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71화>
171. 시간 (1)
타카미네 료코는 말없이 CCTV 화면을 바라봤다.
사태는 최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권미는 패배했으며 흑예대원들은 지원을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권한울 님이라도 살려야 하는데…….”
문제는 권한울이 석관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환골탈태 시술은 약품을 이용해서 신체를 억지로 망가트린 뒤, 석관을 이용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다시 재구성을 하는 과정을 거친다.
현재 권한울은 특별 조합된 약품을 섭취한 탓에 뼈와 근육, 장기가 녹아내려서 뒤섞인 상태였다.
석관을 열면 안에 있는 권한울도 죽는다. 지금 권한울은 이 시술실에 꼼짝없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남은 시간은 1시간 20분…….”
타카미네 료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딘과 대치하고 있는 흑천의 헌터들을 바라봤다.
지금으로서는 저들이 버티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정말 오랜만이야. 거의 20년만이지?”
주하연을 바라보며 오딘이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널 만나서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지금까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공간계 적성이라니! 너무 기뻐서 방방 뛸 뻔했다니까. 너라면 내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거라고 확신했거든.”
추억을 회상하는 오딘의 목소리는 무척 다정했다. 물론 주하연은 역겹다는 생각만 들었다.
“근데 하필이면 흑천에게 습격을 당해서 널 뺐길 줄이야…… 그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를 거야.”
오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난 흑천이 싫어.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찾아와서 방해를 하거든.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 놈들은 모를 거야. 오만하고, 건방지고, 짜증나는 놈들이니까.”
“닥치십시오.”
더 이상 들어줄 수 없다는 듯 주하연이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인간 찌꺼기가 흑천을 욕하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찌꺼기? 네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네.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니까.”
숨이 멎는 듯한 소리가 났다. 주하연은 이를 갈며 말했다.
“어머니입니다.”
“아, 그랬나? 뭐,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오딘이 관심없다는 듯이 말했다. 주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쨌거나 날 만난 게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니었잖아? 덕분에 마법도 배웠으니까.”
오딘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한테 배운 마법으로 흑천에서 잘나갔으면서 이제 와서 날 욕하는 건 너무 염치가 없지 않니? 개도 은혜를 아는 법…….”
주하연이 참지 못하고 마법을 발현했다. 발산된 마법이 오딘이 서 있는 공간을 절단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오딘이 만들어 낸 저주의 장벽이 주하연의 마법을 막아 냈다.
“내 힘을 흡수하려고 그랬으면서 은혜 운운하지 마.”
주하연은 잘 알고 있었다.
오딘이 판데모니엄의 대의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저주마법은 사용자의 영혼이 가진 힘에 따라서 위력이 결정된다. 이 영혼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 오딘이 선택한 방법은 무척 간단했다.
타인을 죽여서 그 영혼을 흡수하는 것이다.
일반인보다 마법사의 영혼을 흡수하는 게 훨씬 효과가 크기 때문에 오딘은 재능 있는 사람을 데려다 마법을 가르치고 때가 되면 죽여서 그 영혼을 흡수했다.
주하연 역시 그럴 목적으로 오딘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래도 은혜는 은혜잖아?”
주하연의 살기에도 오딘은 눈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나한테 배운 덕분에 성공한 것도 사실인데. 그걸 부정하면 안 되지. 내가 아니었으면 넌 그냥 일반인으로 재미없고 따분하게 살았을 걸.”
주하연의 얼굴이 점점 더 일그러졌다. 짙은 살기가 휘몰아쳤다.
“쿨럭.”
그때, 오딘의 손에 붙잡혀 있던 권미가 피를 토해냈다. 내장이 썩어가고 있는지 시커먼 피였다.
“슬슬 무겁네.”
오딘은 권미를 한쪽으로 내동댕이쳤다. 그 모습에 권후돈의 눈동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효심 한번 지극한데? 하긴 화가 나야지 정상이지.”
오딘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아직도 덤비질 않는 거야? 설마 내가 무서워서 화가 난 척만 하고 있는 건 아니지? 에이, 아니겠지. 흑천의 혈족께서 그딴 쓰레기 짓을…….”
