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이 깡패임 15화>
15화 혈통이 마주침 (2)
“저는 진혈입니다.”
고심 끝에 권한울이 말했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는 거다. 진(眞) 흑룡혈을 가지고 있는 너라면 분명히 흑천 일가에서 대단한 위치에 오를 테니 말이다.”
권찬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게는 목표가 있다. 그걸 위해서는 흑천 일가의 정점에 올라야 해! 진혈인 네가 날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될 거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진혈이 순혈 밑으로 들어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냐는 겁니다.”
진(眞) 흑룡혈은 흑천 일가의 초대 가주인 권현문만이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진 혈통이다.
그런 혈통을 보유하고 있는 권한울이 순(順) 흑룡혈 밑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네 말에는 동의한다. 진혈이 순혈을 따르는 건 말이 되지 않지.”
“알면서 이런 제안을 하신 겁니까?”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이건 진혈이 순혈 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권찬성이라는 인간을 따르라는 뜻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어찌 혈통만으로 다른 이를 따르게 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섬길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다!”
즉, 권찬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혈 권찬성이 아니라 인간 권찬성을 따르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고.
“권한울, 내 오른팔이 되어다오!”
이렇게 자신만만한 사람은 처음이라 권한울은 살짝 당황했다.
잠시 머릿속을 진정시키고 옆에 서 있는 주하연에게 물었다.
“원래 저런 사람입니까?”
“원래 저런 분이십니다.”
주하연이 피곤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전에 권찬성의 막무가내 짓에 몇 번 시달린 모양이었다.
“괴팍한 분이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입니다. 권찬성 님과 그 팀은 현재 흑천 그룹에서 가장 많은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팀이기 때문이죠.”
그런 팀을 이끄는 남자가 권한울을 직접 스카웃하려고 하고 있다.
누구라도 어깨가 으쓱해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금 권한울이 느끼는 감정은 전혀 반대였다.
불쾌함.
사람의 가치 타령을 하기는 했으나 결국 순혈이 진혈을 아래에 두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도 참 많이 컸군. 삼류 헌터 시절에는 꿈도 못 꿀 일인데.’
삼류 헌터 시절의 권한울은 빈자리를 찾아서 직접 발품을 팔아야 했다.
그랬던 자신이 이제는 최고의 팀에 스카웃 제의를 받고도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다니.
“약속하지! 네가 우리 팀에 들어온다면 모든 지원을 해 주겠다! 진(眞) 흑룡혈에 내 지원이 더해지면 너는 흑천 그룹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권찬성은 주하연을 바라봤다.
“이건 하연이 너한테도 하는 말이다. 너만 와 준다면 팀의 수준이 훨씬 높아질 테니까!”
“저는 회장님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잠깐이라도 좋아.”
“죄송합니다.”
권찬성은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호쾌하게 포기했다.
“어쩔 수 없지. 진혈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권찬성이 권한울을 돌아보며 물었다. 권한울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권찬성의 팀으로 들어가서 나쁠 건 없었다.
앞으로 순혈과 지속적으로 충돌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권한울의 권위가 높아질수록 순혈들의 권위는 흔들릴 테니.
하지만 권찬성의 밑으로 들어가면 든든한 배경이 생긴다.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삼류 헌터 시절의 권한울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권한울은, 진(眞) 흑룡혈을 각성한 권한울은 그럴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성과 본심.
둘이 서로 충돌했다.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겁니다.”
주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권찬성 님이라면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 줄 테니까요. 그럼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권한울 님…….”
“울타리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안에 갇힌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 말을 하려는 거죠?”
어떻게 맞췄냐는 듯이 주하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형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오히려 그렇게 안 불렀으면 섭섭할 뻔했는걸!”
“형님의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저는 아직 부족한 몸입니다. 감히 형님께 방해될까 봐 걱정이 앞서는군요.”
“그거야 내가 부족한 실력을 키워 주면 될 일이지.”
말귀 한번 더럽게 못 알아듣네.
속으로 혀를 차며 권찬성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형님의 팀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겠지.
* * *
권찬성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살짝 감긴 눈동자로 권한울을 응시했다.
권찬성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권한울은 마치 심장에 얼음송곳을 박아 넣은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다시 묻도록 하지. 정말로 내 제안을 거절한 생각인가?”
“몇 번을 물어도 제 대답은 똑같을 겁니다.”
