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66화>
166. 판데모니엄 (1)
“아, 맞다.”
청년, 오딘이 아제트 헤르메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돈 좀 써야겠는데요.”
“돈? 무슨 소린가. 자네의 부탁은 다 들어주지 않았나.”
“나 말고 다른 놈들은 돈이 있어야 움직이거든요.”
오딘의 말에 아제트 헤르메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놈들?”
“판데모니엄에서 놀고먹고 있는 놈들을 좀 데리고 왔죠.”
“이 일에 외인을 끌어들였단 말이냐!”
“나도 외인인데 뭐 어때요.”
“자네는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아제트 헤르메스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럼에도 오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말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흑천을 골탕 먹이려는데. 관심 있는 놈들은 따라오라고 했죠. 그리고 그 눈으로 직접 봤으니 이제 깨달았을 거 아닙니까. 이온의 힘만으로는 흑천을 어쩔 수 없다는 거.”
오딘은 사태가 이렇게 흘러갈 것임을 일찌감치 꿰뚫어보고 다른 전력을 구해 왔다.
“그럼 자네가 데려온 이들은 흑예대를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 당연하죠.”
아제트 헤르메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오딘의 안목이라면 믿을 만하다. 하지만…….
“상대는 흑천이다. 그런데 놈들이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흑천의 악명은 판데모니엄에서도 유명했다. 고작 몇 푼 때문에 흑천과 척을 지려는 악인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흑천을 무서워하지 않는 얼간이들만 모아 왔죠.”
오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떻게 할 겁니까. 나 혼자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러면 일이 좀 복잡해질 수도 있어요.”
“얼마면 되는가?”
오딘이 금액을 말했다. 생각보다 엄청난 액수에 아제트 헤르메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차피 이온에서는 남는 게 돈이잖아요? 이번 기회에 좀 푸시지 그래요?”
“……알겠네. 돈은 일이 끝나면 지불하도록 하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오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하기 시작했다.
“나다. 의뢰금은 받아 냈으니 다들 시작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병원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럼 이따 봅시다.”
“자네는 어디로 갈 생각이지?”
“나요? 그거야 당연히…….”
오딘이 병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장 까다로운 놈들을 정리하러 가야지.”
* * *
알렉산더 애런은 흑암대를 데리고 시술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하여간 별것도 아닌 놈이 말이야.”
알렉산더 애런은 백색과의 전투를 곱씹으며 불만을 토로했다.
“도련님이랑 너희들도 알겠지? 그런 놈들이 오면 무서워할 거 없어. 막상 들이박으며 별 거 아니야.”
알렉산더 애런의 말에 권후돈과 메이홍, 가엘 가르시안은 서로를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세 명이 보기에 백색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세 명이 모두 덤벼야 간신히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강자를 순식간에 처리해 놓고 약하다고 말하다니.
“시술실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만 더 힘내서…….”
그때, 갑자기 벽이 무너졌다.
무너진 벽에서 괴한이 튀어나오더니 알렉산더 애런을 덮쳤다.
알렉산더 애런은 재빨리 도끼의 손잡이로 남자의 손을 막았다. 남자는 손잡이를 붙잡은 채 알렉산더 애런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넌…… 또 뭐 하는 새끼야.”
알렉산더 애런의 질문에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런 이가 듬성듬성 자라나 있어 무척 흉측했다.
“핀 쿨러. 판데모니엄에서 왔다.”
남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권후돈이 놀라서 소리쳤다.
“뉴욕의 시장을 암살하고 판데모니엄의 의원직에 올랐다는 그 핀 쿨러?”
“……도련님, 이런 놈들은 자기를 알아봐 주면 좋아한단 말이야.”
권후돈의 외침에 알렉산더 애런이 핀잔을 줬다. 아니나 다를까. 핀 쿨러는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나 대신 소개를 해 줘서 고맙다. 보답으로 넌 아프지 않게 죽여 주마.”
“이 추잡한 놈이 뭐라고 지랄하는 거야. 우리 도련님 건들면 뒤진다?”
“그전에 우선 이 계집을 손봐줘야겠군.”
핀 쿨러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알렉산더 애런을 밀어붙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알렉산더 애런의 등을 받치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핀 쿨러는 멈추지 않고 알렉산더 애런을 계속 밀어냈다.
“도련님이랑 후배들! 난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 있어!”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 사이로 알렉산더 애런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 어쩌지?”
권후돈이 당황해서 둘을 쳐다봤다. 메이홍도 어쩌지 못했다.
“……어차피 우리가 끼어들어도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가엘 가르시안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를 고민할 때입니다. 저분의 말대로 우선 대장님께 합류하죠.”
