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70화>
170. 판데모니엄 (5)
권천이 이온의 연구실을 습격한 이후, 뒤이어 도착한 본대가 연구실을 정리했다.
이온이 무언가 수상쩍은 연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으나 그게 무엇인지 밝혀 낼 수는 없었다. 연구일지가 온통 괴상한 언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설 등급의 해석 스킬을 사용해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흑천의 정보부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사실 이는 악마의 언어였기에 해석이 불가능 했던 것이지만 흑천의 정보부는 거기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다.
이제 유일한 단서는 도망친 이온의 마법사가 각별히 신경을 썼던 ‘이다해’라는 소녀였다.
-왜 그 아이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러나 권천은 이다해를 의도적으로 숨겼다. 이해할 수 없어하는 배철수에게 권천이 말했다.
-그 아이, 부모님이 다 죽었더라. 납치당하는 과정에서 이온이 죽인 거야.
이다해의 반응으로 보건데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게 분명했다. 차마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저렇게 괴로워하는 아이가 정보부에 가면 어떻게 되겠어? 정보부 사람들은 인정을 모르는데.
배철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정보부가 얼마나 잔인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사람의 뇌를 해부해서라도 정보를 캐내는 곳이 정보부다. 설사 어린아이라 해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저 애는 분명히 뭔가 비밀이 있어. 날 납치했던 흑천의 마법사도 저 애한테만 신경을 썼단 말이야.
-그건 앞으로 차차 알아내면 되지. 안 그래?
권천은 말에 배철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권천은 이다해의 거처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다해의 가족은 모두 죽었다. 친척들도 없었다. 그야 말로 천애고아였다.
어디에서도 맡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 게다가 이다해가 이온과 연관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앞으로 넌 흑천에서 일하게 될 거야.
그렇기에 권천은 이다해를 곁에 두기로 결정을 내렸다.
-싫으면 말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하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다. 이다해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 *
일은 그다지 고되지 않았다.
흑천 일가는 악명에 비해서 고용인들에게 박한 곳이 아니었다. 일거리는 적당했고, 월급은 많았다.
게다가 권천이 각별히 신경을 쓰는 아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이다해는 쉬운 일만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모든 일이 마냥 잘 풀린 것은 아니었다.
-어머, 미안해.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있을 때였다. 물을 담아놓은 양동이가 엎질러졌다.
안에 담겨 있던 물이 바닥에 넓게 깔렸다. 복도가 온통 물난리가 났다.
-지나가다가 모르고 양동이를 발로 차버렸네?
양동이를 찬 시녀가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와 함께 있던 시녀들도 웃었다.
저택의 젊은 시녀들은 거의 다 이다해를 싫어했다.
이유야 단순했다. 이다해가 권천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음습한 괴롭힘이 날마다 이어졌다.
-이거 다 닦으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근데 이를 어쩌나 시녀장님께서 이제 곧 검사하러 오실 텐데.
시녀들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다해를 지나쳤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속삭였다.
-야, 이러다 권천 님한테 이르는 거 아니야?
-걱정 마. 멍청한 년이라 그런 짓도 못해. 그리고 말하면 뭐? 실수라고 말하면 되지.
-지나가다가 양동이 좀 엎지를 수도 있지. 그런 걸로 이르는 사람이 나쁜 거 아니야?
자기들 딴에는 작게 말했다고 말했으나 이다해의 귓가에는 다 들렸다.
이다해는 말없이 물바다가 된 복도를 바라봤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아주 짧고 굵게.
시녀들이 이다해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는 게 두 가지 있었다.
첫째, 이다해는 멍청하지 않다.
둘째, 이다해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남한테 말하기 보다는 직접 해결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다해는 대걸레를 내팽개쳤다. 넘어진 양동이를 든 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헌터처럼 빨랐던 것이다.