그 순간, 권후돈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메이홍과 가엘 가르시안을 뿌리치고 달려들었다.
오딘을 향해 뛰어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양의 흑린갑이 권후돈의 몸을 감쌌다. 철갑의 거인이 되어 오딘을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효자 났네. 효자 났어.”
하지만 주먹이 닿는 것보다 먼저 오딘의 저주가 움직였다.
저주의 덩어리들이 수십 개의 칼날이 되어 권후돈의 몸 곳곳을 절단했다.
그 단단하다는 흑린갑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저주의 칼날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맨몸이 된 권후돈을 꿰뚫었다.
“응?”
오딘이 뜻 모를 소리를 냈다. 칼날에 꿰뚫리기 직전, 권후돈이 사라졌던 것이다.
시선을 조금 멀리 향하자 주하연의 옆에 엎어져 있는 권후돈이 보였다.
칼날에 뚫리기 직전, 주하연이 공간도약 마법을 사용해서 권후돈을 이동시킨 것이다.
“권후돈 님.”
공간계 마법은 강력하지만 효율이 좋지 못하다. 권후돈 한 명을 이동시키기 위해서 주하연이 쓴 마력량은 상당했다.
“화가 나시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 하지만 저 남자는 분노만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오, 날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걸.”
“입 다무십시오.”
주하연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세 분은 뒤에 물러나 계세요.”
주하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라면 잘 타일렀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김 비서님.”
“듣고 있네.”
“아무래도 저희 두 사람 모두 목숨을 걸어야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네.”
김 비서는 아공간을 열어서 뾰족한 송곳을 하나 꺼냈다.
평범한 송곳이 아니었다. 이런 날을 위해서 아껴 둔 물건이었다.
“크으.”
김 비서는 송곳으로 자신의 가슴 정중앙에 박아넣었다. 송곳은 액체로 변해서 몸에 스며들었다.
저주로 망가졌던 몸이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아니, 더욱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김 비서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이 회복력의 대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준비가 끝났네.”
“저도 됐습니다.”
주하연이 마법을 발현했다. 허공에 마법진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공간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공간이 봉처럼 길게 늘어났다. 주하연은 그것을 허공에 가볍게 휘둘렀다.
“오, 진짜 목숨을 걸려는 모양이네.”
오딘은 흥미롭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근데 승산 없는 거 너희 둘도 잘 알고 있지?”
두 사람은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 * *
오딘은 주하연이 만들어 낸 봉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적성에 맞지 않은 탓에 공간계 마법을 익히지는 못했지만 마법서는 몇 번 탐독해 본 적이 있었다.
카우세우만의 존재할 리 없는 무기
간단하게 말하자면 물리력을 구현화한 마법이다.
저 봉은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봉 주제에 참격, 타격, 등등. 모든 형태의 공격이 가능했다.
주하연이 공간도약 마법을 사용해서 단숨에 오딘에게 접근했다. 오딘의 정수리를 향해 봉을 내리쳤다.
오딘은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것을 선택했다. 마법을 발현해서 허공을 부유하듯 움직여서 뒤로 물러났다.
주하연의 봉이 오딘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며 땅을 가격했다. 그 순간, 바닥 전체가 으깨졌다.
“오우.”
오딘은 감탄했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었다.
봉을 내리치는 순간, 마법을 적용해서 무게를 수천 배로 증가시킨 것이다.
오딘이 만들어낸 저주의 방벽이 아무리 단단하다지만 저 공격은 위험했다.
“현명하네. 날 상대로 근접전을 선택하다니.”
마법의 이점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원거리, 다양한 효과.
주하연의 공간 마법만 하더라도 공간을 통째로 절단한다거나 전체를 짓눌러서 사람을 으깨버릴 수 있다.
하지만 주하연은 그런 이점을 포기하고 근접전을 선택했다.
공간계 마법은 빠르고 효과적이다.
그러나 위력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격차가 크지 않으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오딘 정도 되는 인물에게는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
방금 전, 주하연이 발현한 공간 절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낸 것처럼 말이다.
“여유 부릴 틈이 있는 모양이죠?”
별안간 주하연이 봉으로 땅을 내려찍었다. 그런데 봉은 땅에 박히지 않고 쑥 사라졌다.
