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72화>
72화 배신자들 (3)
“농담이야.”
휘몰아치던 살기가 뚝 끊겼다. 마리아 산체스는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팽창했던 신체가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이건 또 무슨 짓입니까.”
주하연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마리아 산체스는 진심이라는 듯 아예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았다.
“내가 부탁받은 일은 널 붙잡아놓는 것뿐이야. 여기서 너랑 싸우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
마리아 산체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게다가 이건 흑천 그룹의 일이잖아? 방해했다가는 흑천 그룹과 척을 지게 될 텐데…… 내가 미쳤니.”
마리아 산체스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주하연은 마리아 산체스를 지긋이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권한울을 돕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마리아 산체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딴 마음 품지 마. 너도 알잖아? 넌 나 못 이겨.”
“같이 죽을 수는 있습니다.”
“그건 그래. 하지만 굳이 여기서 그래야겠어? 피차 피곤하게.”
주하연도 살기를 거둬들였다. 마리아 산체스의 옆 자리가 아니라, 맞은편에 있는 난간에 앉았다.
“응? 진짜로 가만히 있게?”
“그럼 싸울까요?”
“난 또 네가 그 남자를 걱정해서 안절부절 못할 줄 알았지.”
“권한울 님이라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오오…… 자신감 넘치네. 혹시 걔도 흑천의 이름을 듣고 물러날까봐 그러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다행이네. 사실 페르드랑스 걔는 고위 혈족을 무지하게 싫어하거든.”
마리아 산체스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머리도 좋고, 나름 실력도 괜찮은데. 고위 혈족만 만나면 생각이 짧아져. 최선의 판단을 못하더라. 어쩌면 네 남자, 죽을 지도 몰라.”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주하연은 딱 잘라 말했다. 마리아 산체스는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가지만 묻죠. 페르드랑스는 어째서 타키미네 가문을 습격한 겁니까. 유물 하나 때문에 이 짓을 벌이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아, 그거? 사실 유물 때문에 온 거 아니야. 환골탈태 때문이지.”
주하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썼다.
“환골탈태라고요?”
“페르드랑스는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거든. 그래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를 방법을 찾다가 이번 제안을 듣게 된 거지.”
헌터는 상태창을 통해서 끝없이 성장할 수 있다.
사실 이 말은 틀렸다. 상태창이 있다 하더라도 헌터마다 성장 한계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단적으로 S급 능력치를 얻기 위해서는 대단한 영약을 섭취해야한다.
하지만 그런 영약을 모두가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력이 뛰어나면 위험한 던전을 클리어해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영원히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헌터에게는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시기가 찾아온다.
“참 그 애도 멍청하지. 그딴 거에 집착하면 오히려 강해질 수 없는데 말이야.”
마리아 산체스가 딱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 * *
독을 먹지 않겠다는 권후돈의 선언에 모두들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뭔 개소리야! 방금 못 들었어? 이거 안 먹으면 죽는다니까?”
락브레이커는 권후돈을 윽박질렀다.
“설마 독을 먹는 게 무서워서 그래? 이거 먹어도 하나도 안 아파. 해독약만 제때 먹어주면 무사하다고 페르드랑스 님이 말했잖아.”
“도, 독 때문이 아니야.”
권후돈은 덜덜 떨며 힘겹게 말했다.
“나, 나는 멍청해.”
“어, 알고 있어.”
락브레이커의 말에 권후돈은 잠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 우둔하고…… 매, 맨날 엄마도 실망시키고…… 하, 하지만…….”
권후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 나도 흑천의 혈족이야.”
그렇기에 굴복할 수 없다.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 그게 권후돈의 선택이었다.
“……허.”
락브레이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뭔 혓바닥이 그렇게 길어. 그러니까 지금 죽고 싶다는 거잖아?”
말과 동시에 락브레이커가 살기를 일으켰다.
페르드랑스에게 패배했다지만 락브레이커는 세계랭커다.
그의 살기에 노출된 권후돈은 피부가 베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잘됐네. 안 그래도 댁의 등신 같은 행동 때문에 짜증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번 기회에…….”
“잠깐.”
그때, 페르드랑스가 락브레이커를 말렸다.
“권후돈이라고 했나? 제법 강단이 있군. 흑천의 순혈다워.”
권후돈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적이 갑자기 자신을 칭찬하니 이해가 가지 않을 만도 했다.
“아, 보통 순혈이 아니었던가? 어머니가 그나마 말이 통하는 흑천으로 유명한 권미지?”
“마, 맞아.”
“나름 회장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위치로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거 상당한 거물이잖아.”
페르드랑스는 혼자 말하고, 혼자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했다
“락브레이커.”
“예.”
