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30화>
130. 보이지 않는 틈새 (4)
시몽 블라가가 권한울을 방문한 다음 날.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블라가 가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몸통은 물론 여덟 개의 다리도 경악스러울 정도로 켰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백 미터도 넘게 나아갔다.
이렇게 커다란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어느 한 사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모두에게 익숙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거미의 몸통 위에서 한 중년 여성이 불만을 드러냈다.
블라가 가문의 원로 중 한 명인 코스미나 블라가였다.
“권한울, 권한울, 그놈의 권한울. 카탈리나는 대체 왜 그딴 동양인 남성한테 집착하는 거야?”
코스미나 블라가의 권속은 말없이 그녀의 불평을 듣기만 했다.
경험상, 코스미나 블라가가 화를 낼 때는 맞장구를 치는 것보다 잠자코 들어주는 게 가장 나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혈이라고 해도 그렇지. 그딴 놈 한 명 때문에 원로들이 다 움직여야 되겠어?”
코스미나 블라가의 자존심상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 남자가 가지고 싶으면 살점을 발라내서라도 말을 듣게 하던가 하지. 뭐? 상처를 입히면 안 돼?”
블라가 가문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기만 하지 않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법도 차고 넘쳤다.
특히 코스미나 블라가는 그쪽 방면에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주특기는 이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몬스터를 길들이는 것이었으니까.
“카탈리나 그년도 웃겨. 닳고 닳은 주제에 이제 와서 순진한 처녀처럼 굴다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코스미나 블라가의 물음에 권속은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일개 권속 따위가 원로를, 그것도 카탈리나 블라가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고풍스러운 저택의 앞에서 거미의 걸음이 멈췄다.
“여기구나.”
코스미나 블라가는 저택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좋은 저택을 덜컥 내주다니. 코스미나 블라가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딴 일, 질질 끌 필요 없지.”
코스미나 블라가는 아공간을 열어서 길쭉한 채찍을 꺼내들었다. 보통 채찍이 아니라 가시가 빼곡하게 돋아나 있는 흉악한 놈이었다.
대체 무슨 물건인지. 채찍을 보자마자 거미가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코스미나 님!”
식겁한 것은 권속도 마찬가지였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께서는 절대 손상을 입히지 말라고…….”
“알고 있으니까 비키렴.”
코스미나 블라가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든 지배하기만 하면 입이야 얼마든지 틀어막을 수 있어.”
권속은 입을 쩍 벌렸다. 실로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공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막는 게 급했다. 카탈리나 블라가처럼 밍기적거릴 때가 아니었다.
“들어가자.”
코스미나 블라가가 명령을 내리자 거미가 움직였다. 담을 넘어서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코스미나 블라가의 시선에 누군가 들어왔다.
정원에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코스미나 블라가죠?”
남성이 입을 열었다. 코스미나 블라가는 거미를 세웠다.
“그쪽은 권한울?”
“맞습니다.”
코스미나 블라가가 손짓을 하자 거미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코스미나 블라가는 땅으로 내려왔다.
“시몽이 단단히 손봐 줬다고 하던데. 생각보다 멀쩡하군요. 아니면 멀쩡한 척을 하고 있는 건가요?”
코스미나 블라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몽 블라가는 신사 같은 행동과 달리 사람을 골탕 먹이기를 좋아하는 고약한 늙은이였다.
특히 실력이 뛰어난 헌터들을 약 올리는 것을 좋아했다.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취향이었으니 실력만큼은 코스미나 블라가도 인정할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시몽 블라가가 일을 허투루 처리했을 리가 없다.
“그러게요.”
권한울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코스미나 블라가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됐어요. 지금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코스미나 블라가는 들고 있던 채찍을 풀렀다. 채찍이 땅 위로 늘어졌다.
“난 카탈리나처럼 미적지근하게 나설 생각이 없어요.”
코스미나 블라가가 허공에 채찍질을 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거미가 위협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내가 기대하는 대답은 딱 두 개에요. 살려 달라. 그럼 무엇이든 하겠다. 알겠죠?”
코스미나 블라가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거미의 눈동자도 붉게 변했다.
“얼마든지 대항해도 좋아요. 그래봤자 우리 아가 앞에서는 소용이 없을…….”
“그렇겠죠. 명색에 S급 몬스터가 아닙니까.”
대뜸 권한울이 말꼬리를 잘라냈다.
“S급 몬스터 ‘타클리언’. 블라가 가문이 지배하고 있는 S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몬스터죠?”
권한울은 코스미나 블라가를 가리켰다.
“당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요. 코스미나 블라가. 블라가 가문의 원로들 중에서 카탈리나 블라가와 더불어서 유이하게 S급 몬스터를 지배할 수 있는 원로. 맞죠?”
코스미나 블라가는 권한울의 발언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정도야 블라가 가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이다. 권한울도 누군가에게 들은 거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손에 들고 있는 채찍은 통각을 예민하게 만들어서 더 큰 고통을 안겨 주는 유물이라던데. 사람한테 쓰기에는 너무 무식하지 않아요?”
코스미나 블라가는 인상을 썼다.
유물에 대한 정보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당신은 블라가 가문의 경비를 맡고 있죠.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를 지배해야 가능한 일이라서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 유물의 도움을 받는 중이고.”
