만들어진 철창이었다.
흑천 일가의 외곽에 지어진 감옥.
평범한 헌터보다 몇 배는 강한 흑천의 혈족을 감금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그만큼 견고하며 보안도 철저했다.
-……다해는 괜찮을까.
권천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팔다리에 채워진 족쇄와 쇠사슬 때문이었다.
천장에 달려 있는 쇠사슬은 권천의 양팔을 허공에 고정시켜놓았다.
보통 쇠사슬이 아니라 유물을 녹여 만든 것이기에 권천조차 이 쇠사슬을 끊을 수 없었다.
그때, 감옥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환한 빛이 잠시 감옥을 비추었다.
누군가 철장으로 걸어왔다.
-야, 형 왔다.
배철수가 철창 밖에서 권천을 보고 있었다.
권천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형이 여긴 어떻게…….
-야, 내가 그래도 배씨 가문 후계자 아니냐. 가문 이름 좀 팔았다.
배철수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권천은 알고 있었다.
청송 배씨 가문은 표면상으로는 흑천과 동맹 가문이지만 실제로는 흑천에 복종하는 입장이다.
아무리 배철수가 후계자라지만 지금 이 행위는 무척 위험했다.
권천은 현재 반역 행위로 감옥에 갇혀 있으니까 말이다.
-배고플 것 같아서 음식을 좀 가져왔는데…….
배철수는 인상을 쓰며 권천의 양팔을 쳐다봤다.
-쇠사슬 때문에 안 되겠네.
배철수는 감옥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숨을 푹 내쉬며 권천에게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네가 테러의 주동자라니.
-난 아니야.
권천의 말에 배철수가 고개를 끄덕엿다.
-알아 인마. 네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것쯤은.
권천은 코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굳게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무척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못해. 테러리스트들의 폭로는 둘째 치고 그놈들의 아지트에 남겨진 증거들이 다 널 가리키고 있어.
이번 테러는 급조된 게 아니다. 오랫동안 준비가 되었다. 그만큼 권천을 지목하는 증거들 역시 많았다.
-회장님께서도 화가 많이 나셨어. 아직 널 죽이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으셨지만…….
배철수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런 배철수를 바라보며 권천은 미소를 지었다.
-야, 넌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냐?
-울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에휴, 말이나 못하면…….
배철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너무 암울하게 생각하지 마. 회장님께서 조사단의 규모를 확장하시려는 것 같더라. 이번 일을 제대로 조사해보겠다는 거지.
그렇다면 권천의 혐의가 풀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권천은 결백하니까 말이다.
-그럼 네 누명도 벗겨질지 몰라. 그럼 난 이만 가본다.
배철수는 감옥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아, 맞다.
-왜 그래?
-이다해라고 있잖아. 이번 조사단에서 그 아이를 데려갔어.
그렇게만 말했으면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말이 문제였다.
-근데 이다해를 추궁하기로 한 조사관이 권혁 님이더라.
그 순간, 권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역 혐의로 붙잡히기 직전, 권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아, 걱정 마라. 너만 결백하다면 아무 문제없을 테니까.> <아, 그런데 있잖아. 네가 데리고 있던 그 시녀 이름이 뭐였지? 이다해라고 했던가?> <그 아이에게는 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구나.> <이온의 마법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많이 들려와서 말이야.> 권천은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짧은 시간, 수도 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형, 나 좀 도와줘.
-응? 뭔데?
-감옥을 나가야겠어.
그 말에 배철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미쳤지? 도망? 도망이라고? 그랬다가 잡히면 그때는 진짜 죽는 거야!
-알아.
-그리고 도와달라고? 내가 널 도와주면 우리 가문은? 우리 청송 배씨 가문은 어쩌라고!
배철수는 크게 화를 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여기서 잠자코 기다려! 회장님은 신중하신 분이야! 감정에 휘말려서 널 죽이실 분이 아니라고. 이번 일도 철저하게 조사하신 다음에…….
-그동안 다해한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그 애는 잊어. 이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여자 한 명 때문에 네 인생을 다 말아먹을 생각이야?
-다해가 임신을 했어.
배철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로 권천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거짓말 하는 거지?
권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행동에 배철수는 철장을 붙잡고 소리쳤다.
-너 정말 미쳤구나! 그깟 여자에 홀려서…… 그런 출신도 모르는 여자한테 미쳐서……!
-형밖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개소리하지 마! 내가 왜…….
배철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를 빠득 갈았다.
-씨발…… 이 빚은 비싸게 먹힐 거다.
그 말에 권천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