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47화>
47화 강제 복종 (2)
이게 무슨 일이지?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루인 아스파담은 혼란스러워했다.
목에 힘을 주었다. 두 손으로 땅을 밀어냈다. 어떻게든 일어나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주어도 근육만 떨릴 뿐, 일어날 수 없었다.
일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있다. 루인 아스파담은 권속. 그렇기에 권속혈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자는 흑천의 혈족. 권속혈이 아니라 흑룡혈을 가지고 있다.
“이건…… 대체…….”
혈통은 두 개 이상 보유할 수 없다.
이는 상식 중에 상식이다. 해가 뜨면 어둠이 물러나고, 물속에서 불을 피울 수 없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상식.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뭐지?
어째서 흑룡혈을 가지고 있으면서 권속혈의 권능을 사용하고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더 의문인 것은.
“어떻게…… 날 강제로…… 복종을…….”
권속은 권속혈에 복종해야 한다.
예외가 있기는 했다. 권속과 혈족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클 경우, 혹은 권속의 정신력이 너무 강할 경우, 마지막으로 권속혈의 순도가 낮을 경우.
권속은 때때로 권속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다.
예외가 있지 않다면 루인 아스파담이 어떻게 나디아 블라가와 델 블라가의 명령을 거부했겠는가.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무척 어렵다고 들었는데. 너무 쉽군. 권속이라 그런 건가?”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린 머리 위로 발이 올라왔다.
“이대로 밟아버리면 깔끔하게 끝나겠어.”
꾸욱, 머리가 짓눌린다. 뼈를 깎는 듯한 굴욕에 루인 아스파담은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발이 떨어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몸이 가벼워졌다.
루인 아스파담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어째서…… 지배를 풀었지?”
“아깝잖아.”
권한울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부터 그쪽 실력이 궁금했거든. 세계랭커가 될 인재였다면서?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런 평가를 받는지 확인은 해봐야할 거 아니야.”
루인 아스파담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지는 경험을 맛봤다.
한참 뒤에야 이해를 했다. 저 남자가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약속하지. 지금부터 권속혈의 권능을 쓰지 않겠다. 그러니 죽일 기세로 덤벼라.”
무시무시한 살기가 루인 아스파담의 얼굴을 뒤덮었다.
흑천의 혈족이 어떻게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는지 그건 나중에 알아보면 된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이 굴욕을 피로 되갚는 것이다.
“……오냐, 내 반드시 네 놈을 죽여주마!”
루인 아스파담이 분노를 터트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맹렬한 살기가 사방으로 방출되었다.
“또 스킬을 쓰지 않을 생각인가?”
“말했을 텐데! 너 따위는 스킬은 필요 없다고!”
루인 아스파담이 땅을 박찼다.
공기가 터져나가며 루인 아스파담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권한울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 순간, 권한울의 두 손이 루인 아스파담의 팔을 휘감았다.
“……?”
당황할 틈도 없이 눈앞의 시야가 뒤집혔다. 부유감과 함께 등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컥!”
몸 전체를 타고 퍼지는 격통 속에서도 루인 아스파담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엎어치기.
주먹을 내지른 찰나, 권한울이 루인 아스파담의 팔을 붙잡고 땅으로 내던진 것이다.
“세 번이나 똑같이 움직이면 눈에 익을 수밖에 없잖아?”
권한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주먹 위로 용마기가 덧씌워졌다.
“자, 잠깐!”
루인 아스파담이 말릴 틈도 없이 권한울이 주먹을 내리쳤다.
용마기가 루인 아스파담의 몸통을 꿰뚫었다.
* * *
나디아 블라가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서 도망쳤다.
게이트를 통과해서 던전 밖으로 나가자마자 소리쳤다.
“도와주세요!”
밖에 있던 흑천의 헌터들은 깜짝 놀라서 나디아 블라가를 쳐다봤다.
있어서는 안 될 인간이 게이트에서 튀어나왔으니 놀랄 만도 했다.
“침입자?”
“일단 붙잡고 보자고.”
헌터들은 나디아 블라가를 붙잡으려 했다. 그보다 먼저 나디아 블라가가 헌터들을 붙잡고 소리쳤다.
“그, 그럴 때가 아니에요! 지금 권한울 님이, 권한울 님이 위험해요!”
말하던 헌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서 권지석 님을 모셔와! 당장!”