권찬성의 입가에 싸늘함을 숨기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잊고 있었군. 너 역시 흑천의 혈통을 잇고 있었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
권찬성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물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얻고자 했던 것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언젠가 날 돕게 될 테니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어린애 같다고 해야 할지, 오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 확신하는 거다.’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왔고, 또 정말 그렇게 됐을 테니까.
그렇다 해도 권찬성의 태도는 권한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이만 돌아가야겠군. 언제까지 이클립스의 시체가 썩게 놔둘 수는 없거든.”
권찬성이 헬기 쪽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내렸던 팀원들도 움직일 준비를 했다.
“참, 그렇지.”
갑자기 권찬성이 몸을 돌렸다.
“처음 만난 기념인데 선물도 제대로 못 줬군.”
권찬성이 품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본 순간, 팀원들이 경악을 했다.
“대, 대장님! 그, 그건! 이클립스의 심장 속에서 꺼낸 유물이잖습니까!”
“설마 그걸 건네시려는 건…… 아, 안 됩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데요!”
팀원들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권찬성은 그 반지를 권한울을 향해 튕겼다.
“잘 받게나. 귀한 물건이니까.”
권한울은 반사적으로 반지를 받았다.
-이름 : ???
-품질 : ???
-설명 : ???
특이하게도 반지에는 어떤 정보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형식적으로 감사를 표하기는 했으나 권한울은 이 반지가 영 의심스러웠다.
좋지 않게 끝매듭을 지었는데, 좋은 의도로 선물을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권한울은 반지를 착용하지 않고 그래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반지를 쥐고 있던 손이 따끔했다. 뭔가 싶어서 다시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은 깨끗했다. 권한울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혈통 ‘???’가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각성합니다.> <혈통 ‘천재혈(天才血)’을 습득하셨습니다.> 실로 괴팍한 이름이었다. 궁금증 보다는 황당함이 앞설 정도였다.
<천재혈(天才血)이 저주를 해석합니다.> <해석 완료. 유물의 자동 명령 수행에 의한 지효성 저주입니다.> <장기간 노출된 경우 정신 착란 및 세뇌 효과가 나타납니다.> 권한울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유물에 의한 저주라고 했다. 이 반지가 스스로 저주를 걸고 있는 거야.’
저주의 종류는 정신 착란 및 세뇌.
‘이 저주로 날 이용하겠다 이건가?’
권찬성.
처음에는 호쾌하고, 어딘가 이상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진짜 권찬성은 전혀 다른 남자였다.
‘동생과는 완전히 다르군.’
본모습을 완전히 숨기는 건 둘째 치고, 망설임 없이 사람을 세뇌시키려 할 줄이야. 그것도 착용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이 저주를 어떻게 해제해야 하지?’
지효성이기에 지금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지만 혹시 몰랐다.
그때였다.
<천재혈(天才血)이 유물의 구조를 파악했습니다.> <유물의 소유자 전환에 필요한 마력 패턴을 주입합니다.> 천재혈의 의해서 마력이 저절로 반지에 주입됐다.
<유물 ‘이클립스의 눈’의 소유자가 되셨습니다.> <진행 중이던 저주가 해제됩니다.> <현재 유물의 기능은 모두 잠금 상태입니다. 완전한 해금을 위해서는 특수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이름 : 이클립스의 눈
-품질 : 레전더리(SS+)
-마력 +30% / 정신력 +50%
-스킬
1. 세뇌 : 소유자 외에 반지를 접촉한 사람에 한해서 세뇌 저주를 건다.
노출 시간이 길수록,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체력을 소모할 수록 저주의 진행 속도가 가속화된다.
2. ???
3. ???
4. ???
레전더리답게 이클립스의 눈이 가지고 있는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제 이건 내꺼다.’
아마 권천성은 권한울의 세뇌가 끝나면 그때, 반지를 다시 회수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권한울이 반지의 소유자가 됐으니 그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반지를 돌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딴 시덥잖은 장난질을 쳤으니 이 정도 보상은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은가.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그제야 권찬성은 몸을 돌려 헬기로 향했다. 팀원 중 한 명인 청년을 지나칠 때였다.
권찬성의 입이 달싹거리자 청년의 몸이 바짝 굳었다.
반지 건으로 권찬성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던 터라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권한울이 의아하게 생각할 때였다.
