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52화>
152. 천공투기장 (4)
마노 스톤라이트가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그녀가 이온을 통해 습득한 기프트 적룡성(敵龍星)은 모든 용종 몬스터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강력한 기프트다.
그런데 권한울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적룡성에 의해서 약해지키는커녕 오히려 더욱 거칠게 날뛰고 있지 않은가.
순간, 마노 스톤라이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로 진혈이었던 거야?”
권한울은 천공투기장에 들어오기 전, 본인이 진혈임을 밝혔다.
흑룡혈의 시작이자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혈이라면 적룡성에게 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승님한테는…… 당했잖아?”
파티장에서 드래곤슬레이어는 적룡성을 사용해서 권한울을 압도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못한단 말인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그 질문에 권한울은 귀찮아는 듯이 대답했다.
“댁은 드래곤슬레이어가 아니라고.”
권한울과 드래곤슬레이어에는 절대적인 격차가 있다.
굳이 흑룡혈과 적룡성을 생각하지 않아도 순수하게 기량만으로 압도를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진(眞) 흑룡혈이 적룡성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나저나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 줘야 하는 거지?”
마노 스톤라이트는 이를 악물었다. 아공간을 열어서 단검을 한 자루 더 꺼냈다. 날이 마치 톱날처럼 되어 있는 단검이었다.
“다 이긴 것처럼 굴지 마. 혈족 따위가 말이야.”
마노 스톤라이트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예상외의 사태에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적룡성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효과가 약할 뿐.
즉, 마노 스톤라이트의 우위는 여전하다. 적룡성은 용의 천적이니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좋네. 네가 기고만장해 할수록 부수는 재미가 커지잖아.”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에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적룡성을 일깨웠다.
주홍빛 오러가 양손의 단검에 맺혔다. 단검을 역수로 쥐고 있던 탓에 날도 역으로 돋아났다. 마치 암컷 사마귀를 보는 듯했다.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마노 스톤라이트가 증오심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권한울은 비웃음을 지었다.
“해 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노 스톤라이트가 달려들었다.
* * *
“정말 진혈이었단 말인가?”
천공투기장의 바깥.
이온의 수장 아제트 헤르메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것이 진혈이라면 권한울이 그릇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그럼 어째서 흑천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를 저렇게 함부로…….”
별안간 아제트 헤르메스가 말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실실 웃기 시작했다.
“……모르는 게 분명해. 저 놈이 진혈인 건 알지만 그릇의 존재까지는 모르는 거야. 권한울이라는 놈이 숨긴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흑천이 모를 리가 없지.
흑천이 그릇의 존재를 모른다면 아직 회수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아제트 헤르메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이봐, 그것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게 있잖아.”
드래곤슬레이어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내 제자가 저놈이랑 싸우게 됐는데. 지금부터 어떻게 되는 거야. 적룡성이 그릇에도 통하는 거야?”
“멍청한 질문을 하는군. 자네는 이미 권한울을 한 번 만나보지 않았나.”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드래곤슬레이어는 정신을 차렸다. 맞다. 파티장에서 권한울은 자신의 적룡성에 압도당했었다.
“진혈이라 해도 적룡성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건 우리가 장담하지. 다만…….”
“다만?”
“권한울이 과연 그릇을 얼마나 채웠는지. 저 안에 혈통이 얼마나 많은지가 관건이야. 아직 적룡성은 흑룡혈에만 통하니 말이지.”
“그런 이유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드래곤슬레이어가 노트북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댁 입으로 놈이 그릇을 숨기고 있다면서. 그럼 전 세계가 다 지켜보고 있는데. 다른 혈통을 사용할 리가 없지.”
“허어…… 매번 느끼지만 자네는 그런 쪽으로만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는군.”
욕에 가까운 칭찬에 드래곤슬레이어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어쨌거나 내 제자한테도 승산이 남아 있군. 마노가 잘못해서 저놈을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그릇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나도 확신을 할 수가 없어.”
드래곤슬레이어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아제트 헤르메스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릇이 저 안에 들어가다니…… 그래서 천공투기장의 모습이 바뀌었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 자네는 모르겠군. 원래 천공투기장은 참가자들의 우열을 가리는 시시한 자리가 아니야. 원래 그릇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지.”
“……그게 정말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모르네.”
드래곤슬레이어는 살짝 놀랐다. 무지를 광적으로 싫어하는 이 늙은이의 입에서 벌써 두 번이나 모른다는 말이 나오다니.
“지금부터는 우리 이온도 알지 못하는 분야거든.”
아제트 헤르메스는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천공투기장을 올려다봤다.