그리고 마지막 정보는 원로들밖에 모르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저 타클리언트도 중추신경에다가 쇄기를 박아서 지배력을 유지하는 중이라던데. 그 쇄기만 뽑으면 지배가 풀려서 곤란하다던데.”
코스미나 블라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저건, 저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그 소리를 누구한테 들었죠?”
“시몽 블라가한테 들었죠.”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스미나 블라가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분명히 정원에 있었던 권한울이 타클리언트의 목덜미 위에 서 있었다.
“이게 그 쇄기인 모양이지?”
권한울은 타클리언트의 목덜미에 깊이 꽂혀 있는 길쭉한 막대기를 움켜잡았다.
그 광경에 코스미나 블라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 멍청한 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아무리 블라가 가문이라지만 S급 몬스터를 지배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가문의 인력을 총 동원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권한울이 함부로 쇄기를 건드렸다가 지배가 풀리면 큰일이었다.
“당장 그 손을 떼지 못해!”
“싫다면?”
“아크!”
코스미나 블라가가 권속의 이름을 불렀다. 권속은 망설임 없이 권한울에게 달려들었다.
권한울의 팔을 붙잡고 힘껏 밀어냈다. 권한울은 타클리언트 밖으로 밀려나갔다.
“타클리언트!”
코스미나 블라가가 몬스터에게 명령을 내렸다. 타클리언트가 입을 활짝 벌렸다.
목구멍에서부터 거미줄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방출된 거미줄은 권속을 덮쳤다. 권속은 거미줄에 맞고 날아가서 벽에 찰싹 붙어 버렸다.
“타클리언트!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야! 아크가 아니라 저 놈을…….”
코스미나 블라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타클리언트의 목구멍이 이번에는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뭔…….”
코스미나 블라가는 체면도 잊은 채 옆으로 몸을 굴렀다. 거미줄이 코스미나 블라가가 서 있던 땅을 뒤덮었다.
“타, 타클리언트!”
코스미나 블라가의 눈동자가 다시 붉게 물들었다. 타클리언트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그리 말하며 권한울은 땅에서 일어나 타클리언트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놈의 지배권은 내가 가져왔거든.”
개소리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코스미나 블라가는 믿기 힘든 광경을 봤다.
권한울의 두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권속혈?”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흑천의 혈족이 대체 어떻게 권속혈을?
“흑천의 혈족이 어떻게…… 아니, 대체…… 무슨 수를…….”
“지금 그게 중요한가.”
권한울이 손가락으로 코스미나 블라가를 가리켰다.
“타클리언트. 물어.”
코스미나 블라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사, 살려줘요!”
코스미나 블라가는 황급히 바닥에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었다.
“살고 싶어?”
권한울이 코스미나 블라가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코스미나 블라가는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그리 말하며 권한울은 붉은 반지를 착용했다.
* * *
“오늘도 조용하네.”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블라가 가문의 혈족이 중얼거렸다.
“우리 아들보고 싶다.”
혈족이 음울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소망이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블라가 가문의 본섬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해상에 위치한 경계초소였으니 말이다.
“좋은 혈통을 타고 났으면 이럴 일도 없었을 텐데.”
가장 하위 혈통인 잡혈의 경우에는 이렇듯 경계초소에 배당되는 일이 많았다.
가문을 지키는 몬스터들을 감시할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어느 틈엔가 동료가 옆에 와 있었다. 그와 똑같은 잡혈이었다.
“아들보고 싶어서.”
“좀만 참아. 이틀만 더 기다리면 근무지가 바뀌잖아.”
동료가 맥주캔을 내밀며 말했다. 혈족은 맥주캔을 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걱정이군. 흑천이 전쟁을 선포했다고 하지 않았나.”
“무슨 걱정이야. 블라가 가문의 위치는 아무도 모르는데다 설사 쳐들어온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이놈들이 있잖아.”
그리 말하며 블라가 혈족은 처소의 바로 옆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처 들고 있는 바다뱀을 바라봤다.
무려 다이아 등급의 몬스터로 바다에서는 S급 못지않게 강하다는 몬스터였다.
“이놈이 있는 한 어떤 놈들도 블라가 가문을 침범하지 못할 걸.”
블라가 가문의 주변을 지키는 몬스터는 한 마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수십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넓게 퍼져서 감시하는 중이었다.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도 말이다.
“흑천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블라가 가문을 어쩌지는 못할…….”
그때였다.
두 혈족의 귓가에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소리의 출처를 알아내기 위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순간, 바다뱀과 바다가 통째로 폭발했다.
“으아아악!”
두 혈족은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몬스터는 이미 육편이 되어 버렸다. 고기조각과 핏자국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남성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으엑, 더럽게시리.”
남성은 혓바닥을 쭉 내밀며 말했다.
“모처럼 대단한 임무를 맡게 돼서 좋아했더니. 하필이면 그놈 뒤치다꺼리라니.”
남자는 연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두 블라가 혈족을 향해 물었다.
“너, 너는 누구냐.”
혈족 중 한 명이 간신히 용기를 내서 물었다. 그 말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나?”
그 물음에 남성의 입가가 비틀렸다.
“권지석이라고 한다.”
두 혈족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권지석이라는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권이라는 성씨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흐, 흑천……!”
“잘 알고 있네.”
권지석이 조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흑천이 왔다.”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하늘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헌터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