“저놈만큼은 반드시 굴복시켜라.”
페르드랑스가 권후돈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바닥을 기게 만들어. 스스로 독을 먹게 해라. 알겠나?”
“그날 깔끔하게 죽이는 게…….”
“내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페르드랑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변했다. 락브레이커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이봐, 대장! 지금 이 말 들었지?”
락브레이커가 주먹을 매만지며 권후돈에게 다가갔다.
-잠깐, 멈추세요!
그때, 권후돈이 착용하고 있는 수정 목걸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드랑스는 수정 속에 떠오른 얼굴을 곧바로 알아봤다. 두 눈에 이채를 띤 채 말했다.
“권미 님. 처음 뵙습니다.”
-반갑군요. 페르드랑스.
수정으로 보이는 권미의 얼굴은 무척 침착해 보였다. 하지만 창백하게 질린 피부가, 떨리는 목소리가, 모든 것이 연기임을 말해줬다.
-무슨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흑천은 더 이상 당신을 방해하지 않겠어요.
“그 말은…… 제가 타카미네 료코를 죽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겠다는 뜻입니까?”
-맞아요. 대신, 후돈이를…… 이 아이는 그냥 보내주세요.
페르드랑스는 타카미네 료코를 힐끔 바라봤다.
실로 재미없게도 타카미네 료코는 이 소리를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후돈이를 그냥 보내준다면 저는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어요.
“그건 꽤 매력적인 제안이군요.”
페르드랑스가 권후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냥 잠복독을 먹여놓는 쪽이 훨씬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권미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당신! 내 아들한테 손끝 하나 대기라도 해봐!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리겠어!
“마음대로 하시죠.
-페르드랑스!
권미가 고함을 내질렀지만 소용없었다. 락브레이커는 이미 권후돈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후돈아! 일단 독을 마시렴!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권미는 생각을 바꿨다.
-뭘 해도 좋으니까 살아만 있어! 그럼 엄마가 반드시 구해 줄 게! 알겠지?
“……엄마, 미안해.”
-그게 무슨 말이니! 바보 같이 굴지 말고 지금은 엄마 말 들어!
“엄마가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흑천의 긍지만큼은 잃지 말라고.”
그 말에 권미는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권후돈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했던 말일뿐이다. 결코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굴복하지 않을 거야.”
검은 비늘이 권후돈의 몸을 휘감았다. 흑룡혈의 두 번째 권능 흑린갑이었다.
그런데 그 양이 심상치가 않았다.
본래 흑린갑은 마력 소모량이 크기 때문에 유지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흑천의 혈족은 일부분만 생성해내서 사용했다.
하지만 권후돈은 흑린갑만으로 전신을 뒤덮었다. 마치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오?”
페르드랑스가 짧게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그쪽은 보통 순혈이 아니었던가?”
흑천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흑룡혈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흑룡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힘은 동등하지 않다.
피의 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순도 내에서도 엄연히 격차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에는 특정 권능에 유독 강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권후돈이 그러했다.
그는 선천적으로 흑린갑에 한해서 엄청난 적성을 타고 났다. 흑린갑의 성능, 유지시간, 그리고 생성가능한 양까지.
그 어떤 순혈 혈족보다 뛰어났다.
“오는군.”
권후돈이 움직였다. 흑린갑을 두른 채 돌진하는 그의 모습은 작은 전차나 다름없었다.
“락브레이커, 물러나라. 다른 놈들 실력을 좀 봐야겠다.”
페르드랑스가 명령을 내렸다. 락브레이커가 물러나고 다른 팀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대장, 진짜 우리랑 싸워보게?”
“그러다 코피 터지면 어쩌려고?”
권후돈의 팀원들은 그를 비웃기에 바빴다.
바로 옆에서 권후돈을 지켜봤기에 잘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겁쟁이며, 한심한 인간인지 말이다.
“한 번쯤 멋지게 날려보고 싶었어.”
대형 해머를 든 팀원이 앞으로 나섰다. 달려오는 권한울을 향해 온힘을 다해 해머를 휘둘렀다.
그리고 본인이 튕겨져 날아갔다.
“어?”
“응?”
팀원들의 얼굴이 일순간 멍해졌다. 다들 당황해서 뒤로 물러났다.
“자, 잠깐!”
“흐, 흩어져!”
권후돈은 팀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일직선으로 들이박았다. 부딪힌 팀원들은 볼링핑처럼 이리저리 날아갔다.
“나약한 것들.”
페르드랑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인형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들이 나서야겠다.”
생인형들 한 명이 권후돈을 향해 뛰어들었다. 동시에 주먹을 휘둘렀다.
