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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이 깡패임-128화 (128/221)

<혈통이 깡패임 128화>

128. 보이지 않는 틈새 (2)

흑천과 맞서겠다.

카탈리나 블라가의 선언에 원로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원로의 머릿속에는 당혹감과는 별개로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권한울에게 집착하는가.

블라가 가문의 혈족은 원래 소유욕이 강하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그중에서도 한층 더 심하고.

하지만 그녀는 정도를 아는 인물이었다. 겨우 남자 한 명 때문에 흑천과 전쟁도 불사할 인간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흑천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모든 원로들의 시선이 시몽 블라가에게 향했다.

지금 여기서 카탈리나 블라가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시몽 블라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카탈리나 님.”

시몽은 원로들의 기대를 일찌감치 눈치 채고 있었다.

“저 역시 블라가 가문의 혈족이기에 한 번 손에 들어온 보물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시몽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블라가 가문이 흑천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본래 블라가 가문은 전투에 능한 가문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보를 통해서 지위를 유지해 온 가문일 뿐.

“블라가 가문이 쌓아놓은 인맥을 모두 동원하면 맞수를 이루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미 말했을 텐데요. 저는 권한울을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요.”

“제게 전쟁도 막고 권한울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카탈리나 블라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게 가능하다고요?”

“카탈리나 님, 잊으신 모양이군요.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 왔는지.”

블라가 가문.

권속혈을 이용해서 사람을, 짐승을, 몬스터를 현혹시키며 살아온 가문.

“권한울을 지배한 뒤, 흑천에 돌려보내는 겁니다. 권선우를 설득해서 전쟁을 멈추게 만들고 이후, 기회를 봐서 복귀명령을 내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카탈리나 블라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가능하면 제가 왜 가만히 있었겠어요. 권한울은…….”

“알고 있습니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유혹이 먹히지 않는다지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살짝 혀를 찼다. 권한울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척 수치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카탈리나 님의 유혹은 먹히지 않았을 지라도 저희들은 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시몽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자.

“제 ‘굴욕’이라던지. 다른 원로들의 ‘고통’과 ‘착각’을 사용하면 권한울의 정신력을 꺾고 지배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몽은 말을 덧붙였다.

“설사 지배하지는 못하더라도 정신을 뒤흔들어 놓을 수는 있겠죠. 그럼 카탈리나 님께서 권한울을 지배하기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카탈리나 블라가는 말을 하지 않았다. 권한울에 대해서 다른 원로들이 개입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좋아요.”

하지만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 * *

“그만.”

레빗에게 이끌려 온 뒤, 1850년대 발생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군대와 토끼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에 대한 전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듣던 중, 트로이가 소리쳤다.

“나는 인간과 토끼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딴 헛소리를 들으러 온 게 아니다.”

“이제부터가 재미있는 부분인데…….”

시무룩해진 레빗을 뒤로 한 채 트로이는 다시 권한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카탈리나 블라가의 명령을 보다 확실하게 완수하기 위해서 권한울의 방문 앞에서 감시할 생각이었다.

“정말 안 들어도 되겠어요? 물량을 앞세운 토끼들이 어째서 도망치지 않고 현대 병기에 맞섰는지?”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트로이는 끝없이 달라붙는 레빗을 몇 번이고 밀쳐내며 권한울의 방에 도착했다.

문 옆에 자리를 잡고 감시를 시작하려던 찰나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응?”

문을 연 사람은 권한울이었다. 권한울은 트로이를 보더니 놀라서 말했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널 감시하겠다고.”

권한울은 께름칙 하다는 표정을 지엇다.

“난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을 해라.”

“어떻게 신경을 안 씁니까. 내가 뭘하든 쫓아올 생각이라면서요.”

“그렇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네가 적응하도록 해라.”

실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었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권한울은 걸음을 옮겼다. 트로이는 권한울에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산책이나 하려고요.”

트로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뜬금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한울은 정말로 저택 주변을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따금씩 정원을 둘러보기도 했다.

트로이는 말없이 권한울의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뒷골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트로이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트로이는 뒷목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권한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권한울이 트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뒷목을 매만졌다.

불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트로이는 계속 권한울의 뒤를 따라갔다.

권한울은 정원을 지나서 저택의 뒷편으로 향했다.

* * *

“예리한데?”

트로이가 떠난 뒤,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권한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명에 저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환명을 거는 순간, 권한울은 몸을 숨겼다. 지금 트로이가 보고 있는 권한울은 환각이었다.

“윽.”

두 눈동자에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권한울은 두 손으로 눈동자를 어루만졌다.

“오래 사용할 능력은 아니군.”

권한울이 자신보다 한참 실력이 뛰어난 카발리에르 움브라에게 환상을 걸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천재혈 덕분에 정신방벽이 약한 부분을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천재혈은 본래 뇌의 영역을 확장시켜주는 혈통.

권속혈과 결합이 됨으로서 타인의 정신력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권속혈의 권능을 사용하기 한층 용이하게 됐으나 뇌에 가해지는 부담도 커졌다.

“이제 움직여야겠어.”

환명의 지속시간은 길지만 트로이를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트로이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기 전에 빨리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권한울은 정원을 떠나서 블라가 가문의 부지를 돌아다녔다.

만일을 대비하여 마주치는 사람마다 환명을 걸어서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어디 보자, 화물선이 정박하는 곳이…….”

권한울은 부지를 돌아다니며 지도로만 익혔던 지리와 구조를 다시 확인했다. 저택에서 화물선까지 가는 최단 거리를 확인했다.

그 뒤로도 권한울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블라가 가문을 살펴봤다.

그러다 외곽에 도착했을 때였다.

