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42화>
142. 초대장 (2)
“이번 치료법도 실패한 것 같습니다.”
어두운 방안.
한 노인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여전히 마력통로가 닫혀 있는데다 아무리 자극을 줘도 마력이 반응하지 않는군요.”
노인은 그다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중에는 그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헌터들 사이에서는 달랐다. 이 노인을 한 번이라도 보는 게 소원인 헌터들이 대다수였다.
압둘 라사드.
천재혈을 보유하고 있는 라사드 가문에서도 몇 없다는 특급조율사였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치료법은 없는 건가요?”
압둘 라사드와 마주보고 앉아 있던 여인이 물었다. 압둘 라사드는 고개를 저었다.
“있기는 하지만 소용없을 겁니다.”
라사드 가문이 보유한 천재혈은 뇌의 기능을 확장시키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
뇌의 기능이 확장이 되면 일반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라사드 가문은 이 천재혈을 통해서 헌터들의 기술을 다듬어주거나 신체적인 문제점들을 해결해 왔다.
이 여인 역시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압둘 라사드를 초빙했다.
“천재혈을 통해서 병의 원인이라 짐작이 되는 것들을 치료해 봤습니다만…….”
하지만 천재혈로도 이 여인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치료는 고사하고 원인이 무엇인지조차 밝혀내기 힘들었다.
“압둘 님께서도 치료하실 수 없다면…… 제 병이 나을 방법은 없다는 뜻이겠군요.”
“면목 없습니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스럽습니다. 천공투기장이 열리는 날까지 억지를 부렸으니 말입니다.”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압둘 라사드를 달랬다. 그럼에도 압둘 라사드의 얼굴에 떠오른 근심은 여전했다.
이 여인의 신분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실력이 뛰어나고 유명한 헌터였다면 이렇게 걱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인의 이름은 달리아 바벨.
동아시아 최강이라는 흑천 일가 못지않은 위세를 자랑하는 바벨 가문의 여가주였다.
“무슨 걱정을 하시는 알겠습니다.”
달리아 바벨은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바벨 가문은 이 일로 앙심을 품지 않을 겁니다. 라사드 가문의 은혜를 잊지 않고 언젠가 반드시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제야 압둘 라사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였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건가요?”
달리아 바벨의 옆에 있던 소녀가 소리쳤다.
“사샤. 그만하렴.”
“가주님의 목숨이 달린 문제예요! 근데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어요!”
달리아 바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번만 더 고민해 주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압둘 라사드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여인을 돌봤다. 그렇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압둘 님이 안 되면 다른 조율사를 불러 주세요!”
“사샤 님. 라사드 가문에서 저보다 뛰어난 조율사는 없습니다.”
압둘 라사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의 실력을 의심하는 듯한 말을 들었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진혈이신 라사드 가문의 시조님께서 살아 돌아오시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 가주님을 치료할 수 있는 조율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압둘 님!”
소녀가 소리를 질렀다. 그때, 달리아 바벨이 소녀의 손을 붙잡았다.
“사샤. 날 보렴.”
달리아 바벨은 소녀의 팔을 당겨서 얼굴을 낮췄다. 그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더 이상 압둘 님께 무례하게 굴지 마렴.”
“하지만…… 이대로 가주님을…….”
“이렇게 쉽게 흥분하면 널 믿고 있는 내가 뭐가 되니.”
달리아 바벨의 말에 소녀는 울음을 그쳤다. 대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미련이 없단다. 내 뒤를 이을 믿음직스러운 후계자도 준비해 뒀고, 가문의 내부도 말끔하게 정비해 뒀으니까.”
바벨 가문의 여가주.
달리아 바벨은 불치병을 앓고 있다. 마력이 굳어 버리고, 마력통로가 메말라 버리는 이 불치병은 달리아 바벨의 모든 무력을 앗아갔다.
현재의 달리아 바벨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이 무력한 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데. 이제 이 불치병이 생명력까지 갉아먹고 있었다.
“사샤 바벨.”
달리아 바벨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나를 생각한다면 이런 자리에서 억지를 부리지 마렴. 그럴 바에는 어떻게 해야 천공투기장에서 바벨의 이름을 빛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 줬으면 좋겠구나.”
