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56화>
156. 악마 (4)
다행히 권한울은 금방 구출되었다.
흑천의 배로 돌아온 권한울은 우선 목욕을 한 뒤, 하얀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이제야 목욕이 끝난 게냐.”
하얀 가운을 입고 샤워실을 나오자마자 권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권선우는 의자에 앉은 채 우아한 손놀림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서는 주하연이 찻주전자를 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날 기다리게 하다니. 건방지구나.”
“마지막에 절 바다에 내버린 분이 누구신데 그러십니까.”
권한울이 툴툴거리며 권선우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말은 그거뿐이냐?”
권한울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감사하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같은 말을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권한울은 그 말을 꺼내 놓았다. 퍽 만족스러었는지 권선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에서 이곳까지 화신체로 날아오신 겁니까?”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악마의 왕을 상대로 여유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지.”
메이 가문 때도 그랬지만 권선우의 화신체는 놀랍도록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용의 화신체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드디어 까다로운 질문이 나왔다. 권한울은 미리 생각해돈 말을 꺼냈다.
“악마의 왕을 만났습니다.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천공투기장에 숨어 있었다 하더군요.”
“던전에 숨어드는 건 악마의 특기지. 그거 뿐이었더냐?”
“원래 동족들이 자신을 데리러올 때까지 잠들어 있을 생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제 진혈에 반응해서 깨어났고요.”
“……진혈에 반응했다고?”
“예, 과거 인류와 전쟁을 벌일 때, 흑룡혈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서 확인 차 눈을 떴다더군요.”
이 대목에서 권한울은 권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의 거짓말이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진혈의 존재가 악마까지 자극할 줄은 몰랐군.”
다행히 권선우는 별 의심없이 넘어갔다. 권한울은 속으로 안도했다. 이래서 거짓말을 할 때는 진실을 섞어야 한다는 격언이 있는 듯했다.
“그럼 어째서 악마왕이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사라진 것이냐.”
“오랜 세월 동안 동족이 찾아오지 않았다면서 패배를 인정하고 사라졌습니다. 제게 인류가 승리했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겨우 그런 이유로 악마왕이 삶을 포기했다고?”
권선우의 목소리에 의심이 담겼다.
사실 권한울이 소유한 방주를 보고 의지가 꺾인 것이지만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으니 아무도 죽지 않은 게 아니겠습니까.”
권한울은 되레 당당하게 행동했다. 피해가 없다는 걸 증거 삼아서 말이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군.”
권선우는 빈 찻잔을 주하연에게 내밀었다. 주하연은 주전자를 기울여 천천히 차를 따랐다.
“그나저나 바벨의 여식과는 왜 그렇게 꼭 껴안고 있었던 게냐?”
그 순간, 찻잔을 들고 있던 주하연의 몸이 움찔 떨렸다. 권한울은 그것도 모른 채 권선우에게 말했다.
“그 높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협력을 좀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남녀가 서로 부둥켜 안는단 말이냐? 요즘 젊은 것들의 머릿속은 모르겠군.”
“저희가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아시면 그런 말씀 못하실 겁니다.”
“정말 다른 뜻은 없으렷다?”
“없어요.”
“혹시 몰라서 말해두지만 바벨 가문은 안 된다. 그놈들하고 우리 흑천은 대대로 원수지간이었어.”
“아, 정말이라니까요.”
결국 권한울은 신경질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하연이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회장님, 권한울 님께서는 여자에게 함부로 마음을 주는 헤프신 분이 아닙니다.”
주하연이 편을 들어주자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고맙다고 말하려는데. 주하연이 권한울을 홱 돌아봤다.
“그렇죠?”
주하연이 다시 웃으며 물었다. 묘한 압박감에 권한울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하니 이 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마.”
권선우조차 주하연의 기세에 눌려서 한발 물러났을 정도였다.
더 이상 주하연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권한울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회장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게 됐군요.”
권한울의 말에 권선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천공투기장에서 우승해서 흑천의 이름을 빛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근데 악마의 왕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으니…… 결과적으로 약속을 못지키게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 그거 말이냐.”
권선우가 주하연에게 손짓을 했다. 주하연은 태블릿피씨를 내밀었다.
“네 눈으로 직접 봐라.”
권한울은 주하연이 내민 태블릿피씨를 쳐다봤다.
