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55화>
155. 악마 (3)
권한울은 베르엘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동안 응시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권한울은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봤다. 사샤 바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샤 바벨을 본 순간, 권한울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있었으니 권한울과 베르엘의 대화를 모두 들었을 것이다.
“그게 말이죠…….”
권한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베르엘과의 대화가 조금이라도 외부에 유출되면 큰일이다. 하지만 얼버무릴 만한 변명거리가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다.
“……당신이랑 악마랑 서로 아무 말도하지 않고 노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악마가 사라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사샤 바벨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와 악마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못들은 겁니까?”
“대화라고요? 그냥 서로 노려보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권한울과 사샤 바벨은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혹시 날 속이려는 건가?’
권한울이 사샤 바벨의 얼굴을 살필 때였다.
-애먼 사람을 의심하면 어떻게 해.
그때, 귓가에 베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한울은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다.
“베르엘? 살아 있었던 건가?”
-아, 그건 아니야. 육체는 이미 소멸했는데. 영혼은 아직 소멸 중이라 그래.
즉,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권한울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네고 있는 셈이었다.
-쟤를 포함해서 천공투기장에 있는 인간들은 전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거야.
“그게 정말인가?”
-나는 사생활을 중시하는 악마라 미리 권능을 사용해뒀지. 아, 근데 지금은 아니니까 말조심해.
그 말에 권한울은 사샤 바벨을 돌아봤다. 사샤 바벨은 웬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미친 사람 취급받기 전에 권한울은 머릿속으로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는 말이 사실이겠지?’
-당연히 사실이고말고. 너 나 못 믿어?
악마를 어떻게 믿겠냐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꾹 참았다.
-원래 이대로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영 심심해서 말이야. 덤으로 좀 궁금했거든.
‘뭐가 궁금하다는 거냐.’
-슬슬 느낌이 올 때가 됐을 텐데.
느낌?
권한울이 의문을 가진 그때였다.
“크윽!”
별안간 전신이 뜨거워졌다. 몸속에 불에 녹인 쇳물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커억!”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다. 권한울은 바닥에 허물어지듯이 쓰러졌다.
“가, 갑자기 왜 이래요!”
사샤 바벨이 깜짝 놀라서 권한울에게 달려왔다.
‘날…… 속였구나.’
-진짜 너무하네. 내가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내 밑천까지 탈탈 털어서 줬는데. 날 의심해?
베르엘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반마혈을 받아들임으로서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야.
‘다른 혈통을 얻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
-반마혈은 다른 혈통들과는 달라. 신격의 반쪽이지. 그런 것을 인간이 손에 넣었는데. 이상반응이 없기를 바라는 건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아?
베르엘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생각해. 이미 한 번 적응했으니 다른 반쪽을 얻을 때는 별 문제없이 넘어갈 거야. 물론 얻을 기회가 올까 싶지만.
반쪽이 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반마혈의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슬슬 적응이 끝날 때가 되었군.
베르엘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빠르게 통증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통증만 줄어들었을 뿐, 신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체력도, 마력도 전부 바닥이 나 있었다.
-완전히 적응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다. 그때까지는 아무 것도 못할 걸.
‘……이걸 알려 주려고 내게 말을 걸었던 건가?’
-그래, 친절하게 설명해 주니 고맙지?
권한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면서 악마에게 감사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아, 근데 이대로 끝내려니 또 심심하네.
불쑥 베르엘이 말했다.
권한울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냥 조용히 소멸되지 그래.’
-그러면 재미가 없다니까.
‘어차피 남은 힘도 없을 거 아니냐.’
-아주 쬐끔 남아 있어.
‘내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권한울이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이게 왜 해를 입히는 거야? 그냥 약간 장난을 치는 건데.
‘그게 뭔 개소리…….’
-그럼 알아서 잘 살아 봐.
권한울은 베르엘의 마력이 확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직후, 천공투기장이 흔들렸다.
엄청난 압력이 권한울을 짓눌렀다. 권한울 뿐만이 아니었다. 사샤 바벨 역시 압력 때문에 땅에 엎드렸다.