“알겠…… 습니다…….”
사샤 바벨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아 바벨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압둘 님,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네요.”
“추태라뇨. 아닙니다.”
압둘 라사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똑똑
별안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가주님.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달리아 바벨은 사샤 바벨을 품에서 떨어트리며 말했다.
“압둘 님께서도 같이 가시죠.”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이런 늙은이가 가면 흥이 깨질 겁니다.”
압둘 라사드의 농담에 달리아 바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대신 제 손자 놈을 데려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압둘 라사드는 구석에 서 있던 소년을 가리켰다. 이제 막 중학생쯤 되었을까. 무척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할아버지의 치료를 돕기 위해서 줄곧 이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부, 부부, 부탁드리겠습니댜!”
어찌나 긴장했던지 혀까지 깨물고 말았다.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달리아 바벨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샤힌 라사드 님. 같이 가시죠.”
어린 소년, 샤힌 라사드는 감사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자꾸 사샤 바벨을 힐끔거렸다.
달리아 바벨은 둘을 이끌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던 도중, 사샤 바벨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 몸도 안 좋으신데. 굳이 파티에 참가하셔야 하나요?”
이번 파티는 다름 아닌 달리아 바벨의 강력한 희망에 의한 것이었다.
사샤 바벨은 파티에 부정적이었다. 그럴 시간에 가주가 자신의 몸을 돌봤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걱정 마렴. 내게 무슨 일이 생겨도 샤힌 님께서 도와주실 테니까. 그렇죠?”
“네! 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샤힌 라사드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무엇보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재목들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단다. 어쩌면 바벨 가문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니까.”
그 말에 사샤 바벨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달리아 바벨은 이제 곧 죽는다. 그럼에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문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 깊은 뜻을 몰라보다니.
사샤 바벨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아, 그렇지. 파티장에서는 네가 내 언니란다.”
순간, 사샤 바벨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했다.
“샤힌 님도 명심하셔야 해요. 저는 지금부터 사샤의 친한 동생인 알리아 다비에요.”
“예?”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샤힌 라사드도 당황해하고 있었다.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바벨 가주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니? 분위기를 깨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 그렇지만…… 아니, 그래도…… 가주님 얼굴은 다 알 텐데 그런 거짓말이…….”
“그래서 오늘은 화장을 다르게 하고 왔단다. 아무도 몰라볼 걸?”
달리아 바벨. 아니, 알리아 다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사샤 바벨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가주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좀 아닌 것 같…….”
“그럼 문 연다?”
알리아 다비는 망설임 없이 파티장의 문을 열었다.
일순간 음악을 연주하던 악단들이 손을 멈췄다.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집중이 되었다.
-바벨 가문의 사샤 바벨 양과 그 친우이신 알리아 다비 양. 라사드 가문의 샤힌 라사드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사샤 바벨의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알리아 다비가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리아 다비라고 해요!”
* * *
저녁.
권한울은 일행들과 함께 바벨 가문의 선박으로 향했다.
“오…….”
권한울은 슬쩍 감탄했다. 배 위에 오르자마자 곳곳에서 강대한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전부 비슷한 기운인 것으로 보아서 배를 지키는 바벨의 혈족들이 풍기는 기운인 듯했다.
흑천 일가에 맞먹는 곳이라더니 과연 소문에 걸맞았다.
“하연 언니도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메이홍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주하연은 자신은 참가 자격이 없다면서 같이 오지 않았다.
그 결과 권한울과 나머지 세 명만 이곳에 와 있었다.
“근데 대장님. 그 옷은 뭐예요?”
권한울은 평소와 달리 파티에 어울리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챙겨준 옷 중 하나였다.
“이상한가요?”
“아뇨, 괜찮아요. 대장님이 골랐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걸요.”
“꼭 제 패션 센스가 이상하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어? 모르셨어요?”
메이홍은 정말로 몰랐냐는 듯이 되물었다. 그 반응에 권한울은 소소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맨날 하연 언니가 대장님 옷 고른다고 시간을 쓰고 그랬는데요.”
