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21화>
121. 블라가 가문 (1)
한 달 뒤, 권한울은 천공투기장에 참가하기 위해서 태평양으로 떠나는 전용기에 탑승했다.
천공투기장이 열리기까지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었으나 미리 현장에 도착해서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와아…… 천공투기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다니.”
날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권후돈이 꿈만 같다는 듯이 말했다.
“후돈 오빠가 참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하시는 거예요?”
“그, 그렇지만…….”
메이홍의 핀잔에 권후돈이 볼멘목소리로 말했다.
“천공투기장이잖아? 그걸 직접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걸…….”
천공투기장은 지구에서 열리는 대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고 할 수 있었다.
주기적으로 출현하는 정체불명 던전이라는 점만으로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데.
유명 길드와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경합까지 벌인다.
게다가 던전은 외부에서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광경을 지켜볼 수도 있다.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에 한울이가 가문을 대표해서 출전하다니…….”
권후돈이 경외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권한울을 바라봤다.
너무 부담스러웠기에 권한울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대장님.”
그러자 반대쪽에 앉아 있던 가엘 가르시안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어째 표정이 이상했다.
평소처럼 석상 같은 얼굴인 것은 똑같았지만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데다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섬에서 말로만 듣던 천공투기장을 제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럽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엘은 섬에서 갇혀 지냈다고 했죠.”
가엘 가르시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한 가문이랑 길드만 해도 스무 곳이 넘어가는군요! 특히 바벨 가문이 기대가 됩니다!”
과묵한 태도는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가엘 가르시안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그렇다고 멈추라고 할 수도 없기에 권한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듣기만 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권한울도 이번 천공투기장이 기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기대라기보다는 긴장된다고 해야 할까.
묵염을 전수받을 때, 권명우에게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형님께서는 배반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이번 기회에 완전히 털어내라는 뜻에서 널 천공투기장에 참가시킨 게 아닐까 싶구나.
묵염의 전수를 마친 뒤, 권명우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형님께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이번에 메이샤오 습격 건으로 흑천의 명성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단다.
멸문당한 가문의 혈족들에게 흑천의 혈족이 학살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네가 천공투기장에서 우승을 한다면 잃어버린 명성을 다시 되찾을 수 있다. 아니, 이전보다 더 위상이 높아지겠지.
그리하면 권한울은 배반자의 자식에서 가문을 빛낸 영웅으로 바뀐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어째서 권선우가 자신을 이토록 신경 쓰냐는 것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으면서 말이다. 아니, 처음뿐만이 아니다. 언제나 권선우는 그렇게 행동했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사정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형님께서는 천이의 일을…… 아니다, 이건 내가 말할 자격이 없구나.
권한울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배반자의 아들이라는 비난을 신경 쓴 적은 없다.
권한울의 목표는 아버지의 오명을 씻는 게 아니라 흑천의 정점에 오르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길게 하십니까?”
어느새 주하연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권한울은 감사를 표하며 찻잔을 들었다.
“천공투기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어요.”
“권한울 님 수준이라면 걱정하실 거 없을 겁니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권한울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청량한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졌다.
“하연 씨가 끓여 주는 차는 언제 마셔도…….”
최고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이 굳어서 말을 끝마칠 수가 없었다.
입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마비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동자뿐이었다. 눈동자만 내려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그러자 빛 가루가 모여서 만들어진 고리들이 자신의 팔다리와 몸통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게 대체…….’
권한울은 주하연이 자신을 도와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흑천의 정보부에서 파악한 참가자들의 정보를 확인해봤습니다만 권한울 님과 맞설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눈앞에 있음에도 주하연은 권한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주하연뿐만이 아니었다. 비행기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권한울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딱 한 명, 위험한 참가자가 있기는 합니다. 드래곤슬레이어의 직계 제자가 참가를 한다고 하더군요. 아마 권한울 님께서도 들어보신 적이…….”
눈앞이 번쩍였다. 눈이 부셔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번쩍임은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졌을 때, 권한울은 비행기가 아니라 생판 다른 곳에 있었다.
온통 붉은색 비단과 장식물로 꾸며진 방.
그곳에 앉아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입이 움직였다. 몸도 움직였다. 권한울이 당황해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
익숙한, 그러나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길쭉한 소파 위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여인이 보였다.
“다시 보니까 정말 반갑네요.”
