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18화>
118. 이름 (2)
호주를 출발한 비행기는 순조롭게 흑천 일가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받은 권선우의 비서가 일행을 맞이했다.
“뭐? 벌써 회의가 끝났다고?”
비행기에서 내린 권명우에게 권선우의 비서가 대략적인 상황을 말해줬다.
흑천 일가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고 이미 방침이 결정됐다는 것까지.
“회장님께서 권명우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당장 가도록 하마.”
“그리고 권한울 님과 팀원 분들도 같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권선우는 메이 가문의 습격을 어떻게 대처할지를 논하기 위해서 권명우를 부른 것이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 권한울과 나머지 세 명까지 부르다니.
차라리 권한울 혼자만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으리라.
“하, 할아버님께서 왜, 왜 우리까지…….”
“그, 그러게 말이에요.”
“…….”
권후돈과 메이홍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가엘 가르시안은 아예 혼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죠?”
“죄송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회장님께 직접 들으시기 바랍니다.”
권한울의 물음에도 비서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 바람에 궁금증과 걱정이 더욱 커졌다.
“다 큰 놈들이 왜 이렇게 겁이 많아. 빨리 가자!”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권명우가 일행을 재촉했기 때문이다. 결국 권한울과 팀원들은 뭐라 생각할 시간도 없이 회장의 업무실로 향하게 됐다.
“주하연 씨께서는 따로 가실 곳이 있습니다.”
그때, 회장의 비서가 주하연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실장님께서 부르셨습니다. 한때 회장님을 보좌했던 동지로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주하연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가 풀렸다.
그리고 권한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비서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권한울은 주하연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봤다.
마지막에 보여 준 표정이 어쩐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뭘 그렇게 쳐다보냐. 빨리 가자.”
권명우이 재촉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업무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저…… 한울아?”
뒤따라오던 권후돈이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지 않아?”
평소라면 권후돈이 너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권한울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돈 오빠도 그렇게 느꼈어요? 제 착각이 아니었네요.”
“저도 설명은 못하겠습니다만…… 굉장히 불편합니다.”
심지어 다른 두 명도 똑같은 말을 했다.
권한울은 슬쩍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 이제 막 가문에 들어온 신입 혈족들 등등.
모두들 권한울을 보고는 길을 비켜서거나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처음에는 권명우 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 겪어보다보니 깨달았다.
권명우 뿐만이 아니라 권한울, 그리고 다른 세 명까지 똑같이 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를 무서워해서 피하는 거 같지는 않은데…….”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권한울은 가문 내의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살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계속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 앞에 걸어오는 두 명의 남성이 보였다.
기이하게도 한 명은 화가 잔뜩 나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말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만 진정하게.”
“진정? 그래, 진정해야지. 할 말은 다 하고!”
두 남성의 걸음은 권명우의 앞에서 멈췄다. 화가 나 있던 남자가 권명우를 향해 소리쳤다.
“흑천제일권을 뵙습니다!”
그 말에 권명우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권태훈? 무슨 일인데 그렇게 화가 나 있는 겐가.”
“흑천제일권의 뒤에 있는 저 녀석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껏 소리친 남성이 권한울을 노려봤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회장님의 말씀에 동의했다만 그렇다고 내가 널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권한울은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렸다. 이 남자가 대체 왜 화가 났는지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니 승격되었다고 해서 기고만장해 하지 마라!”
남자는 그리 말한 뒤, 권한울을 스치고 지나갔다.
권한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마.”
그러다 다른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화가 난 남성을 말리던 그 남자였다.
“가문을 위해서 목숨조차 내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친구야. 흑천이라는 자부심이 너무 강해서 이따금씩 저렇게 과하게 행동할 때가 있어.”
남자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저 친구와 의견이 조금 다르단다. 이번 일로 너는 자격을 증명했어. 충분하다 못해서 과할 정도로 말이야.”
남자는 권한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원로들도 많단다. 그러니 힘을 내거라. 그럼 나는 저 친구를 달래러 가 보마.”
그리 말하며 남자도 사라졌다.
두 남자가 사라지자 권명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 놈들이 미쳤나.”
회장을 만나러 가야 했기에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권선우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였다.
입구에 한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금발머리카락과 파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남성이었다.
“권명우 님께 인사드립니다.”
“역시 자네도 와 있었군.”
권명우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아들의 죽음은 안타깝게 됐네.”
그 말에 권한울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아들을 잃어버린 남자.
명명전 때, 권한울과 싸우기로 했던 베인 호프의 아버지이자 유럽지부장 다그마 권이 틀림없었다.
“그 일로 자식을 잃은 사람이 저 혼자뿐이겠습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저는 제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가문의 적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 죽었으니까요.”
다그마 권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권한울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그마 권의 시선이 권한울에게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순간, 권한울은 충격을 받았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차분하고 달관한 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내 아들은 너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목소리마저 그러했다. 원망도,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사운 마리아 산체스조차 내 아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을 거다.”
아니, 착각이었다. 말끝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너는 내 아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러니 더욱 강해져야 한다.”
다그마 권은 권명우에게 고개를 숙인 뒤,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 권명우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올라가자.”
* * *
“왔느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권선우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형님, 여전히 재미없는 인사말이시구려.”