“뭐 하러 그런 쓸데없는 짓을…….”
“나름대로 즐거워하시던데요.”
메이홍과 시시한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배 안에 있는 파티장에 도착했다.
“우와아아…….”
파티장에 들어오자마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권후돈이 낸 소리였다.
“하, 한울아. 저기 봐!”
권후돈이 호들갑을 떨며 한쪽을 가리켰다. 근육질의 사내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블루로즈 길드의 알렝 드 버야! 젊은 나이에 벌써 길드 전용 스킬을 전부 다 익혔대!”
“앗! 코토 히사시다! 일본에서 발생한 몬스터 무리를 혼자서 해결한 걸로 유명해!”
“바바 보아텡……! 아프리카의 수호자!”
권후돈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연신 환호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메이홍이 슬쩍 권한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후돈 오빠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요.”
“같은 생각입니다.”
어지간한 천공투기장 참가자들보다 권후돈이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울아, 네가 보기에는 어때?”
권후돈이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다들 대단하지 않아?”
“대단하네.”
권한울은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다지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말이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대형 길드와 가문을 책임지는 유망주들이다. 그만큼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너무 하찮다.’
권한울이 봤을 때는 아니었다.
‘겨우 이 정도 수준이란 말인가?’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아니면 내가 그만큼 강해진 건가?’
그때, 가엘 가르시안이 권한울에게 말했다.
“대장님,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소란스럽던 파티장이 조용해져 있었다. 음량을 반으로 확 줄인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티장 안의 모든 시선이 권한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권한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이따끔씩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들려왔다.
“적개심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가엘 가르시안이 말꼬리를 흐렸다.
권한울과 일행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분위기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청색 피부를 가진 남성이 권한울이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던 것이다.
“반갑다.”
가까이 다가온 남성은 권한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권한울은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권후돈을 쳐다봤다. 누구인지 말해 달라는 뜻이었다.
“헨리코 빅핸드…… 빅핸드 가문의 소가주야…….”
권후돈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빅핸드 가문이라면 권한울도 알고 있다. 비록 혈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대대로 영국을 수호해 온 명문 가문이었다.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우, 우승후보 중 한 명이야…….”
가문의 내력만큼이나 실력도 대단한 남자였다. 천공투기장의 우승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는 게 그 증거였다.
“부탁이 있다.”
헨리코 빅핸드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얼음이 녹을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부디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권한울은 꿈틀거리는 입가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이 정도로 호의적이지 못한 태도라니.
헨리코 빅핸드의 부탁이 무엇일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서는 곤란하니. 밖으로…….”
“사인을 부탁한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서로 놀랐다.
“사인이라고요?”
“그렇다만…… 나가서 해 줄 생각인가?”
“그게 아니라…….”
권한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투 신청이 아니라 사인이라고?
“내 동생이 그쪽의 팬이라서 말이지…… 남미의 카르텔을 섬멸한 것 때문에 동경하게 됐다더군.”
헨리코 빅핸드가 붉어진 얼굴로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권한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헨리코 빅핸드를 쳐다봤다.
그래도 결국 사인은 해 줬다.
“내 동생이 아주 기뻐하겠어.”
헨리코 빅핸드는 활짝 웃으며 사라졌다. 그가 떠난 직후, 몇 명이 더 다가왔다.
“괜찮으면 나도 부탁을…….”
“저도 좀…….”
권한울은 혼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몇 번 더 사인을 했다.
사인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흡족한 얼굴로 물러났다.
“와…… 대장님이 이렇게 유명인사일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몰랐는데. 한울이의 활약이 여기저기 많이 퍼져서 인기를 끌고 있더라고.”
옆에서 메이홍과 권후돈이 수근거렸다. 가엘 가르시안은 역시 대단하다는 얼굴로 권한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온 거 같은데.”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였다.
-바벨 가문의 사샤 바벨 양과 그 친우이신 알리아 다비 양. 라사드 가문의 샤힌 라사드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집사로 보이는 남성이 큰소리로 외쳤다. 저 멀리 열린 문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그중에서 가장 앞에 있던 여인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알리아 다비라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