포털사이트의 메인에 권한울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드래곤슬레이어의 제자! 흑천의 진혈에게 밀리다!
-용살자를 죽이는 용의 등장?
-천공투기장의 미로를 일격에 뚫어 버린 스킬을 전격 분석!
모든 인터넷 기사 역시 권한울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네 말대로 천공투기장은 파괴가 되었다. 그러니 우승할 방법은 없지.”
권선우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네가 보여 준 모습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권선우가 기사 중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특히 이 대목이 마음에 들더군. 용살자를 죽이는 용의 등장. 드래곤슬레이어 그 애송이의 눈이 뒤집혔을 거야.”
권선우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정도로 기쁜 모양이었다.
“너는 내 명령을 지켰다. 그러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환골탈태 시술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약속하마. 더불어 비고의 자유로운 이용도 허락하도록 하겠다.”
권한울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목표를 이루엇다고 자만하지 마라.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현재 권한울은 전 세계의 헌터에게 이름이 알려졌을 만큼 강한 헌터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봤을 때, 권한울은 겨우 세 개의 능력만 S급일 뿐이다.
세계 랭커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한참 부족한 수준이었다.
“어차피 비고를 이용하면 금방 강해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겠지.”
“어느 정도라니요?”
불길한 말에 권한울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흑천의 비고에는 S급 영약은 재고가 남아 있지만 SS급 영약은 그렇지 않다.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지.”
“예?”
권한울이 놀라서 소리치자 권선우가 인상을 썼다.
“예는 뭔 예냐. 그럼 너는 SS급 영약이 그렇게 흔한 건줄 알았더냐? 몇 년에 한 번 매물이 나올까 말까한 게 SS급 영약이다.”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은 아니었다. 권한울이 S급 능력치를 올리는 것도 그 고생을 했는데. SS급 영약은 그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자면 S급 영약은 남아 있으니 모든 능력치를 S급까지 상승시키는 건 금방이다.
여기에 권한울이 보유하고 있는 초인혈, 용심혈을 강화시키면 능력치를 SS급까지 상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알아들었으면 됐다. 그럼 나는 이만 안쪽에서 쉬고 있으마.”
권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하연이 그 뒤를 따랐다.
“천공투기장이 끝나면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해 준다고 하셨죠.”
그때, 권한울이 물었다. 약속은 했지만 한 번 더 확답을 받고 싶었다.
권선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권한울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래, 조만간 모든 것을 말해 주마.”
그리 말하며 권선우는 방을 나갔다.
* * *
권선우가 나간 뒤, 권한울도 갑판 위로 올라갔다.
상황을 또 설명해야할 사람들이 갑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울아!”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팀원들이 권한울을 반겼다. 권후돈이 가장 먼저 달려와서 물었다.
“하, 할아버지…… 아니, 회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어? 벼, 별 말씀 없으셨지?”
“그래, 별 말 없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냥 악마에 대한 걸 물어보시더라고.”
“그, 그랬구나.”
권후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잘못한 일이 없음에도 권후돈은 권선우를 어려워했다. 권후돈이 특이한 게 아니라 대다수의 혈족들은 이렇게 행동했다.
“저희한테도 설명해 주세요. 대체 천공투기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메이홍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권후돈과 가엘 가르시안도 관심을 가졌다. 모두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별 거 없었어요.”
권한울은 권선우에게 했던 말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이야기했다.
“악마의 왕씩이나 되는 존재가 그렇게 대장님한테 우호적으로 나왔다고요?”
“악마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권한울은 자신도 모르겠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회장님 몸 상태는 어떠셔? 여의주를 사용하셨는데. 많이 지치셨을 거 아니야.”
“여의주라니?”
“한울이 너랑 천공투기장을 통째로 허공에 띄운…… 아, 한울이 너는 모르겠구나.”
권후돈은 메이홍과 가엘 가르시안을 힐끔 처다봤다.
“뭐예요.”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아니, 그게…… 이건 외부에는 비밀이라…….”
메이홍이 쌍심지를 켰다. 자신을 못 믿냐는 눈빛에 권후돈은 꼬리를 말았다 .
“엄마가 비밀이랬는데…… 여의주는 흑룡혈의 마지막 권능이야. 더 정확히 말하면 여의주를 생성하는 권능이라고 들었어.”