방금 전, 권찬성에게 귓속말을 들었던 청년이 권한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거야 원, 대장. 이건 너무 초라하지 않수.”
권찬성의 팀원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머리를 샛노란 금발로 물들인 청년이었다. 팔뚝과 옷 사이로 보이는 근육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신입, 지금은 네가 나설 때가 아니다.”
권찬성은 곧바로 청년을 말렸다. 하지만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리 대장이 먼저 내민 손을 쳐 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선물만 쏙 빼먹고 가려는 저놈을 그냥 보고만 있으라고?”
청년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정말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것만큼은 확실했다.
‘둘 다 연기력이 제법인데.’
권한울은 청년을 훑어 봤다.
흑룡혈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분가의 혈족 못지않은 힘이 느껴졌다.
“나는 이필승이라고 하는데. 고귀한 흑천의 혈족께서 들어 보셨나 모르겠네.”
이필승.
헌터로 일할 무렵 지겹도록 들어봤다.
기프트(Gift)의 소유자로 외국의 유명한 길드들이 수백억의 몸값을 부르며 영입하려 했던 대형 루키.
어느 길드로 갈지 권한울도 궁금했는데. 설마 흑천 그룹의, 그것도 권찬성의 팀에 있을 줄은 몰랐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기프트(Gift)의 소유자 맞죠?”
“잘 알고 있네. 나 정도면 댁이랑 어울릴 거 같은데…… 어떠쇼? 내기 한번 해 보지 않겠수?”
이필승이 등에 매고 있던 장검을 손에 쥐었다. 그것을 힘껏 땅에 박아 넣으며 말했다.
“우리 대장이 준 유물을 걸고 한 판 붙어 봅시다. 내가 이기면 나한테 주고, 내가 지면…….”
이필승이 자신의 팔목을 톡톡 두드렸다.
“그 반지만큼은 아니지만 이 유물도 꽤 좋은 유물이야. 이걸 걸겠수.”
권한울이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반지에 의한 세뇌 저주는 당사자가 지칠 경우 더욱 가속화가 된다.
만약 큰 상처라도 입으면 저주가 뭉텅이로 진행이 되리라.
권찬성이 청년을 움직인 이유도 그 때문이 분명했다.
“행여나 흑천의 이름을 들먹일 생각이라면 집어치우쇼. 나는 그딴 거 안 따지니까.”
이걸 어떻게 한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권찬성이 부린 개수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민 끝에 권한울은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어디 한번 붙어 봅시다.”
이 남자를 박살 냄으로써 권찬성에게 보여 줄 생각이었다.
나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앞으로 이딴 개수작을 부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동시에 궁금했다. 예전에는 우러러보기만 했던 최상위 헌터가 얼마나 강할지.
지금의 자신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격차가 있을지.
* * *
“으하하하핫!”
권찬성이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 신입의 패기가 굉장하군. 아무리 내 명예를 위해서라지만 진혈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이필승이 짧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우리 동생. 조심하는 게 좋아. 우리 신입이 아직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적어서 약하지만 한 가닥 하거든. 이번에도 이클립스의 촉수 하나를 베어내는 걸로 소소하게 활약을 했지.”
이클립스의 촉수는 저층 건물 몇 채 정도는 단숨에 으깰 수 있을 만큼 컸다.
가만히 있어도 저 정도로 위협적인데. 만약 살아서 날뛰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것을 벨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니. 괜히 권한울에게 결투를 신청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내기를 받아들일 생각인가?”
권한울은 즉시 대답했다.
“한번 해 보죠.”
“좋아! 그럼 장소를 옮겨보자고!”
“아, 잠시만요.”
권찬성은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 좀 확인하구요.”
권한울은 상태창을 열었다. 방금 전, 습득한 천재혈을 확인해볼 참이었다.
<특수항목 – 혈통>
1. 흑룡혈(黑龍血)
-등급 : SSS+
-순도 : 진(實)
-용의 힘을 얻는다.
2. 건강혈(健康血)
-등급 : S+
-순도 : 진(實)
-건강해진다.
3. 천재혈(天才血)
-등급 : S+
-순도 : 진(實)
-똑똑해진다.
4. ???
-등급 : ???
-순도 : ???
권한울은 잠시 멍한 얼굴로 상태창을 바라봤다.
‘얘들이 왜 증식을 하고 있지?’