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70화>
70화 계승식 (3)
주하연은 저택 바깥에 있는 작은 공원에 내려앉았다.
“왔어?”
공원에는 한 여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에서 굳이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었다. 존재감을 느꼈을 때부터 주하연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니까.
“마리아 산체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주하연의 말에 마리아 산체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판데모니엄의 의석에 오른 당신이 여기에 왜 있는 겁니까.”
“에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가운 척 좀 해 주면 안 돼?”
“질문에나 대답하시죠. 판데모니엄의 의원인 당신이 여기에 왜 있냔 말입니다.”
세계랭크와 판데모니엄은 업계의 위치뿐만 아니라 구조적으로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세계랭크에서 진짜 실력자들에게 넘버를 부여했다면 판데모니엄 역시 가장 강력한 악인들에게 의원직을 수여했다.
“내가 여기 왜 왔냐고? 별 거 없어. 페르드랑스가 널 붙잡아 줄 사람을 구했거든.”
“판데모니엄의 의원이 이렇게 한가할 줄은 몰랐군요.”
“한가하지는 않지. 근데 나랑 페르드랑스가 보통 사이가 아니거든. 무엇보다 너에 대한 일을 어떻게 남한테 맡기겠어.”
마리아 산체스의 미소가 변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 않았다.
“죽일 각오로 싸웠는데. 결판을 못낸 사람은 네가 유일하거든.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했는데. 널 다른 놈한테 넘겨줄 수는 없지.”
그 말에 주하연의 미간이 더욱 좁아졌다.
“아, 그렇지. 판데모니엄이 네 이야기로 가득한 거 알아?”
“그런 쓰레기 소굴의 소식에는 관심 없습니다.”
“흑천의 마녀가 남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고 소문이 쫙 났어.”
주하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소문을 듣고 얼마나 많은 애들이 울었는지 알아? 특히 오딘은 하나 밖에 없는 눈으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더라. 자기 여자를 뺏겼다나?”
“그 역겨운 인간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군요.”
“아, 그 말은 오딘한테 꼭 전해 줘야지.”
마리아 산체스가 저택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있는 남자가 소문 속 그 남자지?”
저택을 바라보는 마리아 산체스의 눈동자에 이체가 떠올랐다.
“괜찮네. 판단력도 나쁘지 않고, 배짱도 있고, 실력도 뛰어나고. 지금은 약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거 같네.”
마리아 산체스가 입가를 매만지며 말했다.
“흑천 그룹에 새로운 용이 탄생하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데.”
문득 마리아 산체스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여기 온 김에 죽여 버릴까?”
그 순간, 주하연의 분위기가 격변했다.
시커먼 마력이 솟구쳤다. 옥상의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철성(鐵城) 마리아 산체스. 죽고 싶습니까?”
마리아 산체스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제야 상황이 재미있어 졌다는 듯이.
“죽일 수는 있고?”
“못할 것 같습니까?”
“어머 무서워라.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네.”
마리아 산체스의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신체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1m 60cm에 불과했던 몸이 3m 가까이 자라났다. 크기만 커진 게 아니었다. 전신에 보호 장갑처럼 두텁고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았다.
몸은 괴물이나 다름없이 흉악하게 변했지만 얼굴은 여전히 여린 여성의 것이라 괴리감이 심했다.
“그럼 옛날에 끝내지 못한 사투를 마무리 지어볼까?
* * *
권한울은 남아 있는 팀원들을 시켜서 저택을 수색시켰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라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권한울이 한 마디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팀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시, 시간을 더 주시면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마, 맞습니다! 조금만 더 주시면 이번에야 말로…….”
팀원들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방금 전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권한울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 그렇게 겁먹지 말라니까요.”
정작 당사자인 권한울은 이미 머리가 식은 뒤였다.
너무 화가 나서 분풀이를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더 화를 내서 얻을 건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제가 같은 그룹 헌터를 어떻게 하겠어요?”
팀원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권한울 딴에는 위로를 하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었으나 팀원들에게는 정반대로 들린 듯 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에휴, 됐어요. 됐어. 그보다 진짜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 없어요?”
팀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로 무능해 보이는 광경이었으나 권한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분명 멀리가지는 못했다. 이 근처에 있을 거야.’
권한울의 감지능력은 상당히 뛰어나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잠시 무뎌지기는 했지만 저택을 벗어나는 것을 모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저택 안에서 사라졌다는 뜻인데…….’
의문은 다른 의문을 불러왔다.
‘애초에 락브레이커는 왜 함부로 움직인 거지?’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하지만 그건 좀 이상했다. 페르드랑스의 위치를 모르는데 어떻게 공을 세울 생각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연회장에 남아서 적들을 죽이고 하객들을 구하는 편이 더 큰 공훈을 세울 수 있다.
‘단순히 날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가능성이 아예 없는 가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권한울은 고개를 저었다.