생인형의 주먹이 권후돈을 후려쳤다. 그 순간, 지하실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권후돈의 움직임이 멈췄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으아아앗!”
권후돈이 고함을 지르며 다시 땅을 박찼다. 멈췄던 몸이 폭발적으로 튀어나가며 생인형을 날려버렸다.
“…….”
페르드랑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을 벗어난 파괴력이었다.
“권후돈의 능력치가 어떻게 되지?”
“마력만 S급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저 정도의 힘이…….”
말하다 말고 페르드랑스는 깨달았다.
흑린갑이다.
흑린갑을 단순히 방어 도구로 쓰는 게 아니라. 근육처럼 유동시켜서 돌진력을 몇 배로 강화시킨 것이다.
“갑옷이 아니라 강화외골격이라 불러야겠군.”
권후돈은 생인형들을 들이박으며 페르드랑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지척까지 온 순간, 용투기를 일으켰다.
“으아아아앗!”
용투기로 몸을 둘러쌌다. 권후돈의 돌진력에 용투기까지 더해졌다. 미사일이나 다름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락브레이커가 움직였다. 권후돈을 향해 두 주먹을 동시에 내질렀다.
거친 폭발이 권후돈의 몸을 강타했다. 흑린갑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악!”
흑린갑을 부순 폭발이 권후돈까지 집어삼켰다. 권후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권후돈의 몸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쿨럭, 쿨럭…….”
권후돈은 연신 기침을 했다. 그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폭발의 충격으로 전신의 피부가 숯처럼 검게 그을렸다. 주먹에 얻어맞은 복부는 절구로 짓이겨 놓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거 손속이 너무 과했나보군.”
락브레이커가 권후돈을 내려다보며 조롱했다.
“근데 좀 실망인 걸. 흑천의 혈족이 겨우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대장이 쓰레기인 거야. 아니면 소문이 과장된 거야?”
권후돈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락브레이커를 향해 물었다.
“대, 대체…… 왜…….”
많은 것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쉽게 배신했는지. 그리고 이렇게 망설임 없이 손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락브레이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권후돈의 복부를 걷어찼다. 권후돈은 뒤에 있는 벽까지 날아갔다.
“왜? 왜라고?”
락브레이커는 짜증을 냈다. 뭐 그딴 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런 촌스러운 걸 물으면 쓰나.”
락브레이커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에도 권후돈은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장,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골라. 여기서 나한테 맞아죽을지. 아니면…….”
락브레이커가 양팔을 펼쳤다. 생인형들과 팀원들이 보였다.
“저놈들처럼 독을 삼키고 내 말을 따를지 말이야.”
권후돈은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두 주먹을 쥐었다.
락브레이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아주 성정이 대쪽 같은 양반이셨네. 어?”
락브레이커가 권후돈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권후돈은 얼굴을 맞고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뒤는 벽이라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었다.
“다시 물어보지. 마실 거야. 안 마실 거야!”
락브레이커는 권후돈의 몸 곳곳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권후돈은 벽에 몰린 채 얻어맞기만 했다.
“빨리 결정해!”
락브레이커의 펀치가 권후돈의 관자를 강타했다. 권후돈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몸이 땅으로 허물어졌다.
“쿨럭, 쿨럭…….”
권후돈은 간헐적으로 기침을 했다. 청소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여렸던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이래도 말 안 들을 거야? 어?”
그 얼굴을 보고도 락브레이커는 멈추지 않았다. 권후돈의 몸통을 마구 걷어차며 몰아붙였다.
하지만 권후돈은 끝끝내 락브레이커가 원하는 대답을 말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없군.”
페르드랑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노무라 마사타카가 그에게 물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빨리 타카미네 료코를 죽여.”
“이미 덫에 걸린 사냥감입니다. 뭘 그렇게 무서워하십니까.”
“이봐!”
“예, 알겠습니다.”
페르드랑스는 귀찮다는 얼굴로 타카미네 료코에게 다가갔다.
생인형에게 명령해도 되지만 중요한 목표물이니 직접 죽이고 싶었다.
“타카미네 료코 아가씨.”
타카미네 료코가 시선을 옮겼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페르드랑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태연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카미네 아가씨. 당신은 이제 죽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줄 알면서도 타카미네 료코를 자극했다.
“그런 거 같네요.”
“무섭지 않으십니까?”
“무섭죠.”
“태도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내색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페르드랑스는 이 여인이 마음에 들면서도 짜증이 났다.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태연한 게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까지 태연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이 가면을 벗겨내고 싶었다.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반대로 병원장과 저 여자를 죽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페르드랑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릇 사람이랑 죽음 앞에서 초탈할 수는 있어도 삶의 희망 앞에서는 그럴 수 없는 법이다.