“응?”
오딘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뒤에서 튀어나온 창이 오딘의 머리가 있던 공간을 꿰뚫었다.
주하연은 봉을 빼낸 뒤, 허공에 휘둘렀다.
그 순간, 봉대의 반절이 사라졌다. 동시에 오딘의 주변에 수십 개의 봉이 나타났다.
“공간굴절이라?”
오딘은 다시 감탄했다. 이 고난이도의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현하다니.
물론 다른 무기도 아니고 <카우세우만의 존재할 리 없는 무기>라서 가능한 묘기다. 저 봉은 공간계 마법에 최적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대단한 일은 대단한 일이었다.
“많이 성장했네.”
오딘의 발밑에서 저주의 덩어리가 치솟았다. 오딘의 몸을 휘감으며 갑옷처럼 변했다.
봉의 끝이 갑옷 곳곳을 긁었다. 하지만 결국 갑옷을 뚫지는 못했다.
“근데 이 정도로 끝이면 많이 실망…….”
그 순간, 오딘의 시야에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주하연의 뒤쪽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결계가 싹 사라졌다. 기존의 풍경이 사라지고 전혀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김 비서.
그 남자가 손을 천장을 향해 뻗고 있었다. 그 위로 고리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 숫자가 과할 정도로 많았다.
수백 개가 넘는 고리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오딘은 어째서 주하연이 결계를 사용했는지 깨달았다. 김 비서가 스킬을 준비할 시간을 번 것이다.
“주하연! 피해라!”
김 비서가 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주하연은 망설임 없이 공간도약을 사용해서 김 비서의 옆으로 피했다.
수백 개의 고리들이 일시에 오딘을 향해 쏘아졌다. 고리들이 오딘을 향해 날아들었다.
고리 하나가 저주의 갑옷에 적중했다. 고리는 갑옷을 찢고 틀어박혔다
“뭐?”
신체까지 다치지는 않았지만 저주의 갑옷이 찢어진 것만 해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딘이 저주를 이용해서 만들어 낸 방호구는 전부 SS급 몬스터의 거죽만큼이나 단단하니까.
그때였다.
갑옷에 틀어박힌 고리가 폭발했다. 오딘은 큰 충격과 함께 뒤로 밀려 나갔다.
시선을 내리자 저주의 갑옷의 반절이 날아갔다. 옷과 피부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너무 우습게 봤군!”
당황할 틈은 없었다. 수백 개의 고리가 연달아 오딘을 덮쳤기 때문이다.
오딘은 고함과 함께 마력을 일으켰다. 그림자에서 저주의 덩어리가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저주의 덩어리가 장벽이 되어 고리를 막아 냈다. 하지만 저주의 장벽 하나로 막기에는 고리의 양이 너무 많았다.
고리는 저주의 장벽을 찢어발기고 터트렸다. 오딘은 저주의 장벽을 연달아 만들어 고리를 막아 냈다.
고리가 먼저 소모되느냐. 저주의 양이 먼저 떨어지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하연이?”
김 비서 쪽으로 피한 줄 알았던 주하연이 어느새 오딘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공간도약을 사용한 거지?”
마력의 흐름이 격한 장소에서는 공간도약을 사용하기가 힘들다. 마법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설마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은 몰랐는데.”
오딘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20년 전에 놓쳤던 소녀가 이렇게 강해졌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하연아 너는 정말이지…….”
문득, 오딘은 위화감을 깨달았다. 주하연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너.”
주하연의 몸에서 압도적인 마력이 방출되었다. 대형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마력을 제어하느라 말이 없었던 것이다.
주하연이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한손은 위에, 반대 손은 아래에 놓았다.
두 손이 만들어 낸 빈 공간 사이로 무언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를 따라서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깨진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들이 기이하게 변했다.
“……설마.”
처음 보는 마법이다. 공간계 마법서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마법.
그럼에도 오딘은 그 마법의 정체를 어느 정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공간을 압축시켜서?”
오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하연이 압축시켰던 공간을 해방시켰다.
고리를 막아 내느라 뒤쪽은 신경을 쓰지 못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등을 향해 주하연이 준비한 마법이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