<진(眞) 건강혈이 격한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체력이 0.03 상승합니다!>
이다해 몸속의 건강혈이 반응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다해는 건강혈 덕분에 능력치를 많이 상승시킬 수 있었다.
평범했던 그녀가 이류 헌터 정도의 능력치를 갖추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쌓인 능력치를 전부 발휘했다. 재빨리 양동이에 물을 담았다. 세제도 듬뿍 섞었다. 그 양동이를 들고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거 들었니? 이제 곧 가주님께서 후계자를 결정하실 거래.
-뭘 잘못 알고 있네. 후계자를 정하는 게 아니라. 후계자 시험을 시작할 날을 정하신다는 소리겠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복도 청소를 방해했던 시녀들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다해는 망설임 없이 그 시녀들의 머리 위에 물을 퍼부었다.
-꺄악!
-끼아악!
시녀들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다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다해가 양동이에 남은 물방울들을 털어내고 있었다.
-아, 미안해요. 모르고 양동이를 엎지르고 말았네요.
이다해는 무표정으로 말한 뒤, 양동이를 내렸다. 그 모습에 시녀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다해를 포위했다.
-너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봐주니까 우리가 우습게 보이지?
시녀들은 이다해를 포위한 채 험한 말을 내뱉었다. 무척 험악한 분위기였다.
그때, 별안간 이다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죄, 죄송해요.
이다해는 바닥에 엎드린 채 잘못을 빌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시녀들은 통쾌하기보다 당황했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이세요?
그때, 계단 밑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녀들은 바짝 굳은 채로 시선을 돌렸다.
권천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 도련님…… 그, 그게…….
권천은 말없이 이다해를 향해 다가갔다. 권천이 다가올 때까지도 이다해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괜찮니? 일어날 수 있겠어?
권천이 손을 내밀고 나서야 이다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천은 이다해의 치마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했다.
-고용인들 사이에서 이런 따돌림이 유행할 줄은 몰랐네요.
-도, 도련님! 그런 게 아니에요! 저, 저 얘가 우리한테 물을 뿌렸단 말이에요!
시녀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물에 젖어 있는 자신들의 옷이 그 증거였다.
-그게 정말이니?
이다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긍정하자 시녀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 하지만 실수였어요…… 바닥을 닦다가 모르고 양동이를 엎었는데…… 계단에 누가 있을 줄은…….
이다해가 다시 눈물을 흘릴 기세로 말했다. 권천은 짧게 혀를 찼다.
-실수를 했을 뿐인데. 사람을 이렇게 몰아세운 건가요?
-아, 아니…… 그, 그런 게 아니라…….
-같은 식구면 이 정도 실수는 너그러이 넘어갈 줄 알았죠. 그걸 또 저한테 말하시다니.
권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시녀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번 일은 따로 문책하지 않겠어요. 대신 이 자리를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해야. 우리는 가자.
권천은 다해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시녀들은 그 모습을 사뭇 부럽다는 듯이 지켜봤다.
그러다가 문득 이다해에 시선이 마주쳤다. 이다해는 고개를 돌린 채 살짝 혓바닥을 내밀었다.
-저, 저 년이 진짜……!
시녀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 * *
-왜 그랬어?
시녀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자마자 권천이 말했다. 이다해는 깜짝 놀라서 권천을 쳐다봤다.
-속여도 소용없어. 네가 물을 뿌렸잖아.
이다해는 우물쭈물했다. 이대로 권천에게 미움을 받을까봐 안절부절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 안 그러면 정말 화낼 거야.
-……쟤들이 먼저 제가 청소 중인데. 물을 엎질렀어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권천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싫었다. 이다해는 순순히 이실직고 했다.
-그래.
그러나 권천은 이다해를 질책하지 않았다. 당황한 이다해를 향해 권천이 덧붙였다.
-네가 평소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정도는 나도 다 알고 있어.
저택의 시녀들이 이다해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런 보고가 시도 때도 없이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권천이 나섰다가는 시녀들이 더욱 이다해를 싫어할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다.
