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통이 깡패임-127화 (127/221)

<혈통이 깡패임 127화>

127. 보이지 않는 틈새 (1)

“뭔가 수상해.”

다음 날 아침, 카탈리나 블라가는 침대에 앉아서 고민했다.

어젯밤 있었던 일이 아무래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아이들이 리틀드래곤을 습격한 거 같은데…….”

하지만 마냥 의심할 수도 없었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권한울이 권속들을 감싸줬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레빗의 반응도 카탈리나 블라가를 망설이게 하는 원인 중 하나였다.

진짜 대련을 한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자연스럽게 권한울의 말에 동조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은 권한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탈리나 블라가는 아무래도 영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족쇄.”

권한울의 손목에 걸어놓았던 족쇄가 풀려 있었다.

당시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미처 눈치채지 못햇다.

“그걸 어떻게 풀었지?”

족쇄의 잠금을 풀 수 있는 열쇠는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있다. 권한울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족쇄를 풀 수 없다.

“……트로이?”

카탈리나 블라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문을 열고 트로이가 들어왔다.

“예, 말씀하십시오.”

“어젯밤에 제가 아주 크게 실망한 거 알고 있죠?”

트로이는 바닥에 엎드렸다. 땅바닥이 울릴 정도로 이마를 찍었다.

“죄송합니다.”

카탈리나 블라가는 싸늘한 시선으로 트로이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만회할 기회를 주겠어요. 가서 권한울을 감시하세요.”

“한 번 더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택에 있는 다른 권속들도 같이 감시하세요.”

“……예?”

트로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가시돋힌 목소리로 말햇다.

“신경 쓰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하세요.”

“죄송합니다.”

트로이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카탈리나 블라가는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또 모르니.”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드렸다.

“카탈리나 님. 원로회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시종의 말에 카탈리나 블라가는 놀라지 않았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을 뿐.

“흑천의 전쟁 선언에 대해서 물어볼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 * *

“오늘부터 감시조에 합류하게 됐다.”

다음날.

권한울은 오전부터 달갑지 않은 손님을 마주하고 있엇다.

“누구 마음대로요?”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명령이다.”

그 말에 권한울은 혀를 찼다. 트로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혀를 찼나?”

“아, 잘못 들으신 거예요.”

권한울은 바로 부정했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주시하고 있을 테니 허튼 짓은 하지 말도록 해라.”

“그러죠.”

권한울은 그리 대답하고 트로이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트로이는 방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기요?”

“뭐지?”

“왜 안 나가시는 거죠?”

“왜 나가야 하지?”

권한울과 트로이는 서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계속 이 방에 있으려고요?”

“그건 아니다.”

“역시 그렇죠.”

“난 널 따라다녀야 하니. 네가 방을 나가면 나도 이 방을 나가게 되니까.”

권한울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설마 방금 전에 했던 말이 경고가 아니라 진짜였단 말인가?

“아무리 명령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겠어요?”

“카탈리나 님께서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다. 철저하게 완수할 생각이다.”

트로이의 두 눈이 험악하게 빛났다. 권한울은 골치가 아파왔다.

그때였다.

“트로이 아저씨!”

문이 벌컥 열리며 레빗이 들어왔다. 레빗은 트로이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감시조라면서요?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요.”

“아침에 막 결정된 사안이라 말할 여유가 없었다.”

“마침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아저씨한테 이것저것 물어볼 수도 있고.”

“난 널 가르치러 온 게 아니라 권한울을 감시…….”

“아, 시끄럽고 빨리 와 봐요. 안 오면 화날 거예요.”

레빗이 막무가내로 트로이를 잡아당겼다. 트로이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지못해 끌려갔다.

“잠깐이다.”

“예, 예.”

밖으로 나가기 전, 레빗이 권한울에게 한쪽 눈을 찡긋 했다.

둘이 밖으로 나가자말자 다른 권속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권속은 고개를 숙인 뒤, 조사해온 자료를 내밀었다.

어제 권한울이 부탁했던 블라가 가문의 구조와 조직도였다.

권한울은 권속이 내민 자료를 빠르게 훑어내려갔다.

‘여기가 어딘가 했더니 필리핀이었군.’

블라가 가문은 필리핀의 수많은 섬 중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었다.

여태 블라가 가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 알려진 적이 없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원래 블라가 가문은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필리핀으로 이주를 한 거지?’

흥미가 생겼으나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도망치기 까다롭다.’

섬이라는 지형도 그렇지만 가문을 둘러싸고 있는 몬스터들이 가장 큰 문제였다.

블라가 가문은 권속혈을 이용해 지배한 몬스터들을 가문의 경비에 사용했다.

최소 골드급에서 최대 다이어급까지.

몬스터들의 감각은 헌터들보다 훨씬 뛰어나다. 이들의 이목을 속이고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싸우라고 하면 몇 마리든 때려잡을 수 있는데…….’

몬스터에게 들키면 그 즉시 블라가 가문의 권속들이 나설 것이다.

트로이 같은 카발리에르 움브라가 나서면 권한울조차 승산을 장담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게 불가능하다면…… 차라리 당당하게 나가볼까?’

블라가 가문은 노예를 이용해서 식량을 생산하고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등 자급자족의 비율이 큰 사회다.