“시끄럽다. 내가 농담이나 주고받으면서 웃자고 너희들을 부른 줄 아느냐.”
권선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언짢다는 행동에 권명우와 권한울을 제외한 세 명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와서 들어보니 이미 회의가 끝났다면서?”
“그래, 너와 흑천대가 추격대를 맡아 줘야겠다.”
예상했던 대답인지 권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은 얼마나 해줄 거요?”
“무엇이든 해주마. 필요한 부대가 있으면 데려가거라.”
“다른 놈들은 필요 없고…… 강철대를 데려가고 싶은데.”
“마음대로 해라.”
메이홍이 어깨를 움찔했다.
강철대는 흑천 그룹 내의 범죄자들을 차출하는 징벌부대.
한때, 메이홍은 강철대에 끌려갈 뻔했다.
“그런데 내가 나서야할 정도로 그놈들이 강한 거요?”
“다른 놈들은 별 볼일 없다. 하지만 혈살검 메이샤오 만큼은 다르더구나.”
권선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너에게는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을 보냈다가는 목숨만 버리게 될 게야.”
메이 가문의 가주와 매중제일검조차 낮게 보던 권선우다.
그런 권선우가 인정할 정도라면 메이샤오의 실력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다.
“혁이나 찬성이를 보낼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약간의 피라도 흘리고 싶지 않구나.”
“형님의 뜻은 잘 알겠수. 나만 믿으시우.”
그제야 권선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다음으로…… 권한울.”
회장이 권한울을 호명했다.
“권후돈, 메이홍, 가엘 가르시안.”
나머지 세 명의 이름도 차례로 호출되었다.
세 명 모두 긴장했으나 특히 권후돈이 심했다.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네 명이 소속되어 있는 무명대를 유명대로 승격시키겠다.”
* * *
길고 긴 침묵이 흘렀다.
권후돈을 포함한 세 명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권한울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어…… 이걸로 끝인가요?”
권선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무슨 뜻이냐.”
“저는 유명대가 되면 좀…… 거창할 줄 알았는데요. 뭐 자리도 마련해주고, 축하도 해주고. 근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진행되는 거였나요?”
황당하다는 듯 권선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바라는 것도 많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메이샤오 같은 적이 흑천을 노리고 있는 마당에 그런 자리를 마련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권선우가 싸늘한 눈초리로 권한울을 노려보며 덧붙였다.
“애초에 너희가 유명대로 승격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메이샤오 때문에 생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다. 그게 아니었으면 너희는 아직도 무명대로서 잡일을 맡아야 했을 거다.”
한 마디로 불만 가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메이 가문 때문에 승격이 된 건 알겠는데…… 원로들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이번 산체스 가문의 혈족과 맞서 싸워서 승리한 것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팀을 무명대로 남겨놓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 일이 벌써 흑천 일가까지 알려지다니. 과연 인터넷 시대다웠다.
“부대명은 뭡니까?”
“흑암대(黑暗隊).”
검고 어둡다.
권한울은 별 감흥 없이 부대명을 기억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권명우는 아니었다.
“형님 그 이름은…… 원래 천이 녀석의 부대에게 하사하려던 이름이 아니었소?”
권한울은 놀라서 권선우를 다시 쳐다봤다.
권천.
권선우의 차남이자 권한울의 아버지.
동시에 가문을 배신한 배반자.
모종의 이유로 권선우가 사형을 명한 혈족.
“그 이름을 여태 다른 부대에게 하사하지 않은 이유가 설마…….”
“헛소리 하지 마라.”
권선우가 실로 불쾌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배반자가 사용할 예정이었던 부대명을 다른 부대에게 하사하는 것이 께름칙했을 뿐이다. 그리고 저 놈에게 흑암대라는 이름을 하사한 이유는 죽기 전까지 자기 아비의 과오를 청산하라는 뜻이지.”
냉정하다 못해서 잔인한 이유였다.
“그렇게 됐으니 권한울과 흑암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다.”
권선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권한울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제 곧 열릴 천공투기장에서 흑천의 명성을 높여라. 흑암대의 이름을 널리 알려라.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뒤, 덧붙였다.
“네가 진혈임을 알려서 시조 권현문 님의 전설을 다시 한 번 더 세상에 널리 퍼트려라.”
* * *
“형님께서도 참 너무하시지.”
건물을 나오며 권명우가 혀를 찼다.
“아비의 과오를 씻으라는 의미에서 흑암대의 이름을 하사해? 하여간 사이코도 이런 사이코가 따로 없어.”
권한울이 신기하다는 듯이 권명우를 쳐다봤다.
그가 권선우를 이렇게 신랄하게 비난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축하한다. 이걸로 너희들도 진짜 흑천의 부대로 인정받았구나.”
권명우의 활짝 웃으며 축하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다른 세 명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내, 내가 유명대에 소속되다니. 엄마가 알면 기, 기뻐하실 거야.”
권후돈은 눈물을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추격대에 편성이 됐으니 당분간 널 만나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권명우는 한동안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 갑자기 권한울에게 말했다.
“오늘밤에 연무장으로 나와라.”
“왜 그러십니까?”
“어쩌면 오랫동안 못 볼 수도 있으니…….”
권명우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너도 이제 상승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냐. 그러니 이번 기회에 보여 주마.”
권명우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목표로 해야 할 경지가 무엇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