헌터 한 명이 황급히 사라졌다. 잠시 뒤, 권지석이 나타났다. 옆에는 주하연도 함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난리야. 쟤가 게이트에서 튀어 나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야, 넌 또 뭐하는 년이야? 어떻게 던전 안으로 들어갔어?”
“블라가 가문의 혈족이군요.”
주하연이 나디아 블라가를 살피며 말했다.
“뭐? 블라가 가문이라고? 거기 사람이 왜 이 던전에서 나와?”
권지석의 말을 들은 순간, 나디아 블라가는 자신이 얼마나 큰 실수를 범했는지 자각했다.
블라가 가문의 사람인 자신이 흑천 일가가 담당하고 있는 던전에 멋대로 침입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두 가문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얼버무려야 하나? 아니면 속여야 하나?
갈등도 잠시, 나디아 블라가는 그보다 권한울의 안전이 먼저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그보다 권한울 님이 위험해요!”
“권한울? 걔가 왜?”
“루, 루인 아스파담이…… 그 미친놈이 권한울 님을 죽이려 하고 있어요!”
순간, 주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말도 없이 몸을 돌렸다.
“야, 어디가?”
“권한울 님을 구하러 가겠습니다.”
주하연은 던전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팀원 중 한 명이 권지석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지원을 보낼까요?”
“농담이지? 니네가 다 가도 하연이의 한손도 거들기 힘들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우리는 밖에서 대기한다. 그리고 너, 혹시 모르니까 당장 서울에 있는 방위대에 연락해.”
“알겠습니다.”
권지석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너는…….”
나디아 블라가는 몸을 흠칫 떨었다. 권한울을 살렸으니 이제 자신의 목숨을 걱정할 차례였다.
“죽이지는 않으마. 대신 알고 있는 걸 전부 불어야 할 거다.”
“어머, 무서워라.”
그때, 귓바퀴를 깃털로 간질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탈리나 블라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렇게 가녀린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붉은색 벨벳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깊게 파인 가슴이 위협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누구나 눈길이 갈 법한 모습이었으나 권지석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그녀의 노출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카탈리나 블라가.”
으득, 권지석이 이를 갈았다.
“나 모르게 블라가 가문의 혈족을 던전 안에 집어넣어? 흑천의 원한울 사고 싶은 거냐?”
“어머, 제가 그렇게 멍청한 사람으로 보이세요?”
“그럼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벌인 거지? 당장 해명해라. 그렇지 않으면…….”
권지석이 나디아 블라가의 목을 움켜쥐었다. 나디아 블라가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 아이까지 죽으면 좀 곤란한데. 일단 제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헛소리를…….”
카탈리나 블라가의 눈동자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눈빛을 보자마자 권지석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
권지석은 재빨리 정신을 다잡았다. 그 직후, 깨달았다. 손이 텅 비어 있는 것을.
“컥, 커억.”
“나디아, 고생 많았어요. 좀 괜찮으세요?”
나디아 블라가는 어느새 카탈리나 블라가의 옆에 있었다.
나디아 블라가는 기침을 몇 번하더니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매달렸다.
“카, 카탈리나 님! 크, 크, 큰일이에요! 루인 아스파담이……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어요!”
“알고 있어요.”
“데, 델 아저씨도 죽어버리고…… 던전 안으로 들어가서 권한울 님도 죽인다고 했어요!”
“다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빨리 가서 막으셔야…… 예?”
나디아 블라가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서, 설마…… 루인 아스파담이…… 저렇게 행동할 줄 이미 예상하고 계셨어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디아 블라가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델 아저씨가 죽었어요! 그리고 저, 저도 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제가 이렇게 되기를 원했으니까요.”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나디아 블라가는 말문이 막혔다.
“대, 대체 무슨…….”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죠.”
“자,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안 그러면 저는 절대…….”
“이해해 주실 거죠?”
카탈리나 블라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디아 블라가의 얼굴이 풀렷다. 그리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카탈리나 블라가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권지석은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네 년은 혈족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화가 많이 나셨네요. 흑천의 사람들은 이런 게 존경스럽다니까요. 혈연이 끈끈하다고 해야 하나.”
“닥쳐라.”
용투기가 권지석의 주먹을 휘감았다. 예리한 살기가 카탈리나 블라가에게 쏟아졌다.
흑천의 혈족, 그 중에서도 순혈의 살기를 받고도 카탙리나 블라가는 미소만 지을 분이었다.
“싸우시게요? 승산이 없으실 텐데요.”