하지만 자급자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기에 간혹 외부에서 생필품을 조달해 오고는 했다.

‘한 달에 한 번 화물선이 섬을 방문한다.’

마침 다음 화물선이 방문하는 날짜가 이틀 뒤였다.

섬을 정기적으로 오고가기 때문에 이 화물선에 숨어들면 섬을 지키는 몬스터들을 속이고 달아날 수 있다.

‘우선 화물선에 잠입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화물선이 떠날 때까지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데…….’

첫 번째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두 번째였다.

트로이가 권한울을 감시하고 있는 한 화물선이 떠날 때까지 들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환명을 사용하면 될 것도 같은데.’

환명(幻鳴).

음파를 이용해서 환상을 보여주는 권능이다. 은밀하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이 환상에 걸린 줄도 모르며 장기간 지속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원래는 환명을 사용해서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키려고 했으나…….

“트로이 님께 들키기 전에 가 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권한울은 떠나려는 권속을 붙잡았다.

<권능 ‘환명(幻鳴)’을 발현합니다.>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권한울은 권속에게 환명을 사용했다. 자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암시를 걸었다.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 보세요.”

“주인님이 보입니다만……?”

권속은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이었다. 권한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수준이 높으면 환명이 통하질 않는단 말이지.”

헌터가 아닌 일반 시종들에게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권속들에게는 통하질 않았다.

지배력도 그렇고 권속혈의 권능은 여러모로 까다로운 점이 많았다.

사실 권속혈만 특이한 게 아니었다. 헌터들이 사용하는 스킬 중에서 환혹 계열은 전부 사용 조건이 까다로웠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하나.”

그때였다.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머릿속이 찌릿 울렸다. 권한울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주, 주인님?”

권속이 어쩔 줄 몰라하며 권한울을 부축했다. 권한울은 손을 내밀며 권속을 안심시켰다.

“윽.”

하지만 통증이 좀 약해졌다 뿐이지 아직도 머릿속이 아려왔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천재혈’과 ‘권속혈’이 감응합니다.> <천재혈에 의해 뇌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권속혈의 기능이 새로 개방됩니다!> 온 세상이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침대도, 탁자도, 전등의 빛도 물감처럼 번진다.

“주인님?”

권속의 몸도 색에 물들어 있었다.

한 가지 색만 가지고 있는 사물과 달리 권속은 온갖 종류의 색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붉게, 푸르게, 혹은 세 가지 색이 동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 색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권한울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권능 ‘환명(幻鳴)’을 발현합니다.> <종소리가 울려퍼집니다.>

다시 환명을 사용했다. 권속의 머리를 둘러싸고 있는 푸른색에 권능을 집중했다.

그 순간, 권속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 주인님? 어디 가신 겁니까?”

권속이 당황해서 주번을 두리번 거렸다. 연기가 아니라 정말로 권한울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황해 하는 권속과 달리 권한울의 얼굴에는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이러면 또 써 볼만 하지.”

* * *

카탈리나 블라가가 향한 곳은 블라가 가문의 외곽에 세워진 성당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청동으로 제작된 원형 탁자가 보였다.

이미 일곱 명의 사람들이 탁자 주변에 앉아 있었다.

“바쁘신 원로 분들께서 일곱 분이나 모여 계실 줄은 몰랐네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원형탁자의 빈자리에 앉았다.

“오셨습니까.”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외관만 따지면 카탈리나 블라가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였으나 오히려 존대를 하고 있었다.

“시몽. 오랜만에 보니까 더 멋지네요.”

“과찬이십니다. 카탈리나 님이야 말로 오랜만에 뵈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칭찬하는 말과 달리 시몽이라 불린 남성의 표정은 그리 곱지 않았다.

시몽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원로들 전부 마찬가지였다.

“카탈리나 님, 상황이 급하니 이만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귀찮게 말돌릴 거 있나요? 다들 흑천 일가 때문에 절 불러낸 거잖아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다들 왜 이렇게 겁을 먹었어요? 이래서야 블라가 가문의 이름이 울겠네요.”

“카탈리나 님…… 그게 지금 하실 말씀이십니까.”

시몽이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매만졌다.

“상대는 흑천 일가입니다. 메이 가문도 하루 아침에 멸문시켜버린 그 괴물들이 전쟁을 선포했단 말입니다.”

“시몽. 건방지게 절 가르치려고 하지 마세요. 다 알고 하는 말이니까.”

쾅.

원로 중 한 명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알아요? 다 아시는 분이 흑천의 혈족을 납치해요? 도제 정신이십니까!”

한 명이 폭발하자 다른 원로들도 똑같이 반응했다. 모두들 목소리를 높이며 카탈리나 블라가를 힐난했다.

“당장 그 남자를 돌려보내세요!”

“맞습니다! 어떻게든 흑천을 달래야…….”

“그만.”

카탈리나 블라가가 기세를 일으켰다. 흉포한 기운이 모든 원로들을 압도했다.

시끄러웠던 성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흑천 일가의 이름에 너무 놀라서 잠시 잊고 말았다. 블라가 가문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누구였는지 말이다.“

“권한울을 돌려보낼 생각은 없어요.”

원로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카탈리나 블라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흑천 일가? 올 테면 오라고 해 보죠.”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