-네가 오래 참은 것도 알고 있어. 이 정도면 약과지. 하지만 저 아이들은 일반인이야. 혹시라도 무력을 써서는 안 돼. 알겠지?
권천이 이다해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에 이다해는 뜨끔했다
역시 권천은 이다해가 이류 헌터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물어보지 않았을 뿐.
그게 이다해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권천은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묻지 않는 것일까.
-당분간은 저 애들이랑 같이 있으면 안 되겠네.
이다해가 골탕을 먹인 시녀들은 나름 이 저택에서 젊은 고용인들을 주름잡고 있었다.
-어딜 좀 가야하는데. 따라 올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다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권천이 향한 곳은 백두산 정상에 있는 천지였다.
사시사철 물이 고여 있는 이 거대한 호수는 예전부터 흑천 일가의 성지처럼 내려왔다.
물론 진짜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백두산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그렇게 여겨졌다.
-와아.
이다해는 처음 보는 천지의 모습에 감탄했다.
물론 사진으로는 많이 봤다. 하지만 이렇게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기하지? 나름 보는 맛이 있는 곳이야.
-대단하네요. 그런데 여기는 왜 오신 건가요?
-아버지께서 할 말이 있다고 부르셨거든.
천지에는 권천과 이다해 둘만 있지 않았다. 먼저 도착한 흑천의 고용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척 많아서 의아했는데. 가주가 오기 때문인 듯 했다.
-천아!
그때, 누군가 권천을 불렀다. 권천과 무척 닮았으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이다해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흑천 일가에서 몇 번 본적이 있다.
흑천 일가의 장남이자 권천의 형인 권혁이었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권천의 얼굴이 웃음꽃이 피어났다. 권천은 권혁을 안기 위해서 양팔을 벌렸다.
그러나 권혁은 손바닥을 내밀며 권천을 막았다.
-형님?
-아버지께서 너까지 불렀을 줄은 몰랐다. 너랑 나를 같이 불렀다는 게 무슨 뜻일 것 같으냐?
권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 눈빛을 본 순간, 이다해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저렇게 소름끼치는 눈빛을 본적은 처음이었다.
-드디어 아버지께서 흑천의 후계자를 결정하실 생각인 게 분명하다.
-그렇군요.
-아버지의 성향을 생각하면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시험을 내시겠지. 그게 뭐가 됐건 나는 너한테 양보할 생각이…….
-흑천의 주인에 어울리는 사람은 형님뿐입니다.
그 한 마디에 권혁은 말문이 막혔다.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형님이야 말로 가주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벌써부터 날 속일 생각이냐?
-형님, 아시잖습니까. 저는 가주 자리에 미련이 없습니다. 가주가 될 만한 그릇도 아니고요.
권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권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의심마저 묻어나왔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오늘 증명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오시면 형님을 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이게 옳기 때문입니다. 흑천의 가주직은 형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져가야 합니다. 저는 옆에서 형님을 도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권혁은 말없이 권천을 노려봤다. 아직도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일단 아버지께서 오시면 보자.
그리고 끝끝내 권천의 말을 믿지 않고 몸을 돌렸다.
권천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세요?
결국 이다해는 참지 못하고 권천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가주직을 포기할 생각이세요?
-내가 가주가 된다고 결정된 적도 없는데. 포기한다는 말은 그렇네.
권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로 형님을 지지할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진심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가주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거든.
이다해는 속으로 그 말을 부정했다.
그녀가 보기에 가주에 어울리는 사람은 권천이었다.
활약상과 실력만 생각하면 권혁이 권천보다 우세하기는 했다.
하지만 친동생의 말조차 저렇게 의심하고 보는 권혁이 제대로 된 가주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권천 님이라면 뭘 해도 잘하실 거예요.
하지만 이다해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개 시녀가 말하기에는 너무 주제넘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권천은 밝게 웃으며 화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