“이, 이건 또 무슨 일이래요!”
사샤 바벨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권한울은 최대한 냉정함을 유지한 채 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천공투기장의 밖에 보이는 하늘이 움직이고 있다. 엄청난 속도로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공투기장이 치솟고 있는 거야.”
천공투기장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압력이 두 사람을 짓누른 것이다.
압력의 강도, 그리고 풍경의 움직임으로 보아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꺄악!”
사샤 바벨이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땅이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땅뿐만이 아니었다. 천공투기장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나고, 부서지고 있었다. 천공투기장은 망가지면서도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이윽고 천공투기장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순간, 상승이 멈췄다.
마치 중력을 잃은 것처럼 천공투기장의 잔해들이 부유했다. 그 속에는 권한울도 있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도중, 권한울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다와 대륙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권한울은 경치를 즐길 수 없었다.
“……그 악마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대륙이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높이 올라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원래 물체란 올라갔으면 떨어지기 마련.
“이런 젠장!”
부유감이 사라지더니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권한울 뿐만이 아니라 천공투기장의 사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으아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사람 살려!”
잔해들 사이로 다른 참가자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다들 듣기 안쓰러울 정도로 처절했다.
하지만 권한울은 그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목숨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미치겠네!”
반마혈을 받아들인 여파로 체력과 마력이 모두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 상태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봐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위로 올리자 사샤 바벨이 보였다.
“내 손을 잡아요!”
사샤 바벨이 손을 내밀었다. 권한울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샤 바벨은 권한울의 팔을 잡아당겨서 끌어안았다. 그런 뒤, 마력을 일으켰다.
“에 아데 라!”
사샤 바벨이 용언을 입에 담았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힘이 두 사람을 붙잡으려 했다.
떨어지는 속도가 조금 줄어드는가 싶더나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 왔다. 그럼에도 사샤 바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용언을 발현했다.
“에 아데 라!”
이번에도 낙하 속도가 조금 줄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샤 바벨의 얼굴이 절망감이 떠올랐다.
“에 아데 라!”
이제 바다와 충돌하기까지 남은 높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땅이 아니라 바다였으나 이 정도로 높이에서 떨어지면 별 차이가 없었다.
“사샤 바벨.”
이제 다 끝났다. 권한울은 사샤 바벨을 향해 말했다.
“고마웠어요.”
바다가 갑자기 확 가까워졌다. 권한울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열풍이 느껴졌다.
뜨거운 바람이 밑에서 위로 솟구쳐 올라왔다. 열풍은 권한울과 사샤 바벨을 밀어 올렸다. 떨어지는 속도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마치 민들레 홀씨가 떨어지듯이 두 사람은 천천히 바다를 향해 낙하했다.
둘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천공투기장의 잔해들도 모두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현상이지……?”
권한울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무언가가 눈앞을 휙 지나갔다.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검은 비늘에 햇빛이 반사되었다.
“설마?”
눈으로 직접 보고도 권한울은 부정했다. 그 사람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계속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가주님?”
거대한 흑룡이 잔해 사이를 마구 날아다니고 있었다.
난데없이 등장한 권선우의 화신체에 권한울은 할말을 잃었다.
-용케 살아 있었구나.
머릿속에서 권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한울은 떨리는 눈동자로 권선우를 뒤쫓았다.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악마의 왕이 나타난 것을 보고 왔다. 반드시 척살해야할 존재니 말이다.
권선우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막상 와보니 악마의 왕은 없고 너희들은 저 위에서 떨어지고 있더구나. 이대로 내버려두면 죽을 것 같아서 내가 나섰다.
갑자기 불어온 열풍.
그건 권선우가 일으킨 현상이었다.
덕분에 권한울을 비롯한 다른 참가자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나저나 바벨의 여식과 제법 친해진 모양이구나.
그제야 권한울과 사샤 바벨은 자신이 아직도 사샤 바벨을 꼭 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졌다. 사샤 바벨은 새빨개진 얼굴로 권선우에게 말했다.