이 한 마디에 타카미네 료코의 속마음이 드러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타카미네 료코는 너무나 쉽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다고요?”
“당신의 도움이 없어도 돼요. 이제 곧 그분이 오실 테니까요.”
그분?
페르드랑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상황에서 대체 누가 이 여자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 * *
“안 돼! 안 돼애!”
흑천 그룹의 본사.
그곳에서 권미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후돈아! 안 돼! 후돈아!”
책상에 놓인 수정 구슬에서는 그의 아들이 처참하게 얻어맞는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마, 막아야 해!”
하지만 누구한테?
모든 팀원들이 배신한 상황에서 누가 아들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권한울.”
권미는 황급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권한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여, 여보세요!”
권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고모님, 전화를 잘못거신 것 같습니다. 이 통화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직감이 경고했다. 권미는 재빨리 소리쳤다.
“끄, 끊지마렴! 자, 잘못 걸지 않았어! 너한테 건 거 맞아!”
이윽고 의문에 찬 물음이 들려왔다.
-잘못 건 게 아니라고요?
“지금 이렇게 여유부릴 시간 없어! 후, 후돈이가! 후돈이가 위험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락브레이커, 그놈이…… 그놈이 후돈이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 후돈이가 죽는단 말이야!”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고민할 틈도 없었다.
“후, 후돈이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줄 게! 페르드랑스도 거기에 있어! 절대로 혼자가면 안 돼! 꼭 하연이랑 같이…….”
-고모님께서 그걸 다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얼음으로 만든 송곳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권미는 자신이 지뢰를 밟았음을 깨달았다.
“그게…….”
-대답부터 해 주시죠.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설마 그 와중에 후돈이가 전화로 알렸을 리는 없을 텐데요.
권미는 하는 수 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평소라면 얼버무릴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권후돈의 목숨이 위험한 지금, 그런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권한울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그 유물을 이용해서 모든 걸 다 보고 계셨다?
“맞아…….”
-그럼 락브레이커가 내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겠네요? 근데 말리지 않으셨고?
“하, 한울아 그건…….”
-생각해 보니 권후돈이 이 임무에 참가한 것도 고모님께서 시키신 일이었죠? 근데 제 방해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라면 그게 무슨 망발이냐고 되레 소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그런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다시는 이러지 않으마. 그러니까 제발 후돈이를……, 후돈이 만큼은…….”
-못하겠습니다.
권한울은 딱 잘라 말했다.
“하, 한울아…… 그, 그게 무슨 소리니.”
-고모님께서 하신 행동을 생각하세요. 제가 왜 이딴 일을 당하고도 고모님의 부탁을 들어줘야 합니까?
“자, 잘못했어. 하, 하지만 후돈이는 죄가 없어. 다 내 잘못이야.”
-이만 끊겠습니다.
“잠깐! 잠깐만!”
뚝, 전화가 끊어졌다. 권미는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안 돼. 안 돼!”
권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제발, 제발!”
그래도 권미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전화를 걸었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연결됐다. 전화기 너머로 권한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거세요.
“한울아! 부탁이야! 제발……!”
-바쁘니 이만 끊겠습니다.
권미의 얼굴이 짙은 절망감이 어렸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권한울의 한 마디가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두 손을 써야 해서 바쁩니다.
두 손?
권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 직후, 핸드폰으로 굉음이 들려왔다.
* * *
락브레이커의 주먹질을 멈췄다.
직감이 경고를 해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위?”
락브레이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봤다. 그 직후, 엄청난 충격이 은신처를 뒤흔들었다.
“뭐, 뭐야?”
무언가 와르륵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이어서 다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이 아니었다.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커지는 게 아니었다.
“가까워지고 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의 입구가 박살이 났다. 두터운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후우.”
그 사이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다 여기 모여 있었네.”
권한울이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쪽이 페르드랑스죠?”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로군. 잘 알아봤다.”
페르드랑스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권한울을 살펴봤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아, 질문은 나중에 받고.”
권한울은 몸을 돌렸다. 락브레이커를 쳐다봤다.
“뭘 봐?”
락브레이커가 인상을 쓰며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대뜸, 권한울이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이 락브레이커의 턱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충격으로 락브레이커의 머리가 휙 돌아갔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짧은 찰나, 권한울이 또 다른 자세를 잡았다.
현룡승천공 기본형(玄龍昇天功 基本形)
붕격식 나선파(韻擊式 頓線波)
권한울의 주먹이 락브레이커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어억!”
락브레이커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방출된 용마기가 락브레이커와 벽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벽이 붕괴되며 락브레이커의 몸이 파묻혀 버렸다.
권한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좀 속이 후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