권한울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한참 떨어진 곳에 지어진 성당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운을 내뿜는 대상은 한 명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섞여 있었다. 그 중에는 카탈리나 블라가도 섞여 있었다.

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대상에게는 환명이 통하지 않는다.

당장 도망쳐야 했으나 반대로 호기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결국 권한울은 나무 뒤에 숨어서 성당을 살펴봤다.

살펴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당의 문이 열렸다. 안에서 몇몇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럼 첫 번째는 시몽이 나서는 건가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가장 먼저 보였다. 이윽고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예, 제가 먼저 권한울을 굴복시키겠습니다.”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만약 몸이 크게 상한다면…….”

“조심하도록 하죠.”

그리 말하며 시몽이라 불린 남자는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권한울이 묶고 있는 저택이 있는 방향이었다.

권한울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걸음을 재촉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트로이는 아직도 권한울의 환각을 따라서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트로이가 따라다니는 가짜 권한울과 자리를 바꿔치기했다. 그런 뒤, 자신의 방에 들어가서 기다렸다.

방에서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손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권한울은 시종과 함께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카탈리나 블라가와 대화하고 있었던 그 중년의 남성이 권한울을 기다리고 있었따.

“본인의 이름은 시몽 블라가라고 한다. 블라가 가문의 원로지.”

권한울은 눈앞에 있는 중년의 남성을 살펴봤다.

한올한올 다듬어진 콧수염과 멋진 중절모가 인사적이었다.

그야말로 신사라는 단어를 형상화 시킨듯한 남성이었다.

“제 이름은 권한울입니다.”

“이미 알고 왔다네. 흑천 일가의 진혈이라지.”

시몽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권한울을 살펴봤다. 이윽고 그에게 말했다.

“본인은 너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왔노라.”

권한울은 시몽 블라가의 선언을 듣고도 딱히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카탈리나 블라가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데 다른 원로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본인이 자네를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속이 뜨끔했다. 권한울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카탈리나 님도 자네를 어쩌지 못했으니 그 정도 자신감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때, 시몽의 눈웃음을 지었다. 무척이나 불길해보였다.

“사람의 정신력이란 참으로 오묘해서 바위처럼 단단한 면이 있는가 하면 물처럼 한없이 나약한 부분도 있는 법이지.”

비록 카탈리나 블라가의 방식은 먹히지 않았으나 자신은 다를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와 내기할 생각 없나?”

내기라는 말에 권한울이 반응했다. 이 세상에서 권한울 만큼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무슨 내기입니까?”

“자네의 주특기는 권법이지?”

“그렇습니다만.”

“나와 권법으로 대결을 하는 걸세.”

권한울은 인상을 썼다.

시몽 블라가의 두 손은 생전 물 한 번 묻혀 본 적 없는 것처럼 매끄럽고 깨끗했다.

도무지 권사의 손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권법으로 대결을 하자고?

“내 몸에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자네의 승리일세. 어떤가?”

심지어 승리 조건이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것이라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른 내기로 바꾸시죠.”

“자신 없나?”

도발적인 말에 권한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흑천은 권사의 가문이라 들었거늘.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보군. 겁쟁이의 가문이었어.”

“말조심하시지요.”

권한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 역시 흑천의 혈족이다. 가문을 모독하는 말이 듣기 달가울 리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직접 증명을 하도록 하게.”

“좋습니다.”

권한울의 대답에 시몽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

“여기서 말입니까?”

“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가? 그럼 얼마든지 주도록 하지.”

권한울은 나지막이 웃었다. 이 역시 도발이었다. 알면서도 걸려들 수밖에 없는 도발.

“그냥 바로 시작하죠.”

“그거 좋은 생…….”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한울이 주먹을 내질렀다. 빈틈을 완벽하게 찌르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권한울이 내지른 주먹을 시몽은 너무나도 쉽게 붙잡았다.

“성격 한번 급하군.”

권한울은 주먹을 거두며 두 번째 공격을 날리려고 했다.

그 순간, 복부에 충격이 느껴졌다. 권한울의 몸이 뒤로 날아가서 벽에 처박혔다.

“큭.”

권한울은 배를 붙잡고 일어났다. 고개를 들자 응접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시몽 블라가가 보였다.

“설마 바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지?”

권한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설마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곧바로 부정했다. 권한울은 수많은 혈통을 통해서 다각도에서 대상의 수준을 살필 수 있다.

시몽 블라가는 권사가 아니다. 그 판단에 한 치의 오류도 없다.

‘능력치로 찍어 누른 건가?’

이 역시 부정. 시몽 블라가는 권법만으로 대결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그 말도 방금 전 그가 보여 줬던 반격기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권사가 아닌 자가 완벽한 권법을 구사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환각?’

문득 권한울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천재혈과 권속혈을 동시에 활성화시켰다.

그제야 권한울은 볼 수 있었다.

시몽 블라가의 몸을 둘러싼 권속혈의 권능을 말이다.

“가만히 있는 꼴이 꼭 겁먹은 개새끼 같군.”

시몽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권한울의 눈빛이 한층 싸늘해졌다.

땅을 박차며 시몽 블라가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시몽 블라가의 권능이 권한울을 덮쳤다.

권한울의 눈앞에 환각이 펼쳐졌다.

환각은 시몽 블라가로 변했다. 권한울의 주먹을 막아내고 턱을 강타했다. 권한울은 충격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환각이 사라지고 진짜 시몽 블라가가 비웃듯이 말했다.

“똑같은 공격이라니. 재미없지 않나.”

권한울 역시 비웃음을 지었다.

손에 닿는 느낌도, 얼굴에 가해진 충격도 진짜였으나 모두 가짜였다.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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