분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권후돈과 메이홍은 가엘 가르시안의 말대로 권한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적색을 처리한 뒤, 김 비서는 주하연과 합류하려 했다.
“좋은 구경을 했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뒤를 돌아보자 청년이 보였다.
분명히 얼굴은 젊은데. 머리카락은 노인처럼 반백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가 분위기가 묘했다.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마력을 일격에 모조리 날려 버리다니. 놀라운 기술이야.”
“어디서 오신 어르신이십니까.”
김 비서는 본능적으로 이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이도 자신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확신했다.
“오…… 이렇게 금방 알아볼 줄은 몰랐는데.”
“제 주특기가 탐지라 감히 어르신의 기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함도 마음에 드네.”
오딘은 끌끌 웃었다. 어딘가 노인네 같은 웃음소리였다.
“내 이름은 오딘이라고 해.”
“판데모니엄의 대의원이셨군요.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허헛, 그럴 수도 있지. 내가 워낙 바깥 활동을 잘 하지 않으니까. 근데 있잖아.”
오딘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왜 내 이름을 듣고도 살기를 지우지 않는 거야?”
없애기는커녕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김 비서가 일으킨 기운이 주변의 사물을 진동시켰다.
“판데모니엄의 쓰레기가 주제도 모르고 흑천에게 이를 드러냈으니 응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강단도 좋다. 감히 내 앞에서 쓰레기라는 말을 다 쓰고.”
“악취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군요.”
김 비서의 양팔에 휘감겨 있는 고리들이 톱날처럼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온과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기에 이번 일에 관여했는지. 낱낱이 불어야 할 겁니다.”
“그럴 능력은 있고?”
김 비서는 대답 대신 고리를 집어던졌다. 열 개의 고리가 오딘을 향해 날아갔다.
열 개의 고리는 공기를 미끄러지듯이 오딘에게 쇄도했다.
몸 곳곳에 고리가 틀어박히기 직전, 오딘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솟구쳤다.
솟구친 그림자가 오딘의 몸 주변에 벽을 만들어 냈다. 고리는 벽을 긁으며 다시 김 비서에게 되돌아갔다.
“어우 섬뜩하네.”
오딘이 그림자 벽에 난 상처들을 보며 말했다.
“SS급 몬스터의 거죽만큼이나 단단한 건데. 이걸 베어 버리네.”
김 비서는 되돌린 고리를 다시 자신의 팔에 휘감으며 고민했다.
고리가 벽을 벨 때, 소리가 별로 좋지 않았다. 저 벽을 뚫고 오딘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두 배 가량 더 위력을 높여야 했다.
“오? 또 뭔가를 보여 주려고?”
김 비서는 열 개의 고리를 모조리 합쳤다. 거대한 고리가 김 비서의 머리 위에 떠올랐다.
그 모습에 오딘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와 힘으로 겨루겠다고?”
“못할 것도 없잖습니까.”
“멋지네. 과연 흑예대의 2인자다워.”
오딘은 또 다시 노인 같이 웃었다.
“이래서 흑천이 무서운 거야. 이미 유명해진 놈들 말고도 무시할 수 없는 놈들이 수두룩하거든.”
일개 부관이 판데모니엄의 대의원이 만들어 낸 방어벽에 상처를 입혔다. 그것도 모자라서 정면에서 뚫어 버리겠다며 정면승부를 걸어왔다.
실력만 따지면 김 비서는 어지간한 세계랭커들조차 범접하기 힘든 강자였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오딘이 만들어 냈던 장벽이 액체로 변하며 허물어졌다. 젤리처럼 꿈틀거리며 불어나기 시작했다.
젤리의 양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오딘의 몸을 휘감고도 땅을 뒤덮을 정도로 많아졌다.
“이게 뭘까?”
오딘의 물음에 김 비서의 미간이 좁아졌다.
뭔지 모르겠다. 정체를 짐작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본능이 자꾸 경종을 울려댔다.
“농축시킨 저주야.”
오딘이 물을 뜨듯이 손으로 검 담았다가 바닥에 떨어트렸다. 액체는 공기 중에 흩어졌다.
“암전, 이명, 쇠약, 부패, 괴사 등등. 존재하는 모든 저주 마법을 압축하고 응축하고 걸러낸 게 이것이지.”
오딘이 마법사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정확히 무슨 마법사인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그와 싸운 이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에 닿기만 해도 몸이 썩어 버리고 바스라지지. 못 믿겠어? 벌써부터 믿을 필요는 없어. 곧 그 몸으로 직접 확인하게 될 테니까.”
“제안은 감사하지만 사양하죠.”
김 비서가 고리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8할의 마력을 집중시켰다. 일격에 오딘을 베어 버릴 생각이었다.