* * *
마노 스톤라이트은 권한울을 향해 양손의 칼날을 휘둘렀다.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수십 번의 참격이 허공을 갈랐다. 속도도 속도였지만 모든 공격이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놀랍도록 빠르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은밀하다.
정말 골치아픈 공격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격을 당하는 쪽인 권한울이 아니라 공격을 하는 쪽인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게 진짜!”
권한울은 마노 스톤라이트의 참격을 모조리 피하고 있었다. 그것도 큰 동작을 취하지 않고 종이 한 장 차이로 말이다.
“그만 도망쳐!”
마노 스톤라이트가 참격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이건 절대로 피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러나 권한울은 참격을 휘두르기도 전에 뒤로 물러났다. 마노 스톤라이트의 참격이 아슬아슬하게 권한울의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후우…….”
마노 스톤라이트는 거칠어진 숨을 다듬었다.
이대로 가면 자신만 지친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비웃음과 함께 권한울을 도발했다.
“자꾸 도망만 치는 걸 보니까. 진혈도 적룡성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지?”
마노 스톤라이트가 만들어 낸 주홍빛 오러는 평범한 오러가 아니다. 적룡성의 기운이 듬뿍 담겨 있기에 용종이라면 조금이라도 스치기만 하면 치명상으로 이어진다.
“진혈이라며? 그럼 엄청 강할 거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도망만 다니는 거야? 바보야? 병신이야?”
“둘 다 아닌데.”
“그럼 증명해 보시던지.”
“그럴까?”
권한울이 땅을 박차며 거리를 좁혔다. 마노 스톤라이트의 입가가 비틀렸다.
“역시 병신 맞네.”
마노 스톤라이트는 권한울의 속도에 맞춰서 오러를 휘둘렀다. 주홍빛 칼날이 권한울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때였다.
칼날이 닿는 것보다 먼저 권한울이 마노 스톤라이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마노 스톤라이트의 몸이 휘청였다.
“어?”
그 빈틈을 노리고 권한울이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을 무릎으로 찍었다.
“아악!”
두 번이나 얻어맞은 터라 끔찍하게 아팠다. 그럼에도 마노 스톤라이트는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양손을 어지럽게 움직이며 권한울의 몸을 그으려고 했다.
생체기라도 좋다. 어떻게 해서든 상처만 낸다면 적룡성의 기운이 침투해서 권한울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권한울의 한쪽 발을 들어서 마노 스톤라이트의 두 손을 한 번씩 걷어찼다. 양팔이 벌어지며 몸통이 훤히 드러났다.
“잠깐…….”
권한울은 망설임 없이 마노 스톤라이트의 명치를 걷어찼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위액을 토해 내며 뒤로 물러났다.
끔찍하게 아팠지만 비명을 지를 틈이 없었다. 권한울이 다시 거리를 좁혀 왔기 때문이다.
내딛은 발을 축으로 허리를 튼다. 권한울의 뒷차기가 마노 스톤라이트의 머리를 강타했다. 마노 스톤라이트의 몸이 허공에서 회전하며 날아갔다.
“끄아악!”
그제야 마노 스톤라이트는 비명을 내지를 수 있었다. 가슴과 머리를 움켜잡은 채 권한울은 노려봤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권한울은 그리 말하며 발끝으로 땅을 톡톡 두드렸다. 무척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래서 끝인가?”
그 한 마디가 마노 스톤라이트를 자극했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이를 갈며 일어났다.
“아직 아니지.”
마노 스톤라이트가 분노했다. 적룡성이 주인의 분노에 호응했다.
<적룡성이 가열됩니다!>
<마지막 능력이 해금됩니다.>
적룡성은 용종을 약화시키는 능력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용종을 상대할 때 한정으로 사용자의 능력치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현재의 마노 스톤라이트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담이 커서 봉인해뒀으나.
지금은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적룡성의 기운이 전신으로 뻗어나갑니다!>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마력의 위력이 20% 증폭됩니다!>
적룡성의 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주홍빛 오러가 더욱 진해졌다. 이제는 주홍빛이 아니라 새빨갛게 보였다.
“상당하군.”
이것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는지. 권한울도 마력을 일으켰다.
검은 오러가 권한울의 팔다리를 휘감았다. 그걸 본 순간, 마노 스톤라이트는 생긋 웃었다.
“용투기? 그거 쓰면 오히려 후회할 텐데.”
적룡성은 용종의 모든 능력치를 감소시킨다. 그건 권능도 마찬가지였다.
마노 스톤라이트가 사샤 바벨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용언으로 만든 보호막을 손쉽게 뚫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적룡성 덕분이었다.
흑룡혈의 용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용투기와 적룡성의 오러가 맞붙으면 무조건 용투기가 뚫린다.
“헛소리가 너무 많군.”
“그럼 직접 다물게 하시던가.”