“흑천의 주인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으니 대비나 해라.
“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열풍이 사라졌다. 그러자 다시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권한울과 사샤 바벨은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서 다른 참가자들과 천공투기장의 잔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 * *
“워우.”
드래곤슬레이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늘을 부유하고 있는 흑룡을 보고 있었다.
“저게 권선우의 화신체로군. 직접 보니까 정말 대단한데.”
드래곤슬레이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 용이나 드래곤을 잡은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눈앞에 권선우의 화신체에 더욱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로군.”
드래곤슬레이어는 화신체로 변한 권선우와 자신의 격차를 가늠해봤다. 지금의 자신으로는 권선우를 이길 수 없었다.
적룡성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지면 모를까.
“이봐, 내 제자는 어떻게 됐는지 좀 알아봐 줘.”
드래곤슬레이어가 아제트 헤르메스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제트 헤르메스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서 있었다.
“이봐?”
재차 묻고 나서야 아제트 헤르메스는 정신을 차렸다.
“아아…… 미안하군. 너무 감격스러운 순간이라…… 정신을 놓고 말았어. 자네의 제자 말이지?”
아제트 헤르메스가 아공간에서 나침반처럼 생긴 유물을 꺼냈다. 유물을 조작하다 말했다.
“적룡성의 기운이 끊겼군. 죽은 모양이야.”
“……뭐? 죽었다고? 그게 정말이야? 거짓말 하는 거 아니지?”
“사실이라니. 마노 스톤라이트는 죽었어.”
아제트 헤르메스는 유물을 아공간에 넣으며 말했다.
“자네와 더불어서 유이하게 적룡성이 발현된 실험체였는데. 아쉽게 되었군.”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 녀석이 있어야 내 적룡성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며!”
드래곤슬레이어가 화를 내며 말했다. 아제트 헤르메스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마노 스톤라이트의 적룡성을 흡수하지 못했으니 방법이 없네.”
“이런 씨발!”
드래곤슬레이어가 요트의 난간을 걷어찼다. 난간이 뜯겨나가며 저 멀리 날아갔다.
“내가 마노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면서 키웠는데! 권한울 그 개새기 때문에!”
“진정하게. 마노 스톤라이트의 데이터 덕분에 실험의 성공확률이 대폭 증가했다네. 지금 이온에서 새로운 실험체들을 준비 중이니 그들을 흡수하면 되지 않겠나.”
드래곤슬레이어 좀처럼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보게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리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권한울을 공격해서는 안 되네.”
“뭐? 그릇이 필요하다면서? 그럼 내가 죽여서 가져오면 될 거 아니야!”
“그릇은 아주 섬세한 물건이야.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네.”
아제트 헤르메스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그러니 절대로 건드리지 마. 간신히 그릇의 위치를 찾아냈다. 방해는 용납하지 않겠어.”
드래곤슬레이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체 그릇이 뭐길래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정말 대단한 물건이지. 그릇을 아주 조금 이해한 것만으로 만들어낸 게 바로 적룡성이니 말이야.”
드래곤슬레이어는 또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흑천, 그 멍청한 놈들은 그릇을 훔쳐가 놓고서도 그게 뭔지 몰랐지. 덕분에 우리에게 또 이런 기회가 오는 구나.”
아제트 헤르메스는 간헐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도 기쁨을 다 표현하지 못할 수 없었는지. 손가락으로 얼굴 가죽을 마구 쥐어뜯었다.
“그렇게 귀했으면 잘 간수했어야지. 어쩌다 흑천에 뺏긴 거야.”
“가슴 아픈 질문을 하는군. 정말이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네. 설마 그릇을 보관하는 노예를 운반하다가 흑천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거든.”
언제 웃었냐는 듯이 아제트 헤르메스가 인상을 팍 썼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는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그 개새끼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다니.”
“개새끼? 누구를 말하는 거야?”
아제트 헤르메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런 놈이 있다네. 권선우의 자식 중 한 명이었던 놈인데. 이름이…….”
아제트 헤르메스가 고민하다 말했다.
“권천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