‘못 믿을 인간이지만 멍청한 인간은 아니다. 그딴 짓을 했다가 하객들이 죽기라도 했으면 본인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락브레이커는 함부로 움직인 것인가.
권한울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저기…….”
중년의 여성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하객들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권한울이 묻자 여성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팀원들과 마찬가질 권한울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권한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다시 물었다.
“부인,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그게 말이죠…… 제가 아까 료코 아가씨랑 고리키 씨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거든요.”
그 말에 권한울의 눈동자가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무슨 내용이었죠?”
“예…… 고리키 씨가 은신처로 가야 한다고 말했어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곤란하니까 기회를 봐서 움직이자고 말하기도 했고요.”
중년의 여성은 당시의 대화를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다 여기를 지키시던 분께서 그 대화를 들으셨고…… 은신처로 같이 가자고 말씀하시더군요.”
“은신처로 말입니까?”
“예, 그 편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면서요.”
권한울은 턱을 매만졌다.
고리키 나나의 행동은 여러모로 수상했다. 적들이 쳐들어 왔으니 무서운 마음이 앞서는 거야 당연했다.
하지만 헌터들이 지키고 있는 마당에 굳이 은신처로 가자고 말한다? 그것도 다른 사람들 몰래?
“아…… 그리고 노무라 병원장님도 같이 데려가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중년의 여성이 이제 생각났다는 덧붙였다. 권한울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수상한데.”
이렇게 전해 듣기만 해도 수상한데. 현장에서는 얼마나 수상했을지 짐작이 갔다.
“……아하, 이제 알겠군.”
이제야 락브레이커가 왜 함부로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고리키 나나에게서 수상한 냄새를 맡은 것이다. 그 냄새를 쫓아가면 페르드랑스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리라.
“이제 이해가 가는군.”
하객들을 내버려둔 락브레이커의 행동은 용인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페르드랑스를 잡으면 말이 달라진다. 실수는 큰 실적으로 덮을 수 있는 법이 아닌가.
“혼자 죽일 수 있다 이건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페르드랑스가 판데모니엄의 악인이라면 락브레이커는 세계랭커다.
감지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여러 번 보여 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락브레이커를 평가 절하할 수는 없다. 그의 진가는 전투에서 발휘되니까 말이다.
“곤란하군.”
머리만 식었을 뿐, 가슴속은 아직도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락브레이커와 결판을 내지 않고서는 이 분노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페르드랑스를 잡으면 이번 임무의 모든 공훈이 그의 것이 된다. 그럼 죄를 묻기도 곤란한 상황이 된다.
“은신처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계십니까?”
권한울은 하객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볼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분들 중에도 안계십니까?”
사용인들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권한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스러웠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은신처겠는가. 아무도 모르니까 은신처지.
“누구 알고 있는 사람 없나?”
권한울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별안간 전화가 걸려왔다. 권한울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권미?”
뜻밖의 인물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권한울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이윽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한울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권미에게 들어본 어투는 화를 내거나 냉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렇게 다급한, 그리고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고모님, 전화를 잘못거신 것 같습니다.”
권한울은 권미가 전화를 잘못 걸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통화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지만 자존심은 지켜줘야 할 것 같았다.
적절한 대처였다고 자평하며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끄, 끊지마렴! 자, 잘못 걸지 않았어! 너한테 건 거 맞아!
권한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잘못 건 게 아니라고요?”
-지금 이렇게 여유부릴 시간 없어! 후, 후돈이가! 후돈이가 위험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락브레이커, 그놈이…… 그놈이 후돈이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권미가 소리쳤다.
-이대로 있으면 우리 후돈이가 죽는단 말이야!
* * *
천장이 높고 빛이 약한 곳.
“쿨럭.”
그곳에서 권후돈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쿨럭, 쿨럭…….”
권후돈의 상태는 심각했다.
전신의 피부가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반면 복부만큼은 절구에 토마토를 짓이겨 놓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이거 손속이 너무 과했나보군.”
그런 권후돈을 누군가 내려다보며 조롱했다.
“근데 좀 실망인 걸. 흑천의 혈족이 겨우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대장이 쓰레기인 거야. 아니면 소문이 과장된 거야?”
권후돈은 위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말했다.
“대, 대체…… 왜…….”
그 순간, 권후돈은 복부를 걷어차였다. 뒤에 있는 벽에 처박혔다.
“왜? 왜라고?”
락브레이커는 권후돈을 걷어찬 발을 허공에 툭툭 털었다. 마치 쓰레기라도 묻은 것처럼.
“그런 촌스러운 걸 물으면 쓰나.”
락브레이커는 권후돈에게 다가갔다. 권후돈은 걷어차인 충격 때문에 손으로 바닥을 긁으며 신음하고 있었다.
“대장,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골라. 여기서 나한테 맞아죽을지. 아니면…….”
락브레이커가 양팔을 펼쳤다. 그의 등 뒤로 팀원들과 생인형들이 쭉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들처럼 독을 삼키고 내 말을 따를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