권한울과 마노 스톤라이트가 동시에 땅을 박찼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자신만만했다. 자신에게는 적룡성이 있다. 맞붙는다면 자신이 이길 수밖에 없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권한울의 몸이 기울어지며 오른쪽 어깨가 내려왔다.
왼쪽 발차기.
불 보듯 뻔했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용투기째 권한울의 다리를 잘라 내려 했다.
그때, 섬뜩함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숙이는 것과 동시에 권한울의 다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 있던 벽 전체에 쫙 금이 갔다.
“어어?”
발차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방출된 오러가 놀랍도록 예리했다. 오금이 저려왔다.
“넋을 놓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지?”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코앞에서 권한울이 주먹을 내리치고 있었다.
주먹에 맺힌 용투기가 불길할 정도로 이글거렸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온 힘을 다해서 뒤로 몸을 날렸다.
권한울의 주먹이 땅을 내리쳤다. 검은 오러가 방출되며 땅을 박살 냈다.
그 무식한 위력에 마노 스톤라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권한울의 공격은 이걸로 멈추지 않았다. 양손 가득 용투기를 두른 채로 마노 스톤라이트에게 돌진했다.
“딸꾹.”
그 모습이 어찌나 공포스럽던지 마노 스톤라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자, 잠깐만!”
마노 스톤라이트는 체면도 잊은 채 도망쳤다. 권한울은 그녀를 뒤쫓아서 용투를 마구 휘둘렀다.
권한울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용투기가 지면과 벽을 박살냈다.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했다. 마치 전차가 자신을 뒤쫓으며 쉴 새 없이 포탄을 발사하는 기분이었다.
“멈추라고 했지!”
마노 스톤라이트는 마구잡이식으로 오러를 휘둘렀다. 오러의 참격이 권한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한줄기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권한울의 몸을 휘감았다.
천공비로(天空飛路)
제 2차로 귀몰(鬼沒)
권한울의 몸이 사라졌다. 붉은 참격은 허공을 가르며 사라졌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다. 그때, 그림자가 그녀의 주변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권한울이 보였다. 권한울은 허공에서 떨어지며 손날을 내리쳤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본능적이 이것에 마지막 기회임을 깨달았다.
적룡성은 용의 권능을 약화시킨다. 둘이 충돌하면 반드시 적룡성이 이긴다.
“하앗!”
단검을 바로 잡았다. 오러를 한쪽에 집중시켰다.
오러의 날이 장검처럼 길어졌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망설임없이 권한울을 향해 오러를 휘둘렀다.
검은 오러와 붉은 오러가 서로 부딪혔다. 그 직후, 붉은 오러가 잘려나갔다.
마노 스톤라이트가 반응할 틈도 없이 권한울의 손날이 그녀의 쇄골을 으스러트리고 내부 장기까지 피해를 입혔다.
“커억!”
마노 스톤라이트는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컥, 커억!”
이 일격으로 승패가 결정됐다. 마노 스톤라이트는 신음만 흘릴 뿐, 움직이지 못했다.
“대, 대체 어떻게…….”
마노 스톤라이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요, 용의 권능 따위로 적룡성을…… 이, 이건 말도 아, 안 돼……!”
마노 스톤라이트는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적룡성은 용종에 한해서 무적이라는 그녀의 상식과 자부심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벌써 세 번째 말하는 거 같은데.”
반면 권한울은 마노 스톤라이트를 굴복시키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쪽이 드래곤슬레이어는 아니잖아? 근데 왜 자꾸 건방지게 구는지 모르겠어.”
권한울의 입장에서 이번 천공투기장은 자신이 우승하는 게 당연한 자리였다.
그동안 상대해 온 적들에 비하면 천공투기장의 참가자들은 터무니없이 약했다.
드래곤슬레이어의 제자인 마노 스톤라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분 좋겠어. 시조 이후로 아무도 얻지 못한 진혈을 가지고 있어서.”
어차피 졌기 때문일까. 마노 스톤라이트는 권한울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그 힘을 휘두르면서 얼마나 잘난 척을 했을까! 사실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 진혈이 대단한 건데! 결국 너는 혈통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마노 스톤라이트는 점점 악에 바쳐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난 너한테 진 게 아니야! 네 혈통에 진 거지! 나한테도 혈통이 있었…….”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이 굳었다. 권한울이 한쪽 발을 높게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리가 거의 일(一) 자에 가까울 정도로 반듯하게 세워진 순간, 권한울은 힘껏 다리를 내려찍었다.
일직선으로 떨어진 발꿈치가 마노 스톤라이트의 얼굴을 찍고,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았다.
꿈틀거리는 마노 스톤라이트를 바라보며 권한울이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어디서 자꾸 개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