카탈리나 블라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순간, 권지석의 살기가 말끔히 지워졌다.
마력을 일으킨 것도, 살기를 내뿜은 것도 아니다.
단지 카탈리나 블라가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만으로 권지석의 기세를 압도한 것이다.
“제가 몸 쓰는 걸 안 좋아하기는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에게 당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그제야 권지석은 실감했다.
눈앞의 여자가 블라가 가문의 순혈이며 가장 오래된 원로.
자신은 물론이고 팀원들 전체가 달려들어도 카탈리나 블라가가 쌓아올린 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의 형 권선우쯤 되는 인물이 아니고서야 이 여자를 어찌할 수는 없다.
“이 창년이 지금 뭐라고 지랄하는 거지?”
그걸 알면서도 권지석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살기를 일으켰다.
“대한민국은 흑천의 영역이다. 근데 잘못을 저지른 주제에 오히려 협박을 해?”
카탈리나 블라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덤비면 죽는다니까요.”
“그래서?”
“예?”
권지석이 마력을 일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있던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
보기 드물게 카탈리나 블라가는 할 말을 잃었다.
“……아, 잊고 있었네요. 이게 흑천이었죠.”
자존심 하나로 살아가는 멍청이들.
혈족이 죽으면 가문 전체가 달려들어서 복수를 하는 얼간이들.
하지만 그만큼 실력이 있기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괴물들.
“으음, 그렇다고 진짜 다 죽일 수는 없고.”
“그럼 얌전히 뒈지시던가.”
“잠깐 기다려주실래요?”
대뜸 카탈리나 블라가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저에요. 계획이 조금 틀어져서요. 이게 이렇게 됐는데요. 왜 상의한 대로 하지 않았냐고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권지석은 미간을 구겼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동생 분한테 저 대신 말 좀 해 주세요. 당신도 일이 커지는 건 싫잖아요?”
카탈리나 블라가가 통화를 종료했다. 잠시 뒤, 이번에는 권지석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뭐해요. 받으세요.”
권지석은 스마트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형님-
그리고 이름을 본 순간, 머릿속이 정지 했다.
* * *
권한울은 땅바닥에 꽂혀 있던 주먹을 뽑아냈다. 그리고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어우.”
루인 아스파담의 상태는 처참했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서 내부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시체를 가져가야 하나?”
권한울이 고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루인 아스파담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뭐?”
당황한 나머지 권한울은 시체에서 멀리 떨어졌다.
루인 아스파담은 손가락은 꿈틀거리는 것을 넘어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끄, 끄으윽.”
루인 아스파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치 인형이 실에 딸려 올라오는 것처럼 기괴한 동작이었다.
“끄, 끄어어억.”
루인 아스파담이 신음소리를 냈다. 권한울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헌터들의 생명력이 강하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루인 아스파담처럼 내장이 모두 날아가고 척추가 통째로 뜯겨나간 채로 살아 있을 수는 없다.
“크흐흣, 이게 바로 카탈리나 블라가 님의 은총이지.”
복부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척추가 다시 자라나고, 내장과 근육이 도로 채워졌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카탈리나 블라가에게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권속의 힘이군.”
권속이 되면 여러 가지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알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건 상상 이상인데.”
카탈리나 블라가의 재생력도 대단했지만 루인 아스파담도 만만치 않았다.
죽어야 마땅할 부상을 단숨에 치료하는 능력이라니.
규격 외의 능력이었다.
“흐,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군.”
루인 아스파담이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아쉽게 됐어. 날 죽일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리다니.”
루인 아스파담이 마력을 일으켰다. 마력은 이윽고 시퍼런 뇌력으로 변했다.
뇌력이 주변의 나무와 땅을 긁어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벽력권을 보고 싶다고 했나?”
뇌력이 루인 아스파담의 몸을 휘감았다. 루인 아스파담이 움직일 때마다 뇌력이 뿜어져 나왔다.
벽력자의 비기가 비로소 눈앞에 나타났다.
“천둥이란 빠를 뿐만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로 갈라지기 마련.”
루인 아스파담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뇌력이 더욱 거세졌다.
“그렇기에 벽력은 쾌(快)요 변(變)이요 환(換)이니.”
루인 아스파담의 손과 다리에 뇌력이 집중되었다.
척추를 뽑는 듯한 오싹함이 권한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벽력굉천권 삼천(霹靂轟天拳 三天)
일수백변(一手百變)
수백 개의 권격이 권한울의 전신을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