권후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여의주를 사용하면 진짜 용처럼 천지조화를 일으킬 수 있대. 여의주의 힘은 생성한 이후에 공을 들이는 만큼 강해지고.”
권한울은 이전에 권찬성과 싸웠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권찬성은 여의주를 이용해서 환상에서 벗어나거나 담천조룡을 막아 냈다.
“회장님께서는 너랑 다른 사람들을 구하시느라 여의주의 힘을 광범위하게 발휘하셨잖아. 아마 엄청 지치셨을 거야.”
그래서 용무가 끝나자마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움직인 모양이다.
“여의주에 대해서 더 아는 거 없어?”
“더 이상은 몰라. 애초에 여의주는 습득한 사람도 많지 않고 비밀도 많거든.”
권후돈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맞다. 우리 시조님께서는 흑룡을 죽여서 진혈을 얻으셨잖아. 그때 흑룡에게서 얻은 여의주가 가문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어.”
“흑룡의 여의주가?”
흘려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겨우 인간, 그나마도 진혈이 아닌 순혈이 만들어낸 여의주만으로도 광범위함 열풍을 불러왔다.
그렇다면 진짜 용의 여의주는 그보다 훨씬 대단한 힘을 발휘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아, 대장님.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여의주에 대해서 좀 더 물어보려던 찰나, 가엘 가르시안이 품에서 편지를 내밀었다.
“아까 회장님과 대화를 나누실 때, 바벨 가문의 사람이 주고 갔습니다.”
권한울은 편지를 뜯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는 초대장이 담겨 있었다.
날짜는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든지 원할 때 오면 된다. 이 초대장을 들고 바벨 가문을 방문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시켜 주겠다.
“흠.”
사샤 바벨이 이 초대장을 건넨 이유야 뻔했다. 알리아 다피를 치료해 달라는 것일 터.
“마냥 무시하기도 곤란한데…….”
하늘에서 추락할 때, 사샤 바벨에게 도움을 받았다. 은혜를 입었으니 갚는 게 도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알리아 다피를 치료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력을 되찾으면 흑천에 어떤 위협이 될지 모르니까.
권한울은 편지를 접어서 품에 집어넣었다. 일단 보류할 생각이었다.
“맞다. 모두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요.”
세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권한울은 세 명에게 말했다.
“앞으로 비고의 자유로운 이용을 허가받았어요. 이제 모두의 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을 겁니다.”
비록 SS급 영약은 없지만 S급 영약은 재고가 남아 있다.
팀원 모두가 S급 능력을 갖출 기회였다. 여기에 더불어 비고의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다면 팀의 수준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기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권한울이 세 사람에게 물었다. 권후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맙지만…… 나는 비고를 이용할 자격이 없는 거 같아.”
“저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권한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한울이 너한테 도움만 받았어.”
메이홍과 가엘 가르시안은 조용했지만 이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이번에도 비고의 이용을 허락 받은 건 한울이 네 공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다들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네요. 그런 걱정을 할 바에는 빨리 강해져서 저한테 도움이 될 생각이나 하는 게 백배 낫죠.”
그 말에도 세 사람의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권한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흑천 일가에서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하연 씨랑 여기 세 사람뿐이에요.”
흑천 일가에 처음 들어온 이후, 권한울의 편은 주하연 한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회장의 측근이라 마음을 터놓기 힘들었다.
하지만 흑암대는 달랐다. 비록 세 사람 뿐이지만 모든 구성원이 오롯이 권한울의 편이었다.
“세 사람이 강해져야 제가 안심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런 말은…….”
권한울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권후돈이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날 믿어준다니…… 하, 한울아!”
권후돈이 울면서 달려들었다. 권한울은 슬쩍 옆으로 피했다.
그때였다.
“팀의 결속이 끈끈한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한울은 반사적으로 난간을 쳐다봤다.
낯선 여성이 난간 위에 앉은 채 권한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서 젊음이 좋아요. 불처럼 뜨겁고, 꿀처럼 달콤하고,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잖아요.”
“……누구십니까.”
“혈화검이라고 말하면 알려나요?”
그 말에 권한울은 무수히 많은 정보를 떠올렸다.
혈화검, 암살검대의 대주, 메이 가문의 잔당들을 이끌고 있는 수장, 더불어 메이홍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 그 이름은…….
“……메이샤오.”
그 말에 여인이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