카탈리나 블라가.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권한울의 모든 감각이 바짝 날이 섰다.
본능적으로 용마기를 일으키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잡아 눌렀다.
엄청난 마력이 권한울의 몸을 짓눌렀다. 권한울은 강제로 다시 의자에 앉혀졌다.
시선을 위로 올리자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남성이 보였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앞이다. 무례한 행동은 하지 말도록.”
남자가 발산하는 기운이 권한울을 옭아맸다.
권명우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이 남자 역시 경지에 오른 자라는 뜻이었다.
“트로이. 너무 거칠게 행동하지 마세요. 아주 귀한 손님이잖아요.”
그 말에 남자는 곧바로 권한울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팔뚝을 접은 채 허리를 숙였다.
권한울은 자신의 어깨를 매만졌다. 잠깐 붙잡혔을 뿐인데 뼈가 아려왔다.
“카탈리나 블라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 사이에 그렇게 딱딱하게 말할 거예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캐시라고 불러도 돼요. 저랑 친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불러요. 그렇죠. 트로이?”
트로이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카탈리나 블라가는 눈웃음을 지었다.
“지랄하지 마십시오.”
저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뒤에 있던 트로이가 살기를 내뿜었다.
경지에 오른 자가 내뿜는 살기는 그 자체로 흉기였다. 온몸의 피부가 벗겨지는 듯한 격통이 권한울을 덮쳤다.
권한울은 이를 악물고 살기를 버텨냈다. 권명우의 살기를 미리 경험해 봐서 다행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직 한참 부족했다.
“날 어떻게 납치했는지. 왜 납치했는지 여기는 어디인지부터 말하세요.”
“어머, 꼭 제가 취조당하는 거 같네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카탈리나 블라가는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어떻게 납치했는지부터 알려 드릴까요? 자세히 말씀드리면 하루를 다 사용해도 부족하니 대충 요약만 해 드릴게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블라가 가문의 혈족들을 흑천 일가 주변에 쫙 뿌렸어요. 흑천 일가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지배하는 건 가능하거든요.”
말을 하는 내내 카탈리나 블라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들떠 있는 어린애를 보는 듯했다.
“관련된 사람들을 지배해서 뭐?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분명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얻는 정보는 극히 적죠. 하지만 그런 정보들도 긁어모으다 보면 윤곽이 잡힌답니다.”
블라가 가문은 정보를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정보를 수집하고 취합하는 것쯤은 손쉽게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리틀드래곤이 흑천 일가를 떠나는 날짜와 비행경로를 집어낼 수 있었어요. 그 정보를 토대로 작업을 시작했죠.”
카탈리나 블라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행기가 통과하는 장소에 대기한 다음에 유물들을 준비했죠. 어떤 유물들이 사용되었는지 아세요? 대상의 위치를 집어내고, 상태불능으로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환각을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대상을 이동시키고.”
말울 하면서 카탈리나 블라가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전부 일회용에 설치형이라 사용법이 굉장히 까다로웠어요. 하지만 별 문제는 안 됐죠.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요.”
말을 하면 할 수 록 카탈리나 블라가의 얼굴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전부 고가의 유물들이라 다 합치면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거예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제야 권한울은 그녀가 왜 이렇게 구구절절 설명했는지 깨달았다.
자랑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뭡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카탈리나 블라가가 인간수집가라고 불린다지만 권한울 한 명 때문에 그렇게까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거야 당신이 진혈이니까요.”
그리고 카탈리나 블라가의 대답을 듣는 순간, 권한울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걸 어떻게…….”
“당신네 부회장이 말해 줬어요.”
“이런 미친.”
권혁이 거론되었음에도 권한울은 놀라기보다 욕부터 내뱉었다.
아무리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다른 가문에 그 비밀을 발설하다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진(眞) 흑룡혈을 가진 사람을 손에 넣을 수 있는데. 이렇게 할 가치는 충분하지 않나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 움직인 것만으로 달콤한 향기가 확 풍겨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향기는 짙어졌다.
“지금은 제가 밉겠지만 그것도 잠깐이에요. 다들 처음에는 당신처럼 절 싫어하지만 막상 권속이 되고 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됐거든요.”
“듣기만 해도 끔찍한 소리군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별안간 웃음을 멈추고 권한울을 바라봤다.
두 눈동자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권속혈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나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제 지배가 안 통하네요. 진혈이라 그런가?”