“싫어? 근데 이를 어쩌나. 이미 걸렸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 비서의 몸이 덜컹거렸다. 눈앞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커헉!”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이 끊어졌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격통이 들이닥쳤다.
“저주란 묻어나는 법이지.”
유일하게 청각만큼은 멀쩡했다. 어둠 속에서 오딘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방금 전, 네가 고리를 이용해서 내 방어벽을 베어 냈을 때, 이미 저주가 그 고리에 묻어 있는 상태였어.”
그리고 저주가 묻어 있는 고리를 김 비서는 양팔에 휘감았다.
“이제부터 네 몸은 천천히 썩어갈 거야.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지?”
오딘이 팔을 뻗었다. 저주의 덩어리들이 김 비서를 향해 기어갔다.
“빨리 일어나. 안 그러면 1초도 안 돼서 뼈까지 썩어버릴 걸?”
오딘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김 비서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 움직이네? 그럼 이대로 죽어야지 뭐.”
저주의 덩어리가 입을 벌려서 김 비서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때였다.
“……아, 너무 놀았나?”
오딘이 뻗었던 손을 확 당겼다. 김 비서를 집어삼키려던 저주들이 기체가 되어 다시 되돌아왔다.
그 직후, 천장이 무너지며 누군가 내려왔다.
“김 비서, 괜찮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김 비서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기다려요. 해주의 물약을 뿌려 줄 테니까요.”
김 비서의 머리 위로 액체가 떨어졌다. 그러자 저주가 사라지며 암전되었던 시아가 밝아졌다.
“궈…… 권미 님.”
김 비서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권미가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요. 이만 물러나세요.”
김 비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저주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 여파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말을 남긴 뒤, 김 비서는 허겁지겁 자리를 떠났다. 권미는 김 비서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지켜봤다.
“거물이 오셨네.”
오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권미의 얼굴이 굳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어이구, 무서워라. 이래서 흑천이랑은 싸우기가 싫단 말이지.”
“오딘. 미쳤나 보군요. 흑천을 건드리다니.”
“미쳐? 제 정신이었던 적도 없었는데?”
오딘이 어깨를 으쓱했다. 권미는 역겹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애들이나 할 법한 병신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시죠.”
“말이 심한데?”
“흑천을 건드리고 내 부하들을 핍박한 죄. 지금 이 자리에서 받아 내야겠습니다.”
“직계이니 만큼 그쪽이 강한 거야 알고 있기는 한데…….”
오딘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쪽은 이래봬도 판데모니엄의 대의원이란 말이지.”
음지에서 활동하는 헌터 중에서도 인정받은 실력자들만이 소속될 수 있다는 판데모니엄.
그 판데모니엄의 악인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의회라 불리는 단체에 가입할 수 있다.
그리고 오딘은 판데모니엄의 의원들 중에서도 단 17명밖에 없다는 대의원이었다.
“권혁이라면 모를까. 그쪽의 실력으로는 날 어쩌기 힘들 걸?”
악명이 하늘을 찌르는 오딘과 달리 권미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권미에 대해서 알려진 정보라고는 흑천의 외교담당이라는 것뿐.
그나마 최근에 남미 지역의 카르텔을 모조리 괴멸시키기는 했지만 보잘것없는 명성일 뿐이었다.
“그래도 싸우겠다면 말리지는 않…….”
별안간 권미가 오딘을 향해 달려들었다.
오딘은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대응했다. 저주의 덩어리에게 즉각 명령을 내렸다.
덩어리들이 바닥에 얇게 퍼지더니 창칼이 되어 솟아났다.
수백 개의 창칼이 권미의 몸을 찢어발기려고 했다.
그때, 권미의 몸이 사라졌다.
“오?”
오딘은 감탄하며 저주의 덩어리를 장벽으로 바꿨다. 그 직후, 권미가 눈앞에 나타났다.
권미는 망설임 없이 장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오딘이 만들어낸 장벽이 산산이 부서졌다.
“……뭐?”
당황한 오딘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권미가 발을 내딛으며 반대쪽 주먹을 휘둘렀다.
오딘은 급한 대로 양팔을 교차했다. 그 위를 권미의 주먹이 강타했다.
쩌적.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팔을 썼음에도 충격을 모두 막아낼 수 없었다. 오딘은 뒤로 멀리 날아갔다.
오딘은 간신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러고 나서야 한쪽 팔뚝이 부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오한이 들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지만 오딘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과 권미의 격차를.
“판데모니엄의 대의원?”
권미가 손목을 매만졌다. 주먹에 저주가 묻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력을 일으켜서 모조리 태워 버렸다.
“쓰레기 산의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게 엄청 자랑스러우신 모양인데.”
권미가 마력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기운이 오딘을 압박했다.
“이번 기회에 격의 차이를 알려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