카탈리나 블라가는 손가락을 뻗어 권한울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권한울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여기는 배 위거든요. 게다가 트로이를 포함한 제 권속들이 당신을 감시할 거예요.”
“날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블라가 가문이요. 그곳에서 차근차근 당신을 저한테 종속시킬 거예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트로이에게 눈짓을 했다. 트로이는 권한울의 손목에 굵직한 수갑을 채웠다.
“마력을 제한하는 구속구예요. 절대로 못 부수니까. 쓸데없이 고생하지 마세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트로이와 함께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권한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배 위라고 하더니 정말 바다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권한울을 보자마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벤 블라가라고 한다. 가문에 도착할 때까지 널 감시하고 시중을 들게 됐다.”
시중을 드는 사람치고는 몹시 무례한 태도였다.
“나는 블라가 가문의 순혈이자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
남자의 신분을 듣고 권한울은 의아해했다. 시중을 들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름과 위치와 작위를 설명했는지 아나?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명령만 아니었어도 너 따위는 날 우러러 볼 수도 없었을 테니 주제파악을 하라는 뜻이다.”
화풀이 중이라는 말을 참으로 길게 하는 남자였다.
“나는 권한울입니다. 흑천 일가의 직계 혈족이고 흑암대의 대장을 맡고 있죠.”
“뭐 어쩌라는 거냐.”
“그쪽이 함부로 말할 위치가 아니니까 말조심하라는 뜻입니다.”
그 말에 벤 블라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보니 자기가 무슨 상황에 처했는지도 모르는 얼간이였군. 너는 지금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권속이다.”
“아직 아닙니다만.”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
벤 블라가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블라가 가문에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가장 중요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지. 모든 권속은 반드시 혈족에게 복종해야 한다. 설사 잡혈이라 해도.”
벤 블라가가 권한울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마구 흔들어댔다.
“한 마디로 모든 권속은 혈족보다 밑에 있다는 뜻이다.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권속이 되어도 마찬가지지. 이제 주제파악이 좀 되시나?”
벤 블라가는 권한울의 머리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블라가 가문에서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 지금부터 잠자코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다.”
벤 블라가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금속으로 된 담뱃갑을 하나 꺼냈다. 담배를 입에 물며 권한울에게 명령했다.
“알았으면 가서 재떨이나 가지고 와.”
권한울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벤 블라가에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습니까?”
“이거? 말할 것도 없지. 보통 담배가 아니라 특별 주문한 특상품이야. 던전의 식물을 이용해 만들었거든.”
벤 블라가는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붙이려는데 다시 권한울이 입을 열었다.
“담배는 한 번도 안 피워 봐서 모르겠는데…… 한 개비 주시죠.”
“이 좋은 걸 아직까지 안 해 봤다고?”
벤 블라가는 순순히 권한울에게 담배갑을 내밀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담배를 집기 위해서는 누군가 움직여야 했다.
“뭐 해? 빨리 가져가.”
벤 블라가는 어서 가지고 가라는 듯 담배갑을 흔들었다. 그러자 권한울이 말했다.
“그쪽에서 가지고 오시죠.”
“귀찮게 굴기는.”
벤 블라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담배갑을 내밀었다.
그런데 권한울은 이번에도 담배를 집지 않았다.
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말했다.
“올려놓으세요.”
벤 블라가는 손수 담밧갑에서 담배를 꺼내서 손가락 사이에 끼워놓았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째서 권한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거지?
“담배만 올려놓으면 뭐합니까. 불을 붙여야죠.”
권한울이 담배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 순간, 벤 블라가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서 권속 따위가 혈족에게 명령을….”
고함을 지르려는 찰나, 권한울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검은색이었던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벤 블라가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궈, 권속혈? 어, 어떻게…….”
“불.”
그 말을 듣는 순간, 벤 블라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벤 블라가의 내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모든 생각과 감정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벤 블라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조심스럽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권한울은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연기 맛이잖아? 재떨이 가져와.”
벤 블라가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떨이를 찾았으나 방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가져오라고 했는데.”
권한울이 재차 말했다. 벤 블라가는 자신의 두 손을 내밀었다. 권한울은 그 손바닥 위에 담배를 비벼 껐다.
“치워.”
벤 블라가는 담배를 꼭 쥔 채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자 권한울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자,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